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이협(李鋏)[1] |
자 / 호 | 응오(應五) / 학산(鶴山) |
본관 | 진성 이씨[2] |
출생 | 1879년 |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임북면 미지리 (현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미질리)[3] | |
사망 | 1919년 1월 25일 |
중화민국 봉천성 동변도 유하현 (현 중국 지린성 퉁화시 류허현) | |
묘소 |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미질리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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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이운호는 그의 4촌 형이다.
2. 생애
1879년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임북면 미지리(현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미질리)에서 아버지 이중표(李中杓, 1839 ~ 1904. 1. 11)와 어머니 안동 권씨(? ~ ?. 1. 17)[4] 사이의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그는 1907년 3월 7일 안동군 주사(主事)에 임명되어 재직하면서 이상룡 등의 독립운동을 비밀리에 지원했고, 1909년 7월 25일 사직했다.
이후 이상룡 등을 지원한 사실이 발각되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얼마간 구류를 살기도 했으며, 석방된 뒤에는 은거하다가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1911년 이상룡·김동삼 등과 함께 마침내 청나라 봉천성 동변도(東邊道) 해룡부(海龍府)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의 추가가(鄒家街)[5]로 망명했다.
그는 이곳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이상룡·김동삼과 함께 독립운동에 종사하다가, 그해 베이징으로 가서 선통제의 내종숙(內從叔)[6]인 영검지(英劒之)를 만나 조선에 닥친 일을 논하고 침략자 일본에 대한 격퇴를 강력히 요청했으나, 이듬해인 1912년 신해혁명이 일어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뒤 신흥무관학교가 이전한 봉천부(奉天府)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7]로 가서 독립군 기지를 구축하고 독립운동을 함께 할 동지를 규합하는 등 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은 것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늘 번민하다가 1919년 1월 25일 봉천성 동변도 유하현에서 끝내 순국했다. 그의 유해는 이듬해인 1920년 5월 국내로 봉환되어 고향 마을에 안장되었다.
198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1] #[2] 주촌종파(周村宗派)-정로위공파(定虜衛公派)-아호파(鵝湖派) 20세 호(鎬) 항렬. 무슨 연유에선지 진보이씨 상계파세보 상권 168쪽에도 상계파(上溪派)-강정산파(江亭山派) 20세 후손으로 등재되어 있다.[3] 출생지인 미질리 852번지는 1973년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었다.[4] 권재일(權載一)의 딸이다.[5] 현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퉁화시(通化市) 류허현(柳河縣) 쩌우자촌(鄒家村). 싼위앤푸조선족진(三源浦朝鮮族鎭)과의 거리는 약 6km에 불과하다.[6] 조부 아이신기오로 이후완의 여동생의 아들[7] 현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퉁화시 퉁화현(通化縣) 광화진(光華鎭) 광화촌(光華村) 제7촌민소조(第七村民小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