장세정 張世貞 | Jang Sejung | |
<colbgcolor=#878787><colcolor=#fff> 출생 | 1921년 5월 28일 |
평안남도 평양시 (現 평양시) | |
사망 | 2003년 2월 16일 (향년 81세) |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 |
가족 | 배우자 한두식 |
데뷔 | 1937년 '연락선은 떠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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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 때 주로 활동했던 대한민국의 가수.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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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모습. |
1921년 5월 28일, 평양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나이에 부모님과 이별하고 조부모의 밑에서 자랐다. 15세의 나이였던 1936년에 평양방송국 개국 기념 콩쿠르대회에서 1등을 하게 되었고, 다음 해인 1937년에 '연락선은 떠난다' 라는 곡을 발표하며 정식 가수로 데뷔하게 되었다. 당시 목포의 눈물을 발표해 많은 인기를 누렸던 가수 이난영과 함께 최고 인기 여가수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후 가수 김정구와 '만악에 백만원이 생긴다면은'[1] 이라는 곡을 발표했고, '처녀야곡', '불망의 글자', '항구의 무명초', '잘 있거라 단발령' 등의 곡을 발표했으며, 이 곡들도 히트를 쳤다. 이후 연주가인 한두식과 결혼했다.
이후 1960년대에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자 일본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으며, 1973년에는 우리나라에서 미국으로 이주해 생활했다. 1979년에는 고혈압으로 쓰러진 이후 휠체어에 의지해 생활하기 시작했다.[2] 미국에서 머무르던 중에 지병이 심하게 악화되어서 2003년에 작고했다.
참고로 한때 오케레코드사 사장 이철과 결혼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이것은 잘못 알려진 와전된 소문에 불과했고 남편이었던 한두식 씨와는 서로 초혼이었다고 한다. 당시 이철 사장의 부인은 일제 강점기 당시 배우 아니면 가수 또는 무용가로 알려진 현송자 씨라고 한다.
장세정 '연락선은 떠난다' |
장세정 '샌프란시스코' |
3. 대표곡
- 1937년 연락선은 떠난다
- 1940년 잘 있거라 단발령
- 1947년 고향초 - 원래는 송민도의 곡이지만, 장세정이 취입하면서 더 많은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 1948년 울어라 은방울
- 1953년 샌프란시스코
- 1953년 즐거운 목장
4. 기타
- 일제강점기 시절 친일 가요를 여러 번 발표하는 등의 친일 활동으로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3] 동시에 한민족들이 만든 최초의 걸그룹인 저고리 시스터즈의 고정 멤버로 활동한 적이 있다.
[1] 若しも月給が上がったら의 번안곡[2] 1988년에 가요무대에서 로스앤젤레스 위문 공연을 개최한 바가 있는데, 이 공연에 특별출연한 적도 있다. 다만 전술했다시피 휠체어에 몸을 의존해 말도 못하는 상황에서 나와 많은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샀다. 특히 그녀의 곡이었던 샌프란시스코를 자주 즐겨 불렀던 백설희가 안타까워 하는 모습이 보였고 김정구는 장세정과 오케레코드 입사 동기로써 좋은 약이 있으면 보내달라면서 눈물을 보였다.[3] 남인수 같은 케이스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다만 같은 그룹으로 활동했던 이난영 역시 친일가요를 부른 전적이 있는데도, 이상하게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