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8-23 11:57:01

이성계(태종 이방원)/인간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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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KBS 대하드라마 태종 이방원의 등장인물 이성계의 인간관계를 정리한 문서.

2. 목록

2.1. 이방원

향처 한씨에게 본 다섯째 아들. 영민하고 집안에서 처음으로 과거에 급제한 집안의 자랑. 이 때문에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아들임에도 난세에 끼어들었다가, 험한 꼴 당하지 않길 바라는 아버지의 심정 때문에 대업에 참여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하지만 격동의 세월과 아들의 야망은 그의 바람대로 되지 않을 예정. 〈용의 눈물〉, 〈정도전[1], <육룡이 나르샤>, 〈나의 나라[2]에서 대부분 초반부터 방원에게 성급하게 나대지 말라고 야단치고 냉랭하게 대하는 모습인 것과는 달리, 이 드라마에선 극초반부 한정으로 실제 기록대로 살가운 부자관계로 묘사되고 있다. 대업에 참여하겠다는 것을 말리는 것은 같으나 〈용의 눈물〉에서는 위화도 회군 직후에 군영으로 찾아온 방원이 아버지의 혁명에 함께 하고 싶다고 하자 "닥쳐라, 이놈. 누가 혁명을 한다 하더냐?"라고 버럭 화를 내는 것과는 달리, 이 드라마에서는 온전히 부성애에 대한 발로로 이방원의 안위를 걱정하기 때문에 역성혁명에 참여하지 말라고 당부한다는 게 대조적이다. 방원의 친모 한씨가 죽자 방원에게 3년상을 시킨 일을 두고 민제는 “후계자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는데, 당시 이성계는 이미 역성혁명을 꾀하고 있을 때니 결국 새 왕조를 세우면 방원을 세자로 책봉할 생각이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정몽주 살해 사건 이후 이방원에 대한 신뢰를 접어버리면서, 그를 비롯한 한씨 소생의 아들들을 완저히 냉대하게 된다. 이후 이방원이 자신에게 석고대죄를 하면서까지 용서를 빌며, 부자관계를 바로잡으려하는데도 철저히 거부하며 관계는 점점 악화된다. 급기야 신덕왕후와 정도전과 짜고 치며 자신을 포함한 한씨 소생의 자식들을 배제하는데다, 이방원이 양녕대군 이전에 낳은 3명의 아들을 잃고 멘붕하며 역심을 품게 된 탓에 완전히 적이 되어버린다.[3] 게다가 신덕왕후의 죽음 이후 중전을 죽게하고 세자를 해칠 놈이라 매도하며, 이방원의 관모와 상투를 칼로 베고 내쫓으면서 부자 관계는 돌이킬 수 없게 된다.

결국 무인정사를 일으킨 이방원에 의해 신뢰하던 대신 정도전과 가장 총애하던 세자 방석이 죽고, 같은 강씨 소생의 아들이자 방석의 친형제인 (방간의 독단이지만) 방번과 사위 이제까지 살해당하고 만다. 이에 이방원의 힘에 굴복하면서도 그를 낳은 것이 자신의 최대 업보이고, 그가 용상을 얻게 된다면 자결을 결심할 정도로 일관되게 증오심을 표출한다. 그럼에도 역사대로 방과가 2차 왕자의 난 이후 방원에게 양위해버리자 자기 손으로 방원을 거두기 위한 최후의 시도로, 직접 거병을 일으키나 실패하게 되고 남은 여생을 사실상 궁 안에서 연금당하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세월이 흘러 자신을 찾아온 방원이 용서를 구하자 냉정하게 밀어내며 방석을 앗아간 것에 대한 원망이 여전하다는 것을 드러내지만, 막상 떠나고 나선 원망과 부정(父情)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기색을 드러내는 어쩔 수 없는 아버지로써의 모습을 드러낸다. 결국 최후에 이방원을 국왕으로서 인정함과 동시에, 조선의 앞날을 부탁하고 부자 관계를 어느 정도 회복한 뒤 눈을 감는다. 이후 이방원의 삶을 보면 그의 손에 상처입은 사람들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이방원을 용서하고 인정한 사람이 된 것.[4]

2.2. 신의왕후 한씨

동북면에서 인연을 쌓았던 자신의 향처. 역성 혁명을 앞두고 사망하자 급히 포천으로 달려가서 죽음을 애도했다. 항상 전장터에 있던 자신 때문에 평생 마음고생한 것에 큰 미안함을 느꼈다. 그러나 건국 후에도 제릉을 일반인 묘 형식으로 내버려두는 등[5], 명목상의 아내 이상의 감정은 없다. 한씨가 죽었을 때는 그냥 무덤덤했고 이방원 포함 한씨 아들들을 일방적으로 냉대했으나, 강씨가 죽자 애통함을 이기다 못해 앓아 눕고 강씨 소생 자녀들을 편애하는 등, 비교되는 행보를 보여주었다. 그렇기때문에 무인정사에서 고스란히 업보를 돌려받은 것.

