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1 18:23:32

임중용/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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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클럽 경력
1.1. 유소년 시절1.2. 한일생명 축구단1.3. 부산 대우 로얄즈 / 부산 아이콘스
1.3.1. 1999 시즌1.3.2. 2000 시즌1.3.3. 2001 시즌, 그리고 임의탈퇴
1.3.3.1. 임중용은 부산에서 기회를 얻지 못했는가?
1.4. 대구 FC1.5. 인천 유나이티드
1.5.1. 2004 시즌1.5.2. 2005 시즌1.5.3. 2006 시즌1.5.4. 2007 시즌1.5.5. 2008 시즌1.5.6. 2009 시즌1.5.7. 2010 시즌1.5.8. 2011 시즌

1. 클럽 경력

1.1. 유소년 시절

어릴 때부터 친구들과 축구를 즐기면서 자연스레 축구부에 들어가게 됐다. 본래 육상부에서 활동했었는데, 같이 육상을 배우던 친구가 옆에 있던 상계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친구가 축구 한 번 하자고 한 제안에 따라갔는데, 그 이후 임중용도 상계초등학교 축구부에 들어가면서 축구 경력을 시작했다.[1]

상계초등학교는 일종의 자매결연으로 인해 축구부 선수들을 재현중학교, 강동고등학교로 보내는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임중용도 자연스레 재현중, 강동고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강동고 시절 팀을 대회 4강으로 이끌고, 득점왕을 차지하는 등 경력을 차근차근 쌓았다.

강동고를 졸업한 후엔 성균관대학교로 진학했다. 성균관대에서는 혹독한 훈련을 경험하면서 고생도 했지만, 끝내 주장 완장까지 차는 등 핵심 선수로 인정받았다. 성균관대 시절까지는 공격수를 주로 맡아 팀의 주포로 활약하였다. 아마추어 레벨에서는 득점왕이 될 정도로 재능 있는 공격수라는 평을 받았다.

1.2. 한일생명 축구단

성균관대를 졸업한 후 프로가 아닌 실업 무대 소속의 한일생명 축구단에 입단하였다. 당시 한일생명은 실업 무대에서는 최강의 팀이었는데, 임중용이 소속된 1998년에만 세 차례의 우승과 두 차례의 준우승을 거뒀다고 한다. 당시 한일생명에는 후일 인천에서 함께 뛰게 되는 골키퍼 권찬수도 있었고, 포항에서 프로 선수로 생활한 안선진도 있었다. 임중용은 대통령배 축구대회에서 득점왕을 차지하며 팀의 준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그러나 1998년 12월, 한일생명 축구단이 IMF의 여파로 해체를 선언하면서 1년만에 소속팀이 사라지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K리그 드래프트마저 종료된 시점이어서[2] 임중용은 갈 곳이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한일생명의 감독이었던 신윤기가 임중용에게 에이전트를 소개시켜줘서 벨기에로 날아가 소속팀을 찾아보기도 했지만, 쉽사리 적응하지 못하면서 결국 한 달만에 귀국을 결정하게 된다. 외국에서도 소속팀을 못 찾은 상황이었기에 임중용의 상황도 꽤나 애매해졌다.

1.3. 부산 대우 로얄즈 / 부산 아이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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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갈 곳이 없어진 임중용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는데, 신윤기가 부산의 스카우터로 자리를 옮기면서 임중용을 부른 것. 드래프트는 이미 종료되었기에 연습생 신분으로 합류해야 했지만, 소속팀을 꼭 구해야 했던 임중용은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1.3.1. 1999 시즌

시즌이 시작되기 직전인 2월에야 부산에 입단한만큼 시즌 초에는 2군에서 머물렀다. 하지만 머지않아 기회가 찾아왔는데, 2군 팀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자 1군으로 올라왔다. 당시 이차만 감독이 팀의 총감독으로 승격되면서 감독 자리가 비자 그를 부산에 영입한 신윤기 스카우터가 감독 대행 역할을 맡았고, 이러한 배경 역시 임중용의 입지 상승에 영향을 줬다.

신윤기는 부산으로의 이적 외에도 임중용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공격수로 뛰던 임중용에게 프로에서는 공격수 자리에서 살아남기 어렵고, 수비적인 포지션으로 전향하면 충분히 잘 해낼 수 있다고 조언한 것. 결국 이 조언을 받아들인 임중용은 수비형 미드필더로 포지션을 변경하였다.

