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의 등장인물.고려 개성 왕씨 왕조의 초대 왕인 왕건의 조부로 본편 시작 시점(927년 11월)에서는 이미 사망한 지 오래인 고인이기 때문에 언급만 된다.
2. 작중 행적
작중 초반 임연우가 신례 때문에 우물 아래로 들어갔다 숨겨진 지하실을 발견하면서 지하실에 보관되어 있던 왕건의 할머니이자 작제건의 아내인 저민의의 묘비명과 작제건의 회고록으로 과거 내력이 밝혀진다.작제건은 송악 일대의 호족인 왕씨 가문의 일원으로, 어린 적 장보고가 만든 청해진의 비호를 받아 해적 걱정 없이 해상 무역을 하며 살았다. 그러나 청해진은 남해의 완도에 있었기 때문에 서해의 패강진에는 힘이 덜 미쳐서 해적들이 남아있었고, 이 때문에 청해진의 병력 일부를 패강진에 주둔시키자고 패강진 인근 호족들이 합의하여 오랫동안 장보고를 섬겼던 두은점과 휘하 병력들이 파견되었다. 그러다 작제건은 두은점의 환영 행사에서 우연히 미녀였던 두은점의 딸 진보의를 만나 반하면서 혼인하게 되었다.
그렇게 예쁜 아내를 곁에 두고 돈 많이 벌며 잘 사는가 싶었지만, 장보고가 신라 조정의 권력 다툼에 말려들어 피살당하고 몇 년 뒤 청해진도 몰락하면서 자신 또한 말려들게 되었다. 청해진에 속한 사람들은 신라 조정의 십여 년에 걸친 집요한 연좌제로 인해 하나둘씩 죽었고, 그 과정에서 두은점의 일가도 멸족되었다. 장보고가 841/846년에 사망하였고 청해진이 851년에 없어진 것을 고려하면 850년대에 해당 사건이 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작제건도 죽을 뻔했지만 평산 박씨의 지인이 보증을 서주어 신라 조정에 가문 재산의 대부분을 바쳐 간신히 목숨을 건졌고, 아내였던 저민의는 역대 당주들에게만 내려오는 송악산 아래 비밀 지하실에 숨겼다. 이 과정에서 청해진의 생존자들을 지하실로 이어지는 비밀통로를 통해 당나라로 탈출시키기도 했는데, 비밀통로에 있는 각종 그림과 조각들은 청해진 생존자들이 대기 중에 시간 때우기로 만들었다. 당시 청해진에는 재주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작제건은 저민의를 탈출시키려 했지만 저민의는 거부하였고, 결국 저민의는 지하실 생활로 몸이 급격히 악화되어 요절하였다. 왕평달의 말에 따르면 어릴 때 어머니가 갑자기 실종되었는데 아버지는 끝까지 어머니의 행방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섣불리 신라 조정에 원한을 가졌다가 김헌창과 장보고의 전례를 밟을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장보고가 죽자 다시 해적들이 창궐하였고, 작제건은 해적들과 죽어라 싸우며 다시 재산을 불렸다. 그러다 죽기 얼마 전 원종·애노의 난을 비롯한 신라 9주의 대규모 반란을 보면서 이번에는 다를까 싶으면서도, 이미 김헌창의 난과 장보고가 실패한 전례가 있기 때문에 섣불리 나설 수 없다고 판단해 죽을 때까지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다.
노년에 뱃사람들에게 우연히 들은 거타지의 설화를 표절해서 만든 용녀 전설과 향가로 지하실을 은유한 수수께끼를 만들고, 지하실에 숨겨놓은 저민의의 유골과 묘비명을 사후 누군가가 발견하면 저민의를 매장시켜 달라는 글을 지하실에 숨기고 사망하였다. 수수께끼가 풀릴 시기가 되면 신라 조정도 더 이상 추적할 여력이 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저민의를 서해 용왕의 딸로 비유한 이유는 저민의가 바다의 용처럼 자유롭게 살았으면 좋았을 거라는 안타까움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세월이 흘러 작제건 사후 손자인 왕건이 궁예에게서 왕위를 빼앗아 왕이 되면서 용녀 전설은 왕씨 왕조의 건국 신화가 되어버렸고, 그 부작용으로 오히려 비밀통로의 존재는 영영 묻히고 만다. 비밀통로의 단서인 벽화와 석상조차 수백 년만 지나면 완전히 강물에 깎여나가 사라졌을 거라고 하니 원 역사에서는 찾아낼 단서가 일체 남아있지 않았을 거라고 한다.