2.3. 신덕왕후 강씨

자신을 정계로 진출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던 경처. 장성한 한씨의 아들들을 바쁜 자기 대신 챙겨줄려고 애썼다. 한씨가 죽은 뒤 유일한 아내가 되면서 더더욱 의지하다가 마침 정몽주를 죽인 일로 이방원과 갈라서게되자 죽은 한씨의 자녀들을 거들떠보지않고 강씨를 중전으로, 강씨의 막내 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 등 편집적 애정을 보였다. 강씨가 자신보다 먼저 죽자 대놓고 오열하다가 아예 앓아 누워버리고, 이후 강씨의 능묘를 도성 내에 조성할 정도로[6] 그녀를 애도했다.

이성계와 신덕왕후는 마지막까지 서로를 사랑했음에도 끝내 같은 에 안장되지 못했는데[7] 그 점에서 애증으로 끝난 이방원과 원경왕후가 같은 능에 안장된 것과 대비된다.

2.4. 이방우

이성계의 향처 한씨에게 본 장남. 장남 답게 위화도회군 당시 자신과 같이 인질로 잡혀있는 동생을 잘 다독이면서 의젓한 모습을 보이지만 위화도 회군 이후 아버지의 반 고려 행보에 실망감과 불만을 드러내며 대립했다. 이후 이성계는 이방우가 폐인으로 전락한 이유가 신덕왕후의 계략임을 죽을 때까지 알지 못했다.

2.5. 이방과

향처 한씨에게 본 둘째 아들. 자신을 닮아 무인의 기질이 강하며 여러 전장에서 자신을 보필해온 충직한 효자. 방과 역시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깊어서 정몽주의 참살과 효수, 역적 낙인을 계기로, 이성계가 마음을 닫아버리고 계속 자신들을 냉대하는데도 시종일관 용서를 구하며 저자세로 굴었다. 결국 이방원이 일으킨 무인정사로 신덕왕후 소생의 아들들이 모두 죽어버리자, 자신에게 가장 효심이 깊었던 방과에게 자신의 마지막 기대를 걸어 방원을 견제하게 했다. 2차 왕자의 난 이후 방과가 방원에게 양위한다는 걸 알고 크게 실망하지만 궁에 유폐된 자신을 직접 꺼내주는 등, 살뜰하게 아버지를 챙기는 효자 아들이다.[8] 방과 입장에서는 기껏 여생이라도 자유롭게 살다가길 바랬던 아버지가 동북면에서 세력을 규합하여 조정에 칼을 겨누자 본인의 실책으로 인한 후회와 아버지가 고집을 꺾지 못한 한탄의 감정이 겹쳤으나 그마저도 이성계가 이방원에게 패배하고 오랜 세월이 지나 겨우 방원을 왕으로 인정하고 모든 원한을 내려놓고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의 국상 자리에서 애도를 표했다.

2.6. 이방간

향처 한씨에게 본 넷째 아들. 역시 무인 기질이 있었으나 즉흥적이며 성미가 급한 성격 탓에 총애를 받지못했다. 위화도회군 후에 방과와 사소한 다툼이 벌어지자 이를 중재하며 누구든 제 핏줄을 향해 칼을 뽑는 자는 자신의 손에 처벌받을 것을 경고했다. 그러나 그 경고를 분명히 들었음에도 방간이 결국 방원에 대한 열등감이 폭발하여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자 실제로 태조는 행동 전에 직접 찾아온 방간에게 소 같은 놈이라고 욕했고 당연히 이기지 못할 명분없는 싸움이기에 방간의 편을 들어주지않았는데 여기서는 그저 밖에 장졸들 소리만 둘었지만 정황상 김 내관을 통해 방간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을 알았을테고 끝내 방간과는 화해하지 못한채로 끝났다. 이는 오만함에 눈멀어 그나마 남아있던 가족관계까지 스스로 파탄낸 방간의 실책이다.