아마추어 시절과 달리 미드필더로 뛰기 시작한 임중용은 주전 미드필더들이 줄부상으로 이탈하자 그들의 자리를 메울 선수로 선택받았고, 주전 멤버로 맹활약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는 공격수에서 포지션을 바꾼 지 얼마 안 지나서 공격적인 재능이 높은 평가를 받았고, 수비적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주전으로 등극한 임중용은 첫 시즌부터 많은 출전 시간을 확보하면서 '진흙 속에서 건진 진주'라는 평을 받았다. 연습생 신분이었지만 뛰어난 활약을 보인 그는 1999 시즌 리그 25경기 1득점 2도움, 리그컵 9경기에 출전하며 총 34경기를 뛰는 등 존재감을 확보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비극도 있었는데, 그를 프로에 입문시킨 신윤기 감독대행이 급성 백혈병 판정을 받은 데 이어 뇌졸중으로 인해 시즌 도중 사망한 것. 이후 시즌 말미에는 심리적으로 흔들렸는지 한창 좋을 때보다 폼이 떨어진 모습도 보였다.

1.3.2. 2000 시즌

첫 시즌의 활약을 바탕으로 시즌 종료 후 3년 재계약을 체결한 임중용은 팀의 미래를 이끌 젊은 자원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새 시즌을 앞두고 김호곤 감독이 부임하면서 이전만큼의 위상을 보여주지 못했다. 시즌 초반부터 중반까지는 나름대로 꾸준히 경기를 소화했지만, 뒤로 가면서 입지가 흔들리고 주전에서 밀려나게 됐다. 개인의 경기력 역시 좋지 못했는데, 수비 실수가 잦았고 김호곤 감독 체제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2000 시즌은 리그 16경기, 리그컵 8경기 1도움에 출전하여 총 24경기에 나선 채 마무리했다.

1.3.3. 2001 시즌, 그리고 임의탈퇴

결국 2001 시즌에는 완전히 주전 경쟁에서 밀려났다. 시즌 내내 리그 2경기에만 출전했는데, 포항 원정에서 후반 44분 교체 투입된 것과 수원 원정에서 간만에 선발로 출전하여 풀타임을 소화한 것이었다.

경기에 제대로 나오지 못하던 임중용은 이적을 요청했는데, 다른 팀에서도 제의가 오면서 뛰기 위해 이적하고 싶다고 김호곤 감독에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호곤 감독은 이적 요청을 거절했고, 그 뒤 팀을 이탈해버린 임중용은 임의탈퇴로 공시되었다.

임의탈퇴 공시 이후 약 1년 4개월을 쉰 임중용은 2002 월드컵 기간에도 집에만 있었다고 한다. 모두가 축구에 열광하고 있었지만, 스트레스가 극에 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축구선수 생활을 그만둘 생각도 했었고, 약 반년간 아버지를 따라 운전기사 생활도 했지만 다시 운동을 하고 싶다는 열망이 생기면서 축구계 복귀를 도전하게 된다.

그러던 도중 2003년, 김호곤 감독이 부산을 떠나고 이안 포터필드 감독이 새로 부임하게 된다. 포터필드의 부임을 계기로 임중용은 다시 팀에 합류했지만, 오랫동안 운동을 쉰 여파로 동계훈련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결국 훈련에서 적응하지 못한 임중용은 팀과의 계약을 해지하게 된다.
1.3.3.1. 임중용은 부산에서 기회를 얻지 못했는가?
임중용은 비상 영화를 비롯한 인터뷰 등지에서 "김호곤 감독 시절 출전 기회를 거의 못 받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김현회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김호곤 감독 밑에서 한 시즌동안 27경기를 따라다녔으나 1분을 뛰었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록 상 2001년 임중용은 1경기가 아닌 2경기에 나섰고, 본인이 언급한 포항전을 제외한 나머지 한 경기는 풀타임을 소화했다. 또한 김호곤이 부임한 첫 시즌인 2000년에는 준주전급으로 기용되기도 하였다. '한 시즌'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을 볼 때 2000년이 아닌 2001년만을 이야기하려는 의도가 있던 것으로 보이지만, 김호곤 감독 시절 전체를 보면 맞지 않는 이야기가 된다.

