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7 00:54:24

윌리 펩


<colbgcolor=#000><colcolor=#fff> 윌리 펩
Willie Pep
파일:CTBHF_2005_Pep.jpg
본명 굴리엘모 파팔레오
Guglielmo Papaleo
출생 1922년 9월 19일
미국 코네티컷 미들타운
사망 2006년 11월 23일 (향년 84세)
미국 코네티컷 로키 힐
신장/리치 165cm / 173cm
체급 페더급
스탠스 오서독스
권투 전적 241전 229승(65KO) 11패(6KO) 1무
링네임 Will o' the Wisp

1. 개요2. 어린 시절3. 커리어
3.1. 아마추어 경력3.2. 프로 경력
3.2.1. 연승행진3.2.2. 데뷔 이후 첫 패배3.2.3. 펀치 없이 라운드를 가져가다3.2.4. 비행기 추락사고3.2.5. 샌디 새들러와의 악연3.2.6. 은퇴
4. 은퇴 후5. 평가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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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전 권투 선수.

2. 어린 시절

1922년 9월 19일 코네티컷에서 시칠리아 이민자 출신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하트퍼드의 리틀이털리에서 성장했다. 펩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괴롭히던 무리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권투를 배우기 시작했다. 대공황 시대에 실업자가 된 펩의 아버지는 결국에는 공공사업진흥청에서 일자리를 구했지만 여전히 돈이 부족했다. 펩은 16세에 하트퍼드 고등학교를 중퇴한 후, 신문을 팔거나 구두를 닦으며 돈을 벌었다.

3. 커리어

3.1. 아마추어 경력

펩은 대부분의 시간을 코네티컷 주 노리치에 있는 듀웰 애슬레틱 클럽(Du-Well Athletic Club)에서 아마추어로 복싱을 하며 보냈다. 그는 2년 반 동안 65번의 아마추어 경기를 치르면서 59승 3패의 기록을 세웠고, 1938년 코네티컷 아마추어 플라이급 챔피언십, 다음 해에 코네티컷 아마추어 밴텀급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펩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짐 셰아에게 "제가 받은 가장 좋은 조언은 체육관에서 한 아이가 '링에 섰을 때 경찰이 당신을 쫓는다고 상상하세요. 경찰이 당신을 잡게 하지 마세요.'라고 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3.2. 프로 경력

3.2.1. 연승행진

19세에 프로로 전향한 펩은 1940년 7월 3일 코네티컷 주 하트퍼드에서 짐 맥거번과 겨뤄 첫 승을 거두었다. 데뷔 후 3년 동안 무패를 지켰고, 53승 0패의 기록으로 챔피언 앨버트 "찰키" 라이트에게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1942년 11월 20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15라운드 경기에서 라이트를 꺾고 뉴욕주체육위원회(NYSAC) 페더급 타이틀을 차지하며 40년 만에 최연소 페더급 세계 챔피언이 되었다.

1943년 4월 9일 보스턴에서 열린 10라운드 경기에서 살 바르톨로를 판정으로 물리치고 전미권투협회(NBA) 페더급 타이틀까지 획득하며 통합 세계 페더급 챔피언이 되었다.

3.2.2. 데뷔 이후 첫 패배

1943년 3월 19일 뉴욕에서 라이트급 챔피언 새미 앵곳과의 논타이틀전에서 프로 경력 첫 패배를 기록했지만, 이때의 패배 이후 펩은 73연승을 거두었다. 이 무렵 펩은 세계적으로 유명해졌고, 1943년 6월 8일 보스턴에서 살 바르톨로를 상대로 15라운드 경기에서 타이틀을 성공적으로 방어했을 때까지 그 명성은 계속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도중 펩은 1943년 해군에서 복무했으며 1944년 봄에 전역했다. 또한 1945년에 미국 육군에서 복무했다. 복무 기간 동안에도 펩은 무패 행진을 이어갔고, 1944년 9월 29일 뉴욕시에서 15라운드 경기에서 라이트를 다시 한 번 물리치고 타이틀을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이후 1945년 2월 19일 뉴욕시에서 15라운드에서 필 테라노바를 물리치고 1946년 6월 7일 뉴욕시에서 바르톨로를 12라운드 KO로 제압하고 여러 번 더 성공적으로 타이틀을 방어했다.