2.7. 이방석

경처 강씨의 둘째 아들이며, 이성계에게 있어서 가장 막내 아들. 방석은 조선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정몽주를 참살하면서 관계가 틀어진 한씨 소생의 아들들과 달리 눈밖에 날 일을 한 적도 없으며, 나이도 자신의 아들들 중에서 가장 어렸기 때문에 각별히 아꼈고 조선 개국 후 세자로 책봉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러한 자신의 편애로 왕실의 분란은 겉잡을 수 없이 커졌고 끝내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방석은 이성계의 안위만이라도 구하기 위해 자청해서 폐세자가 되고 결국 이방원에게 참살당한다. 최후에 이방원을 국왕으로 인정하기 전까지 이성계가 원한에 몸부림치며, 조사의의 난을 일으키며 발악할 정도로 이방원에게 대항했던 이유.

2.8. 이방번

경처 강씨의 첫째 아들이지만 고려 왕실과 혼인했다는 이유로 동생에게 밀려난 것에 원망을 표출했다. 1차 왕자의 난에서 이성계가 기꺼이 방번의 유배형을 허락할 정도로 자식 이상의 감정은 없었으나 그 역시 방간이 보낸 병사에게 살해당했을때 방석을 잃었던 만큼의 슬픔을 느낀듯.

2.9. 경순공주

강씨 소생의 셋째 딸. 이성계가 세상에서 가장 귀여워했던 딸이었다. 강씨 소생의 자식들이 1차 왕자의 난에서 모조리 죽고 경순공주만 홀로 남은 상태에서 그녀의 죽음이라도 막기위해 불가에 귀의시키는 슬픈 선택을 내려야했다. 딸의 머리를 손수 깎아주다 감정이 북받쳐서 오열했고, 삭발을 마치고 어엿한 비구니가 된 딸의 모습이 어여쁘면서도 서글프다며 눈물을 흘리면서 성불을 기원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경순공주마저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9]

2.10. 정몽주

황산대첩 때부터 함께한 오랜 동지이자 역성혁명을 두고 대립했던 관계. 본작에선 이성계 본인의 정치적 야심이 철철 흘러넘치지만 동시에 정몽주를 존중하는 마음도 커서 창왕 처리 문제로 갈라서게 된 마당에도 포은이 반대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할만큼 어떻게든 그의 마음을 잡으려고 하였으나, 정몽주는 끝까지 고려의 신하로 남았고 현실을 직시한 이방원의 명을 받은 조영규에 의해 선지교에서 참살당하며 끝내 그를 잡지 못하고 영원히 놓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이성계는 이방원을 포함한 한씨 소생 자식들을 배척했고,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고 그의 뒤를 이어 용상에 오르고싶었던 이방원을 그의 손에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스스로 용서할 때까지 16년간의 원한의 시발점이 되었다.

2.11. 정도전

용의 눈물〉, 〈정도전〉, 〈육룡이 나르샤〉에서처럼 정도전이 상당히 비중있는 주역으로서 이성계와 혁명 동지이자 끈끈한 군신 관계로 묘사된 것과 달리 본작에서는 가문 중심으로 다뤄졌기에 조연으로 밀려난 정도전은 그저 묵묵히 주군의 대업에 참여하고 정치적으로 어려움이 있을 때 조언을 구하는 역할에서 크게 벗어나지않았다. 정몽주와 마찬가지로 이방원 손에 1차 왕자의 난에서 목숨을 잃었다.

2.12. 이지란

믿음직한 의동생.[10] 전장을 함께 누비고 다닌 베테랑 동생이지만 정치에는 아직 서투르다 보니 감정적으로 대처할때가 많지만 그래도 조정에서 자신의 불만을 대신해서 내뱉어주는 등 충직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성계가 복수심에 눈이 멀었을 때도 이지란이 말렸지만 그의 의지를 꺾지못했다. 그래도 이지란이 병사했을때 의형으로서 착잡한 감정을 드러내기도했다.[11]

2.13. 이화

자신의 이복동생. 이지란과 세트로 조정을 다니면서 자신의 우군 역할을 해줬다. 하지만 무인정사가 있던 밤 이화가 방원의 편에 선 것을 알자 내쫓았고, 그 후로 접점은 없었다.[12] 얄궂게도 이화는 이복형과 같은 해에 병사했다.

2.14. 민제

사돈. 접점은 많지 않지만, 사돈지간으로써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이후로는 군신관계로써 서로 예를 갖춘다. 그리고 실제 역사에서나 본작의 같은 회차(27회)에서 이 둘은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다.