한편 김호곤 시절 영입된 연세대학교 출신 제자들은 장대일, 송종국 등이 대표적인데 장대일은 부상이 많아 실질적으로 임중용의 입지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송종국은 전성기를 맞이하여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당시 스쿼드에 좋은 선수가 워낙 많았기 때문에 출전 기회를 받기 어려울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3]

임중용의 인터뷰 이후 김호곤 감독이 큰 비판을 받았지만, 언급한 내용으로 볼 때 사실이 아닌 부분도 있어서 부산 팬덤의 반발을 샀다. 본인의 기억이 시간이 지나 흐려졌거나 2001년만 얘기하려는 의도였는데 그것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으나 기사의 내용이 저렇게 나온 이상 비판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1.4. 대구 FC

부산을 떠난 후 성균관대 시절 은사인 임고석 감독의 제안을 받고 수원시청 축구단에서 함께 운동을 했다. 프로에 대한 미련을 가지기보다는 편하게 운동하면서 공무원 자격증이라도 따며 후일을 준비하자는 제안이었다. 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임중용은 수원시청의 전지훈련지인 제주로 내려가서 운동을 이어갔다.

그런데 전지훈련지에서 과거 안면이 있던 대구 FC박종환 감독과 호텔에서 마주치게 된다. 신생팀이었던 대구 역시 제주도로 전지훈련을 떠났고, 같은 호텔을 쓰다가 생긴 해프닝이었다. 부산 경기도 자주 보면서 임중용과 아는 사이었던 박종환은 임중용에게 대구로 오라는 제안을 했고, 몸 상태에 자신이 없었던 그는 처음에 거절했으나 결국에는 대구 합류를 결정하게 된다.

대구의 창단 멤버가 된 임중용은 박종환 감독 밑에서 힘든 훈련을 소화해야 했지만,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기에 새벽 운동까지 나서면서 몸을 끌어올렸다. 워낙 오래 쉬었기 때문에 전반기에는 계속해서 몸 상태를 만드는 데 주력했고, 하성준 수석코치가 박종환 감독에게 경기에 나서도 될 정도가 됐다고 이야기한 이후에야 출전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대구에서 센터백으로 포지션을 바꾼 임중용은 첫 경기부터 훌륭한 모습을 보여줬고, 전남을 상대로 득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실제로 좋은 모습을 보여준 덕분에 부산 팬들조차도 부산 시절에 이런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았겠다는 감상을 남길 정도였다. 최종적으로 리그 15경기 1득점을 기록하면서 성공적으로 프로 무대에 복귀했다.

박종환 감독이 다음 해에는 출전도 보장해주고, 주장으로도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할 정도로 신뢰를 보여줬지만 재계약 협상 과정에서 이견이 발생했다. 대구 이적 당시 몸 상태도 나빴고, 늦게 영입됐기에 신인보다 연봉이 낮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재계약 협상 과정에서 대구 측이 연봉을 더 내리려고 했고, 기본보다는 더 달라고 요구하자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았다.

1.5. 인천 유나이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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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부산 시절부터 인연을 맺어 당시 인천 단장 역할을 맡았던 안종복에게 정화가 왔다. 안종복은 대구보다 높은 연봉을 줄테니 이적을 제안했고, 임중용은 자신의 재기를 도운 대구의 수석코치 하성준에게 이 이야기를 꺼냈다. 하성준은 남았으면 좋겠지만, 대우를 받고 싶다면 인천으로 가는 게 낫겠다고 이야기했고 결국 인천 이적을 결심했다고 한다.

이적 소식에 박종환 감독이 불호령을 내리며 연봉을 올려주겠다는 말을 했고, 대구 구단 측에서도 재계약 제안을 다시 했지만 이미 인천과 도장을 찍은 상태였다. 임중용만 떠난 건 아니었고, 김학철 역시 임중용과 함께 인천 이적을 선택했다. 그렇게 임중용은 대구에 이어 인천의 창단멤버가 됐고, 그의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커리어가 마침내 시작됐다.

1.5.1. 2004 시즌

인천 이적 이후 초반에는 교체 멤버였지만, 이윽고 주전으로 올라서서 많은 경기를 소화하기 시작했다. 초반에는 부산 시절과 마찬가지로 미드필더로도 제법 출전하다가 이후 센터백으로 고정되었다. 장외룡이 임중용에게 수비수로 완전히 전향할 것을 권유했고, 후방에서 선수단 전체를 리드하는 역할을 주문했다.

인천에서의 첫 시즌에 대해 임중용은 좋은 선수들이 합류했기 때문에 분위기는 정말 좋았다고 회고했다. 시민구단치고는 재정적으로도 괜찮았고, 창단 멤버의 퀄리티도 좋았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과 별개로 팀의 초반 성적은 상당히 부진했다. 베르너 로란트 감독 밑의 인천은 경기력도 부진했고, 알파이 외잘란이 팀워크를 해치면서 상당히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로란트는 팀을 하나로 만드는 부분에서 미흡했고, 자연스레 팀은 끈끈하게 결속되지 못했다. 결국 오래 가지 못해서 로란트도, 외잘란도 팀을 떠났고 장외룡이 감독 대행을 맡았다.