3.2.3. 펀치 없이 라운드를 가져가다

펩은 링 위에서의 익살스러운 행동으로 권투 팬들을 기쁘게 했다. 1946년 7월 25일 미니애폴리스에서 재키 그레이브스를 상대로 한 전설적인 경기에서 펩은 한 번의 펀치도 날리지 않고 한 라운드를 이길 수 있다고 단언했다. 펩은 빠른 풋워크를 과시하며 라운드 내내 그레이브스를 균형을 잃고 방어적으로 만들었다. 펩은 펀치를 한 번도 날리지 않았지만 실제로 그가 말한 것처럼 한 라운드를 이겼다.

펩은 또한 재치와 밤의 유흥을 선호하는 라이프스타일로 스포츠 칼럼니스트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는 선수 생활 동안 백만 달러 이상을 벌었지만, "빠른 여자와 느린 말(fast women and slow horses.)"에게 모두 잃었다고 농담을 던진 적도 있었다. 총 여섯 번의 결혼을 한 펩은 첫 번째 결혼에서 두 명의 자녀를 두었고 세 번째 결혼에서 아들을 한 명, 다섯 번째 결혼에서 딸을 한 명 두었다.

3.2.4. 비행기 추락사고

1947년 1월 8일, 펩은 플로리다 마이애미의 훈련 캠프에서 코네티컷 하트퍼드에 있는 자택까지 비행기를 타고 마지막 경기 준비를 하던 중 비행기가 뉴저지 밀빌 근처의 숲에 추락하며 산산조각났다. 승객 3명이 사망하였고 18명이 부상을 당했다. 펩은 왼쪽 다리와 등뼈 두 개가 부러졌습니다. 의사들이 펩에게 이제 다 끝났다고 말했을 때 그는 "그래요, 밤에 비행하는 건 이제 끝낼게요."라고 대답했다. 실제로 펩은 5월에 깁스를 제거하자마자 훈련을 재개했다. 사고 후 1947년 6월 17일 하트퍼드에서 빅터 플로레스를 상대로 10라운드 판정승을 거두었고, 1947년 8월 22일 미시간 플린트에서 조크 레슬리를 12라운드 TKO로 제압하였다.

1948년 2월 24일 마이애미에서 움베르토 시에라를 상대로 10라운드 TKO승을 거두며 재차 타이틀을 방어했지만 이는 펩의 마지막 타이틀 방어 성공이었다.

3.2.5. 샌디 새들러와의 악연

펩은 이례적인 방식으로 싸우다가 세계 타이틀을 잃고 만다. 그의 상대는 샌디 새들러였는데, 펩은 새들러와 몇 차례 더 치열한 경기를 치렀다. 이 경기는 1948년 10월 29일 뉴욕시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렸다. 펩이 경기를 영리하게 이끌어 가는 대신 난타전을 벌이기를 택하자, 새들러는 펩을 4라운드 만에 KO시키며 이변을 일으킨다.

그러나 충격도 잠시 1949년 2월 11일 펩은 새들러와의 재경기에서 역대 최고의 권투 경기 중 하나로 여겨지는 시합을 펼친다. 펩은 언더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더 지적으로 경기를 풀어갔다. 펩은 15라운드 판정승을 거두며 타이틀을 되찾았지만, 새들러도 이미 많은 펀치를 적중시킨 후였다. 이 경기에서 펩은 1898년 조지 딕슨 이후 처음으로 타이틀을 되찾은 페더급 복서가 되었다.

펩은 페더급 타이틀을 되찾은 후, 1949년 9월 20일 코네티컷주 워터베리에서 열린 경기에서 에디 콤포를 7라운드 KO로 제압했다. 다음 타이틀 방어전은 1950년 1월 16일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린 찰리 라일리와의 경기였는데, 펩은 5라운드에 또다시 KO로 승리했다. 1950년 3월 17일 뉴욕에서 유럽 챔피언인 레이 파메숑을 상대로 15라운드 판정승을 거두며 페더급 타이틀을 3차까지 방어했다.

펩의 네 번째 타이틀 방어전은 새들러와의 3차전으로, 두 선수의 역사 덕분에 이 경기는 1950년 9월 8일 뉴욕 시의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리게 된다. 새들러는 펩을 구타한 후 TKO로 승리했는데, 이때 펩은 어깨가 탈구되는 부상을 입어 경기를 기권해야만 했다. 이후 펩은 1951년 1월까지 권투를 다시 하지 않았고, 그 후 8번의 논타이틀전에서 승리하였다.