원종·애노의 난이 889년이기 때문에 889~890년에 사망한 것 같다. 930~940년대 초에 10대의 나이로 저민의와 혼인했다는 설정이니 사망 당시 60~70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저민의의 유골과 묘비명은 회수되어 절에 봉안되었다고 하며, 작제건이 회고록과 함께 남긴 두은점과 저민의의 가문 족보도 회수되었다. 그러나 가문 내력과 관련된 워낙 중요한 진실이라 해당 진실은 세간에는 철저히 비밀로 되어 있으며, 심지어 작제건의 손자이자 왕건의 사촌인 왕식렴조차 수수께끼를 임연우와 왕무가 풀었다는 것만 알지 그 내용은 모르고 있다. 현대에 진실이 밝혀졌는지에 대해서는 작가가 언급을 안 해서 알 수 없다.
3. 기타
원 역사에서 작제건이라는 이름은 본명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되는데 본작에서는 따로 지을 만한 이름이 없어서 그런지 저민의의 묘비명에서도 남편이 작제건이라고 표기해서 그냥 이름 취급했다. 다만 신라 사회에서는 성을 표기하지 않는 경우가 흔했고 이사부, 거칠부와 같은 향찰식 이름은 길게 쓰기도 했음을 고려하면 작제건은 성을 빼고 향찰식 이름을 쓴 모양이다. 고구려 말기의 연개소문도 한자식 표기는 개금(蓋金)이지만 향찰식 표기는 이리가수미(일본서기)로 향찰식 표기와 한문식 표기가 병행되어 사용되었다. 저민의도 아버지가 두은점(豆恩坫)이지만 묘비명에서 성을 생략하고 이름만 썼다.작제건의 에피소드를 장보고와 엮은 건 왕륭의 추정 생년이 840~850년대로 장보고의 몰락 시기와 겹치고, 현대에 해상왕이라 불릴 정도로 서남해 패권을 장악하던 대호족인 장보고의 특성상 송악의 바다 호족이었던 개성 왕씨 가문과 무역 문제로 연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작제건 에피소드 때문에 왕건과 왕평달은 원 역사보다 신라 김씨 왕조를 싫어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래도 왕건은 공사 구별은 명확히 하는지라 궁예처럼 철저히 조져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 김씨 왕조에 대한 대우는 원 역사와 같도록 했다. 굳이 싫어한다는 티를 내 봤자 긁어 부스럼인 만큼 현실을 우선시했다고 볼 수 있다. 삼국 통일 이후에도 끝까지 작제건의 비밀을 밝히지 않은 건 저민의의 비밀이 밝혀졌을 때는 이미 왕건이 자신의 찬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용녀 전설을 건국 신화로서 하도 우려먹어 속된 말로 너무 약을 많이 판 상황이라 이제 와서 바꾸기에는 뭐한 상황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유년기에 장보고 덕분에 편하게 장사를 했던 기억 때문인지 말년에 남긴 회고록에서도 장보고를 '장 대인'이라 호칭하며 존경하는 모습을 보였다.
말년에 작제건이 남긴 회고록을 보면 아내인 저민의와는 금슬이 매우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회고록을 보아 저민의 사후 재혼도 안 했을 가능성이 높다.
원 역사의 작제건은 아버지에 대한 가문 구전이 매우 부실해서 아직도 학계에서 논란이 분분한데[1] 본작에서는 송악의 왕씨 호족의 일원으로 나온다. 송악 왕씨 가문들의 가주에게만 대대로 내려오던 비밀통로의 존재를 전승받았던 만큼 대대로 송악에 머무르던 호족의 일원인 듯하다. 작중에서는 왕건의 건국 이후에도 살아있었다는 설정인 작제건의 아들 왕평달이 조부에 대해 제대로 전하지 않은 것과 작제건이 840년대~850년대 청해진 대숙청에 말려들 당시 아버지에 대한 언급이 없고 평산 박씨 지인이 구해주었다는 것을 보아 작제건의 아버지는 상당히 일찍 죽었던 모양이다. 청해진 대숙청에 말려들어 가문이 한 번 몰락했다가 겨우 재건한 것이기도 하고, 작제건도 자식들에게 가문 내력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작제건의 선대에 대한 전승이 실전되었던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