장외룡 체제가 시작된 이후 임중용은 더욱 더 핵심적인 선수로 맹활약을 펼쳤다. 리그컵에서의 퇴장 징계를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의 경기를 선발로 나설 정도였다. 임중용의 활약에 힘입어 팀은 초반의 부진을 씻고 중위권까지 치고 올라가면서 시즌을 잘 마무리했다.

2004 시즌 출전 기록은 리그 17경기 1득점, 리그컵 12경기, FA컵 1경기까지 총 30경기 1득점.

1.5.2. 2005 시즌

새 시즌을 앞두고 인천의 새로운 주장이 됐다. 그리고 이때부터 주장 역할을 쭉 수행하면서 인천 역사 상 가장 오랫동안 주장 완장을 찬 선수로 남아있다.

2005년에도 임중용의 입지는 여전히 높았다. 인천이 돌풍을 일으키는 가운데 수비진의 핵심 역할을 맡은 임중용은 쓰리백의 중앙에서 팀원들을 조율했다. 워낙 뛰어난 활약을 보여줬기에 국가대표 소집 여론이 나올 정도였다. 이 시즌 임중용은 FA컵에서 단 한 경기를 제외하면 인천의 모든 경기에 선발로 출전하면서 팀의 심장으로 활약했다. 정식 감독으로 승격한 장외룡 감독의 밑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선수였다.

그 유명한 제난 라돈치치와의 일화도 이 시즌이었다. 투게더라는 단어로 회자되는 이 둘의 관계에 대해 임중용은 라돈치치의 성격 자체가 잘 한다고 말하면 거만해지는 경향이 있다고 답했다. 그래서 누군가는 쓴소리를 해줘야 했고, 본인이 그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하지만 사적으로는 좋은 사이였고, 서로 장난도 치면서 즐겁게 지냈다고 밝혔다.

임중용은 인천의 핵심 선수로 활약하며 전기리그 2위 및 전후기 통합 승점 1위, 창단 후 첫 플레이오프 진출 달성에 큰 공을 세웠다. 시즌 최후반부에는 피로누적으로 일시적 시력 상실이라는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지만, 얇은 스쿼드 사정 상 출전을 강행하기도 했다. 끝내 팀은 울산을 넘지 못하고 준우승을 거뒀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언급될 정도로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임중용은 2005년 K리그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됐고, 인천 소속으로 처음 베스트 일레븐에 포함된 선수가 됐다.

2005 시즌 기록은 리그 27경기 3득점 2도움, 리그컵 12경기, FA컵 1경기를 포함하여 총 40경기 3득점 2도움.

1.5.3. 2006 시즌

새 시즌에도 변함없이 주장을 맡아 팀을 이끌었다. 인천은 작년보다 아쉬운 성적을 냈지만, 그래도 중위권에서 싸우며 다른 팀들을 위협하는 전력은 보여줬다. 임중용은 그 중심에 서서 팀을 지켰다. 2005년만큼은 아니지만 임중용은 수비의 핵으로 인천에 큰 도움을 줬다. 2005년에 이어 2006년에도 국가대표 승선 루머가 계속해서 나왔고, 실제로 검토 중이라는 말까지 나왔지만 결국 실제로 승선하지는 못했다.

한편, 시즌 종료 후 3년간 열애했던 여자친구와 결혼식도 치렀다. 2006년에 그가 주연급으로 나왔던 영화 비상도 개봉했으니 임중용에게 2006년은 여러모로 의미가 큰 해였다.

2006 시즌 기록은 리그 25경기 1득점, 리그컵 7경기, FA컵 4경기를 포함하여 총 36경기 1득점.

1.5.4. 2007 시즌

장외룡 감독이 유학을 떠나고 박이천이 대행을 맡은 상황 속에서 팀을 주장으로 이끌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있었다. 본래 2006 시즌 종료 후 주장 완장을 내려놓을 의사를 밝혔고 전재호에게 완장이 넘어갔으나, 시즌이 시작되기 전 결국 임중용이 다시 주장으로 복귀했다.

