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생 기업인 장경호에 대한 내용은 장경호(1958)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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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동국제강그룹 초대 회장 장경호 張敬浩 | |
<colbgcolor=#C51F2A> 출생 | 1899년 9월 7일 |
경상남도 동래군 사중면 초량동 (현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 | |
사망 | 1975년 9월 9일 (향년 76세) |
국적 | [[대한제국| ]][[틀:국기| ]][[틀:국기| ]] (1899년 ~ 1910년)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1948년 ~ 1975년) |
본관 | 인동 장씨 |
호 | 대원(大圓) |
학력 | 보성고등보통학교 |
부모 | 아버지 장윤식, 어머니 문염이 |
형제자매 | 4남 2녀 중 3남 |
배우자 | 추명순 |
자녀 | 슬하 6남 5녀 장남 장상준 장녀 장복임 차남 장상문 차녀 장덕애 삼남 장상태 사남 장상철 삼녀 장옥혜 사녀 장종민 오남 장상건 육남 장상돈 오녀 장복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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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기업인. 동국제강그룹, 조선선재의 창업주. 호는 대원(大圓).2. 생애
1899년 대한제국 경상남도 동래군 사중면 초량동에서 부농인 아버지 장윤식과 어머니 문염이 사이에서 4남 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8살 때 어머니를 따라 통도사에서 불심을 지녔고, 경성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19년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일본 경찰들을 피해 도일했다. 유학을 마친 뒤 고향으로 돌아와 맏형 장경택의 목재소 일을 도우며 농사를 짓던 두 형에게 가마니를 공급하는 일로 사업을 시작했고, 1929년 초량동 부산중앙시장에 '대궁양행'을 세워 가마니를 팔아 사업을 시작했다.1935년에는 광복동에 '남선물산'을 세워 수산물 도매업 및 미곡업, 창고업 등으로 사업을 넓혔고, 1945년 8.15 광복 후 재일동포의 신선기를 인수해 '조선선재'를 세워 철과 관련된 사업에 처음 손을 뻗었다. 초기에는 고철을 수집해 못을 만들다가 6.25 전쟁 후 못의 수요가 늘어 급속도로 큰돈을 벌었고, 이에 따라 1954년 서울 당산동의 적산기업 한국특수제강을 불하받아 '동국제강'을 세웠다. 1963년에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부산제강소를 세워 1965년 국내 최초로 50t짜리 고로를 세웠다.
한편 1964년 삼남이자 후계자인 장상태[1]를 사장으로 승진시키고, 자신은 회장이 되어 1967년 철강 수출업체 대원사(현 동국산업), 1968년 철골 시공업체 동국산업 등을 각각 세우며 철강 관련분야에만 한 우물을 파오는 한편, 1970년에는 장학재단 '대원정사'를 세워 1973년 서울 용산구 후암동에 '대원불교회관'을 세우는 등 불교와 관련된 사회공헌에도 힘썼다. 죽기 두 달 전인 1975년 7월 10일에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호국 불교중흥을 위해 개인 소유 재산 30억 1,300만원 전부를 기부했다.
1975년 9월 9일 새벽 5시 40분, 서울 용산구 후암동 자택에서 숙환인 췌장암으로 별세했다. 장례는 대원정사불교회관에서 치러졌으며, 유해는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하산곡리에 안장되었다.
3. 가족관계
자세한 내용은 범동국제강가 문서 참고하십시오.4. 참고 문헌
[1] 현 동국제강그룹 장세주 회장의 아버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