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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 펩


<colbgcolor=#000><colcolor=#fff> 윌리 펩
Willie Pep
파일:CTBHF_2005_Pep.jpg
본명 굴리엘모 파팔레오
Guglielmo Papaleo
출생 1922년 9월 19일
미국 코네티컷 미들타운
사망 2006년 11월 23일 (향년 84세)
미국 코네티컷 로키 힐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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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복싱선수
신체 신장 165cm, 리치 173cm
체급 페더급
스타일 오소독스[1]
전적 241전 229승(65KO) 11패(6KO) 1무
링네임 Will o' the Wisp

1. 개요2. 생애3. 복싱 경력
3.1. 비행기 추락 사고3.2. 샌디 새들러와의 악연3.3. 커리어 말년
4. 은퇴 후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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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전 권투 선수.

2. 생애

1922년 9월 19일 코네티컷주 미들타운에서 굴리엘모 파팔레오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살바토레 파팔레오는 시칠리아 출신 건설 노동자였다.

윌리 펩은 이탈리아계 미국인 세계 페더급 챔피언 "배틀링" 바탈리노를 근처 하트포드에 있는 그의 훈련장에서 지켜보러 간 후 어린 나이에 권투에 끌렸다.

유년 시절, 펩은 신문을 팔고 구두를 닦으며 가계 수입을 보충하는 데 도움을 주다가 아마추어 복서로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2]

3. 복싱 경력

2년 반 동안 65번의 아마추어 경기를 치르면서 59승 3패의 기록을 세웠고, 1938년 코네티컷 아마추어 플라이급 챔피언십, 다음 해에 코네티컷 아마추어 밴텀급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펩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짐 셰아에게 "내가 받은 가장 좋은 조언은 체육관에서 한 아이가 '링에 섰을 때 경찰이 당신을 쫓는다고 상상하세요. 경찰이 당신을 잡게 하지 마세요.'라고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1940년 7월, 펩은 프로로 전향하여 제임스 맥거번을 상대로 4라운드 판정승을 거두었고, 전 세계 밴텀급 챔피언 조이 아치볼드를 상대로 두 번 승리하는 등 63연승 행진을 시작했다.

1942년 8월, 펩은 랭킹 1위 페더급 컨텐더 페드로 에르난데스를 물리치고 챔피언 챌키 라이트가 차지한 NYSAC 페더급 타이틀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해 11월,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펩은 라이트를 제치고 만장일치 판정승을 거두며 세계 챔피언에 등극했다.

승리한 지 몇 주 만에 펩은 링으로 돌아와 매달 여러 차례 논타이틀전을 치렀고, 오늘날 챔피언이 1년에 한 번만 링에 오르는 것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바쁜 활동 덕분에 방어 기술을 완벽하게 연마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3년 3월, 펩의 무패 행진은 전 라이트급 챔피언 새미 앤곳에게 10라운드 판정패를 당하면서 끝났다. 펩은 재빨리 패배의 아픔을 씻어내고 보스턴에서 살 바르톨로를 상대로 타이틀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며 그 해를 마감했다. 그런 다음 펩은 제2차 세계 대전 도중 군대에 입대하여 해군과 육군에서 잠시 복무했다.

1944년 챌키 라이트, 1945년 필 테라노바를 상대로 타이틀 방어에 성공한 후, 펩은 이 시점에서 NBA 세계 타이틀을 차지한 바르톨로와 다시 한 번 맞붙었다. 1946년 6월 7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바르톨로를 12라운드 KO로 제압하며 페더급 통합 챔피언에 등극했다.

3.1. 비행기 추락 사고

1947년 1월 8일, 플로리다 마이애미의 훈련 캠프에서 코네티컷 하트퍼드에 있는 자택으로 돌아가는 비행기가 뉴저지 밀빌 근처의 숲에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부조종사와 승객 2명이 사망했고 18명이 부상을 당했다. 펩은 왼쪽 다리와 등뼈 두 개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고, 의사들한테서 그만두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래요, 밤에 비행하는 건 그만둘게요."
“Yeah, I’m through flying at night.”
라고 말했고, 실제로 5월에 깁스를 제거하자마자 훈련을 재개했다.

사고 후 1947년 6월 17일 하트퍼드에서 빅터 플로레스를 상대로 10라운드 판정승을 거두었고, 1947년 8월 22일 미시간 플린트에서 조크 레슬리를 12라운드 TKO로 제압하였다.

3.2. 샌디 새들러와의 악연

1948년 2월 움베르토 시에라와의 방어전 이후, 펩은 펀치는 강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샌디 새들러와 맞붙었다. 이때까지 펩의 전적은 135승 1무 1패.

1948년 10월 29일 뉴욕시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펩이 경기를 영리하게 이끌어 가는 대신 난타전을 택하자, 새들러는 펩을 4라운드 만에 KO시키며 이변을 일으켰다.