팀 전술도 훨씬 공격적으로 바뀌는 등 변화가 많았지만 주전 멤버로 팀의 중심을 잡아줬다. 거의 대부분의 경기에서 선발로 나선 임중용은 오랜 파트너인 김학철이 노쇠화가 시작된 상황에서도 주전으로 수비진을 이끌었다. 시즌 초에는 노쇠화 얘기가 나오는 등 약간 흔들렸으나, 곧 다시 폼을 회복하여 팀 수비의 주축으로 활약했다. 시즌 중반에는 프로 통산 200번째 경기를 소화하면서 의미가 깊은 시즌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시즌 말미에 큰 사건이 벌어졌다. 일명 침두 사건. 2007년 9월 22일 인천과 수원의 리그 22라운드 경기가 펼쳐졌는데, 양팀 모두에게 상당히 중요한 경기였다. 그런데 이 경기에서 전반 27분 임중용과 에두가 출돌했고, 임중용 퇴장-에두 경고가 주어졌다. 에두가 임중용을 가격하고, 임중용이 밀쳐버린 상황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재호까지 퇴장당하면서 경기 분위기는 기울어졌고, 분위기도 어두워졌는데...

전광판으로 리플레이가 나왔고, 에두가 침을 뱉는 장면이 관중들에게 보여졌다. 그 이후 경기장의 분위기는 엄청나게 격해졌고, 경기 종료 후 관중들이 심판을 향해 분노를 토로하는 등 소요사태까지 벌어졌다. 경기 종료 후 당시 인천 소속이었던 데얀 다먀노비치가 심판이 인천을 죽인다고 격하게 발언할 정도의 분위기였다.

침을 뱉은 행위에 대해 인천은 에두가 두 번 뱉었다, 수원은 에두와 임중용이 둘 다 뱉었다고 주장했다. 해당 사건에 대한 명확한 증거는 리플레이에도 잡히지 않아 남아있지 않으며, 임중용 본인은 맹세코 침을 뱉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경기 종료 후 퇴장당한 임중용, 전재호는 물론이고 에두와 인천 구단도 징계를 받았지만, 정작 심판은 징계를 받지 않았다. 이로 인해 팀 분위기가 어수선한 가운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방승환이 심판에게 옷을 벗고 항의하다가 퇴장당하는 사건까지 터졌다. 방승환은 이 사건으로 1년 출장 정지 징계를 받았고, 주장이었던 임중용은 팀 분위기를 다잡아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떠맡게 됐다.

결국 2007 시즌 인천은 막판에 미끄러지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는 등 아쉬운 시즌을 보냈고, 장외룡이 복귀하는 다음 시즌을 기약해야 했다.

2007 시즌 기록은 리그 23경기, 리그컵 10경기, FA컵 4경기 1도움을 포함하여 총 37경기 1도움.

1.5.5. 2008 시즌

장외룡 감독이 팀에 복귀했고, 이전 시즌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으로 인천의 이미지가 악화된 상황에서 주장 임중용은 팀을 이끌어야 하는 막대한 책임을 지게 됐다. 시즌 시작 전 인터뷰에서 임중용은 실추된 이미지를 회복하는 게 급선무고, 페어플레이를 하는 팀으로 거듭나겠다고 밝혔다. 나아가,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게 노력하겠다는 말도 남겼다.

시즌 시작 후 임중용은 여전히 중요 멤버로 활약을 이어갔다. 한편, 인터뷰를 통해 방승환의 사면을 요청하는 등 팀을 대표해서 여러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팀의 성적도 다소 애매했고, 주장으로 맡은 책임감도 워낙 컸다.

결국 시즌 중반 전북과의 경기를 치르던 도중 실신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교체된 후에도 병원으로 가는 것을 거부한 채 벤치에서 동료들을 독려했다. 이후 병원에서의 진단은 과도한 스트레스가 문제였고, 이 사건 이후 오랫동안 차고 있던 주장 완장을 노종건에게 넘겨주었다.

실신 사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큰 공백기 없이 지속적으로 출전을 이어갔고, 팀도 어느 정도의 성적을 거두기는 했다. 그러나 끝내 방점을 찍지는 못했고,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장외룡 감독도 인천을 떠났다.

2008 시즌 기록은 리그 23경기, 리그컵 2경기를 포함하여 총 25경기 출전.

1.5.6. 2009 시즌

2009년에는 시즌 초 안재준과 함께 엄청난 존재감을 보여주며 안정된 수비진을 이끌었다. 이 둘과 후방의 김이섭 골키퍼까지 포함하여 기념 굿즈가 발매될 정도였다. 시즌 중반에 팀이 어수선할 때 팀을 대표하여 쓴소리를 하기도 했고, 주장이었던 이준영이 장기부상으로 이탈하자 다시 주장 완장을 차고 팀을 이끌었다.

