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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4년 1월 8일 |
경상북도 대구부 (現 경상북도 대구광역시) | |
사망 | 1947년 6월 26일 (향년 53세)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본관 | 전주 이씨 |
가족 | 아버지 이종하, 어머니 김정원 오빠 2명, 여동생 1명 배우자 권도인 |
학력 | 신명여학교 (졸업) |
이명 | 이금례(李今禮), 이혜경, 권희경, 권혜경 |
서훈 | 건국포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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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2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94년 1월 8일 경상북도 대구부에서 전주 이씨 이종하와 김정원 사이의 2남 2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본명은 '이금례'이다. 그녀는 대구 신명여학교(오늘날 신명여자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회로 졸업하였다. 1912년 10월 18살의 나이에 사진신부로써 하와이로 이민하여 경상북도 영양군 출신의 24세 남성 권도인과 결혼했다. 두 사람은 가구 사업에 몰두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상당한 재산을 확보했다. 가장 빛을 발휘한 상품은 대나무 발 커튼이었다. 옆으로 펼치는 대나무 발에 아름다운 그림까지 가미된 것으로 더운 하와이의 날씨에 안성맞춤이었고, 호응도 좋아 샌프란시스코에 공장을 세울 정도로 잘 팔렸다.이후 두 사람은 가지고 있는 재산을 활용해 독립운동에 적극 뛰어들었다. 1919년 4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창립된 하와이 부인단체의 통일기관인 대한부인구제회의 회원 활동을 하며 국권회복운동과 독립전쟁에 필요한 후원금을 모집, 제공하였으며, 애국지사 가족들에게 구제금을 송금하는 등 구제사업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1928년 영남 출신 이극로가 유럽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던 길에 하와이에 체류하여 국어강연을 할 당시, 이승만이 이극로를 폄하하면서 영남지역 멸시 발언을 하자, 이희경은 경상도 출신 부인들과 함께 대한부인구제회를 탈퇴했다.
1928년 9월 27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김보배·박금우·곽명숙·박정숙·이양순 등과 함께 영남부인회를 조직했다가, 후일 영남부인실업동맹회로 개칭하여 회장을 역임하면서, 15년간 한인부인사회의 발전과 독립운동 후원, 재미한인사회의 구제사업 활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1930년 후반부터 남편 권도인과 함께 독립금과 각종 의연금, 군자금을 제공하였다. 1940년대 초반에는 부인구제회 호놀룰루 지방회 대표로서 부인구제회 승전후원금 모집위원, 부인구제회 사료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는 재무부 위원과 조사부 위원을 역임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이렇듯 권도인과 이희경 부부가 독립운동을 위해 1935년부터 8.15 광복 때까지 기부한 금액은 신문 <국민보>에 기록된 것만 헤아려도 1만 달러에 달했다.
8.15 광복 후 한국으로 귀환하려 했으나, 하와이에서 이승만과 갈등을 빛은 것 때문에 귀국하지 못하였고, 1946년 2월 중순에 조직된 전후한국구제회에서 회계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1947년 6월 26일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이희경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4년 권도인, 이희경 부부의 유해를 하와이에서 국내로 봉환하여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합장했다.
3. 참고 문헌
- 독립유공자공훈록 15권
- 세명일보
- 대구광역시 공식 블로그
- 여성신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