펩은 또 다른 메이저 타이틀전에서 새들러로부터 세계 페더급 타이틀을 되찾으려 했다. 이 이벤트는 1951년 9월 26일 뉴욕시 폴로 그라운드(옛 뉴욕 자이언츠 야구팀의 홈구장)에서 열렸다. 펩은 다시 한 번 영리한 경기를 하지 않고 난투를 벌이다가 졌고, 새들러 역시 통제 불능이었다. 두 번이나 한 선수가 다른 선수를 바닥에 눕혔다. 이 사건 중 하나에서 그들은 심판을 캔버스로 데려갔다. 밀고, 밀치고, 넘어뜨리고, 움켜쥐고, 힐링하는 행위가 경기를 망쳤다. 펩은 눈 아래에 심각한 상처가 생겨서 10라운드에 나올 수 없었기 때문에 9라운드 이후 TKO로 졌다. 이 부상은 새들러의 엄지손가락 때문에 생긴 것으로 알려졌다. 이 경기는 권투 역사상 가장 잔혹한 경기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으며, 두 선수 모두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다. 펩은 17개월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고 1952년 4월까지 권투에 복귀할 수 없었다.

펩은 페더급 타이틀을 놓고 경쟁하지는 않았지만, 계속해서 성공적으로 권투를 했고, 거의 모든 경기에서 이겼다. 그는 1952년에 12번의 경기에서 단 한 번만 졌고, 1953년에는 11명의 상대를 모두 물리쳤다. 1954년에 단 5번만 싸웠고, 2월 26일에 2라운드에서 루루 페레즈에게 TKO로 단 한 번만 졌다. 이 패배 이후, 뉴욕주체육위원회는 그의 나이(31) 때문에 펩의 권투 라이선스를 박탈했다. 하지만 펩은 다른 주에서 커리어를 이어갔고, 1955년과 1957년 사이에 24번의 경기에서 단 한 번을 제외하고 모두 이겼다.

3.2.6. 은퇴

1958년 첫 12번의 싸움에서 11승을 거두었지만, 1958년 9월 20일 세계 타이틀에 대한 마지막 기회를 놓쳤다. 보스턴에서 나이지리아의 권투 선수 호건 "더 키드" 배시와 싸우던 펩은 9라운드 TKO로 패배하긴 했지만, 심판의 점수표에서는 앞서고 있었다. 펩은 1959년 1월 26일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열린 10라운드 경기에서 소니 레온에게 판정패를 당한 다음 날 공식적으로 은퇴했다. 그는 4년 후 The Ring의 권투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였다.

펩은 1965년에 컴백을 했고, 그 해에 9승을 거두었다. 마지막 4승은 TKO, 또는 KO였다. 펩의 마지막 프로 경기는 1966년 3월 16일 버지니아 리치먼드에서 캘빈 우드워드와의 경기였다. 펩은 6라운드에서 졌고, 싸울 만큼 체력이 좋지 않다고 인정했다.

펩이 짧게 복귀한 한 가지 이유는 돈 때문이었다. 그는 선수 생활 동안 많은 돈을 벌었지만, 도박으로 많은 것을 잃고 투자에 실패하는 등 엄청난 돈을 탕진했다.

4. 은퇴 후

은퇴 후, 펩은 권투 선수, 권투 감독관, 권투 심판의 보조원으로 일했다. 심판으로서의 경기 중에는 하라다와 파메숑의 페더급 챔피언십 경기가 있었다. 펩의 다른 스포츠 관련 직업으로는 레슬링 감독관과 스포츠 칼럼니스트가 있다. 그는 또한 나이트클럽을 관리했고, 양조장 고객 서비스 담당자, 레스토랑 안내원, 코네티컷 주 하트퍼드의 형사 법원에서 보안관 대리로 일했다. 1970년대에 펩은 코네티컷 주 운동부 권투 사무실에 취직했고, 1980년대 후반까지 그 직책을 유지했다.

1977년 국립 이탈리아계 미국인 스포츠 명예의 전당(National Italian American Sports Hall of Fame)과 1990년 국제 복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등 여러 영예를 받았으며, 2005년 IBRO 역시 펩을 역대 페더급 1위로 선정하였다.

펩은 생애 마지막 몇 년간 알츠하이머병을 앓았다. 그의 여섯 번째 부인 바바라가 윌리에게 권투가 그의 병의 원인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하지만 여보, 나는 맞은 적이 없어."라고 대답했다.

2006년 11월 23일 코네티컷 주 로키 힐에 있는 웨스트 힐 요양원에서 사망했다.

5. 평가

6. 여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