이미 30대 중반이 된 노장이었지만, 경기력을 유지하기 위해 5kg을 감량하는 의지까지 보여준 임중용은 팀의 플레이오프 진출에 공헌했다. 2005년 이후 4년만의 성과였다.

2009 시즌 기록은 리그 28경기 1득점, 리그컵 6경기 등 총 34경기 1득점.

1.5.7. 2010 시즌

노장이었지만, 2010년에도 주전으로 기용되며 팀을 책임졌다. 하지만 팀 분위기가 어수선한 시즌이었고, 임중용도 예전만큼의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실책도 전보다 늘어났고, 주변 선수들 역시 부진하면서 실점이 많았던 시즌.

팀의 성적이 하락세인 가운데 일리야 페트코비치 감독도 떠났고, 허정무 감독이 새롭게 들어왔다. 허정무 체제가 시작된 이후 임중용의 비중은 조금씩 줄어들었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2010 시즌 기록은 리그 23경기, 리그컵 3경기, FA컵 2경기 등 총 28경기 출전.

1.5.8. 2011 시즌

인천과 오래 함께했던 선수들이 줄줄이 팀을 나가면서 임중용의 거취에도 이목이 집중됐다. 2010년 12월 22일 플레잉코치 신분으로 재계약을 맺으면서 팀에 남게 됐지만, 선수로는 사실상 은퇴한 것과 다름없었다.

허정무 감독은 배효성, 정인환, 이윤표 셋을 2011년 한 해동안 영입하며 수비를 완전히 재구성했고, 그 과정에서 임중용 외의 수비수인 안재준, 김영빈, 장경진도 자리를 잃어 떠났다.

시즌 시작 후에는 실제로 1군 명단에서 배제됐고, 훈련도 2군에서 받았다. 본인 표현으로는 같이 훈련했다기보다는 보조를 맞춰주는 정도라고 말할 정도였는데, 선수가 부족할 때 인원을 채워주는 느낌으로 지냈다고 한다. 현역 시절 함께 했던 우성용 코치에게 지도법을 배우면서 자격증을 따는 등 사실상 이미 '코치'의 범주에 들어가는 신분이었다. 그를 상징하는 등번호 20번 역시 새로 들어온 정인환에게 넘어가고[4], 임중용 본인은 48번을 달았다.

그러다가 2011 시즌 마지막 상주 상무와의 경기에서 구단이 은퇴식을 치러주기로 결정했고, 이 경기에서 뛸 기회를 잡게 된다. 경기 막판에 교체로 투입된 임중용은 홈 팬들 앞에서 마지막 경기를 치를 수 있었고, 임중용은 팀 동료들의 목마를 받으며 홈 팬들의 환호 속에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K리그 통산 294경기 출전. 그중에서 인천 유나이티드에서만 219경기(리그, 리그컵 합산)를 뛰었다. FA컵을 포함하면 총 231경기에 나섰다. 현역 시절이었던 당시 인천 역사 상 가장 많은 경기를 뛴 선수였고, 그 후로도 10년 넘게 이 기록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2023년 김도혁이 이 기록을 깨면서 역대 출전 2위가 됐지만, 여전히 인천을 상징하는 인물로 팬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1] 당시 육상을 배우던 친구들 상당수가 야구 또는 축구로 전향했다고 한다. 임중용 본인은 원래 야구를 더 좋아했지만, 어쩌다보니 축구를 하게 됐다고.[2] 해체가 결정된 날이 드래프트 마감일이었다.[3] 중앙 수비수들과 비교가 많이 되었지만, 실질적으로 임중용의 센터백 보직 변경은 대구 이적 이후였다. 이 시절까지는 아직 미드필더에 가까웠다.[4] 인천 팬들은 임중용 이후의 20번으로 안재준을 기대했는데, 그 안재준을 트레이드로 보낸데다가 정작 20번은 안재준과 트레이드된 정인환이 바로 받으면서 반발도 있었다. 정인환이 좋은 활약을 보여주면서 여론이 진정되긴 했으나, 이후 정인환이 팀과 썩 좋지 못한 이별을 하면서 역대 20번 중에서는 흑역사 취급을 받았다. 한편 안재준은 정인환이 떠난 시점에 반대로 인천에 복귀하여 결국 인천의 20번 유니폼을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