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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46a38><colcolor=#fff> | |||
출생 | 1919년 12월 4일 | ||
인도 제국 펀자브 파리 데르베자 | |||
사망 | 2012년 11월 30일 (향년 92세) | ||
인도 공화국 하리아나 구루구람 | |||
재임기간 | 제12대 총리 | ||
1997년 4월 21일 ~ 1998년 3월 19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46a38><colcolor=#fff> 학력 | 펀자브 대학교 | |
종교 | 힌두교 | ||
신체 | 168cm | ||
소속 정당 | 자나타 달 | ||
약력 | 주 소련 인도 대사 (1976 ~ 1980) | ||
인도 연방상원의원 (1992 ~ 1998) | |||
인도 연방하원의원 (1998 ~ 1999) | |||
인도 연방상원의장 (1996) | |||
외무부 장관 (1996 ~ 1998) | |||
금융부 장관 (1997)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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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도의 제12대 총리. 1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 동안 재임했고 그마저도 정치 기반이 불안정해 얼마 못가 물러난 총리다.2. 생애
1919년 12월 4일 펀자브 지방의 힌두 상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이후 펀자브 대학교에서 공부를 하다가 전인도 학생동맹에 가입, 'Quit India' 운동 등 인도 독립운동에 참여했는데, 이때문에 1942년에는 영국 식민당국에 구금되기까지 할 정도였다. 한창 혈기로 넘치던 구지랄은 석방된 이후에도 학생 신분으로 인도 공산당에 가입해 활동했고 정계에 진출하면서 점점 입지를 키웠다.구지랄은 1958년 뉴델리 시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출됐고 1964년에는 인도 국민회의에 가입하며 본격적인 중앙 정계로 진출했다. 인도 국민회의의 실세 인디라 간디와도 친분이 있던 덕에 1964년에는 인도 상원, 라자 사바 의원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인디라 간디의 측근으로 급성장한 구지랄은 인디라 간디가 계엄을 선포한 후인 1975년에도 정보방송부 장관으로 일했는데, 이때 정보방송부 장관으로써 인도의 언론통제에 앞장섰다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1] 구지랄은 1976년까지 상원의원으로 일하다가 주소련 인도 대사로 임명되어 1980년까지 재임했다.
주소련 인도 대사로 일하던 구지랄은 1980년 인도 국민회의를 떠나 야당연합 '자나타 달(Janata Dal)'로 당적을 옮겼다. 구지랄이 인도 국민회의를 떠난 이유는 확실치 않으나 인디라 간디 총리의 아들 산제이 간디와의 갈등이 문제가 되지 않았나 추정할 뿐이다. 정보방송부 장관으로 일하던 구지랄이 산제이 간디와 언론통제 문제로 싸웠다는 것. 어쨌든 구지랄은 1989년 총선에서 펀자브의 자나타 달 후보로 출마, 당선되며 비슈와나트 프라탑 싱 총리 내각에서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된다. 구지랄 장관은 외무부 장관으로 재임 동안 카슈미르 분리주의 반군이 정치인 딸을 납치한 사건을 해결하는 업적을 남겼지만, 걸프 전쟁 도중 이라크 거주 인도인들의 신변을 보장한다는 협약을 이라크와 체결하는 과정에서 사담 후세인을 포옹하기도 하면서 논란을 낳기도 했다.
[1] 구지랄이 정보방송부 장관으로 일할 적에 인디라 간디의 아들이자 실세 산제이 간디와 갈등이 있었다는 말이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