2.15. 조영무

이성계와 오랜 시절 전장에서 함께 했던 가별초 제자이자 한때는 믿음직스러운 부관. 이성계가 이방우와 이방원의 싸움을 보고 상심한 나머지 역성 혁명을 도중에 관두고 동북면으로 돌아가려고할 때도 조영무가 한번 시작한 일을 끝을 봐야한다고 조언하며 그의 마음을 다잡게했고 이방원이 총대를 메고 정몽주를 죽였을 때도 조영무도 함께했으나 이성계는 이방원에게만 책임을 전가하고 조영무에게는 용서를 베풀었기에 조영무는 조선 건국 후에도 그의 곁을 지켰다. 하지만 왕씨 몰살을 명령받고 그것을 수행했을 때 조영무는 무의미한 학살 현장에 환멸을 느꼈고 이방원이 몰래 사병들을 훈련했을 때도 이성계가 격노하여 그를 순군부에 가두라는 명령에도 이성계 몰래 이방원을 풀어주는 등 점차 판단력이 흐려지는 이성계와 야심이 많은 이방원 사이에서 갈등을 느끼고 결국 1차 왕자의 난이 발발했을 때 이성계는 병석에 눕고 이방석은 별다른 대처를 못하자, 자신을 어떻게든 회유하려던 이방원 쪽으로 돌아서게되고 그 이후로 이성계는 조영무와도 적대 관계로 일변했다.

하지만 조영무는 마음 한편으로 옛 주군을 버린 것에 후회는 남아있어도 이성계가 이방원에 대한 노여움을 풀길 바랬고 자신의 바램대로 이성계가 이방원과 죽기 전에 극적으로 화해를 한 뒤 세상을 떠나자 자식으로 애도한 태종처럼 조영무도 신하로서 누구보다 많이 오열했다.

2.16. 김 내관, 조사의

김 내관은 이성계가 즉위한 이후로 태상왕 시절까지 곁에서 충직하게 보좌했으며 조사의는 동북면으로 돌아온 이성계의 아들과의 마지막 싸움에 앞장선 행동대장이었다. 이 둘은 이성계에게 남은 최후의 심복으로 이성계가 패배한 후, 이방원에 의해 역적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1] 〈정도전〉은 표현을 잘 안 할 뿐 그래도 용의 눈물보다는 이성계가 이방원을 염려하고 따뜻하게 대하는 모습이 더 많이 나왔다.[2] 가족들을 무사히 구출해 돌아온 이방원에게 칭찬은 커녕 다짜고짜 "어디 전리정랑 따위가 서서 보고를 하느냐"며 윽박지르고 무릎꿇게 시킨다.[3] 아이러니한 건 그때 이성계는 신덕왕후에 의해 그나마 누그러진 태도를 보이며, 조금은 이방원에 대해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는 거다. 하지만 이미 때는 너무 늦어버렸다.[4] 나머지 한명은 이방원의 아들인 이도다. 〈용의 눈물〉이나 〈대왕 세종〉에서도 화해했던 원경왕후도 본작에서는 이방원을 용서하지 않았다.[5] 한씨가 공식적으로 왕후에 추존된 건 그녀의 차남 이방과가 왕위에 오른 뒤였다. 이전까지는 그저 절비(節妃)에 추존되었을 뿐이었다.[6] 이러한 행위는 왕릉은 도성에서 10리(4km) 밖에 위치해야 한다는 예법마저 무시한 행태로, 세자 이방석의 입지를 위해 죽은 신덕왕후의 권위를 세워주려고 이성계가 일부러 관철시킨 것이다.[7] 태종이 신덕왕후를 증오하여 정동에 있던 신덕왕후의 능을 정릉동으로 강제이장시키고 능에서 묘로 격하했을 뿐만 아니라 석물들까지 청계천 공사에 써버렸다.[8] 이성계도 궁에 유폐된 현 상황에서 단식투쟁을 하는데 정종이 정에 약하다는 것을 알고있지만 정말로 자신을 궁에서 빼낼리라는 것은 처음엔 예상치못해 당황했으나 바로 이걸 기회로 잡은 것이다.[9] 경순공주가 세상을 떠난 해는 1407년(태종 7년) 8월 7일이었다. 즉, 아버지 태조보다 1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10] 실제로 둘의 관계는 피보다 진한 물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당장 자기 이복형과의 관계를 보면 이지란과의 관계가 훨씬 더 좋음을 알 수 있다.[11] 아들인 이방원과 이화상도 서로 형제처럼 지냈는데 이지란이 이성계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것과 달리 아들인 이화상은 이방원의 임종까지 지켜보았다.[12] 무인정사 이후에도 이화는 이방원의 편에 죽을때까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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