1949년 2월 11일 펩은 새들러와의 재경기에서 역대 최고의 권투 경기 중 하나로 여겨지는 시합을 펼쳤다.[3] 펩은 언더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더 지적으로 경기를 풀어갔다. 펩은 15라운드 판정승을 거두며 타이틀을 되찾았지만, 새들러도 이미 많은 펀치를 적중시킨 후였다. 이 경기에서 펩은 1898년 조지 딕슨 이후 처음으로 타이틀을 되찾은 페더급 복서가 되었다.

새들러와의 세 번째 경기는 불가피했지만, 그것을 마련하기엔 다소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펩은 에디 콤포, 찰리 라일리, 레이 파메숑을 차례대로 물리치며 3차 방어전까지 성공시켰다.

1950년 9월 8일 뉴욕 시의 양키 스타디움에서 네 번째 타이틀 방어전이자 새들러와의 3차전을 치렀다. 새들러는 펩을 구타한 후 TKO로 승리했는데, 이때 펩은 어깨가 탈구되는 부상을 입어 7라운드 종료 후 경기를 기권하였다.

이후 펩은 회복을 위해서 1951년 1월까지 휴식기를 가졌고, 그 후 8번의 논타이틀전에서 승리하였다. 펩은 몇 달 동안 경기를 치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미디어를 통해 새들러와 모욕을 주고받으며 재경기를 기약했다.

1951년 9월 26일 뉴욕시 폴로 그라운드(옛 뉴욕 자이언츠 야구팀의 홈구장)에서 새들러로부터 세계 페더급 타이틀을 되찾으려 했다. 두 선수는 주심의 지시도 무시한 채 서로에게 달려들어 말 그대로 개싸움을 벌였다. 2라운드 펩의 오른쪽 눈이 새들러의 엄지손가락에 찔려 부상을 입었고 이후 부상이 점점 더 심각한 심해지자, 9라운드 종료 후 경기를 기권하며 TKO로 패배했다. 이 경기는 권투 역사상 가장 잔혹한 경기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으며,[4] 두 선수 모두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다. 펩은 17개월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고 1952년 4월까지 복귀가 불가능했다.

펩은 나중에 새들러는 "내가 거칠고 강인하게 싸운 유일한 선수였다. 그는 내가 이성을 잃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건 내 실수였다. 나는 그런 식으로 싸워서는 안 되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적대적인 과거에도 불구하고 윌리 펩과 샌디 새들러는 친밀한 우정을 발전시켰다.

3.3. 커리어 말년

펩은 페더급 타이틀을 놓고 경쟁하지는 않았지만, 계속해서 성공적으로 권투를 했고, 거의 모든 경기에서 이겼다. 그는 1952년에 12번의 경기에서 단 한 번만 졌고, 1953년에는 11명의 상대를 모두 물리쳤다. 1954년에 단 5번만 싸웠고, 2월 26일에 2라운드에서 루루 페레즈에게 TKO로 단 한 번만 졌다. 이 패배 이후, 뉴욕주체육위원회는 그의 나이(31) 때문에 펩의 복싱 라이선스를 박탈했다. 하지만 펩은 다른 주에서 커리어를 이어갔고, 1955년과 1957년 사이에 24번의 경기에서 단 한 번을 제외하고 모두 승리했다.

1958년 첫 12번의 싸움에서 11승을 거두었지만, 1958년 9월 20일 세계 타이틀에 대한 마지막 기회를 놓쳤다. 보스턴에서 나이지리아의 권투 선수인 호건 "더 키드" 배시를 상대로 좋은 모습을 보이던 중 9라운드 TKO로 역전패를 당했다.

1959년 1월 26일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열린 10라운드 경기에서 소니 레온에게 판정패를 당한 다음 날 공식적으로 은퇴했다. 그는 4년 후 The Ring의 복싱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였다.

1965년에 컴백을 했고, 그 해에 9승을 거두었다. 마지막 4승은 TKO, 또는 KO승이었다. 펩의 마지막 프로 경기는 1966년 3월 16일 버지니아 리치먼드에서 캘빈 우드워드와의 경기였다. 펩은 6라운드에서 졌고, 싸울 만큼 체력이 좋지 않다고 인정했다.

펩이 짧게 복귀한 한 가지 이유는 돈 때문이었다. 그는 선수 생활 동안 많은 돈을 벌었지만, 도박으로 많은 것을 잃고 투자에 실패하는 등 엄청난 돈을 탕진했다.
"권투 선수의 쇠퇴. 먼저 다리 움직임을 잃는다. 그런 다음 반사신경을 잃는다. 그런 다음 친구를 잃는다."
– 윌리 펩

4. 은퇴 후

은퇴 후, 펩은 권투 선수, 권투 감독관, 권투 심판의 보조원으로 일했다. 심판으로서의 경기 중에는 하라다와 파메숑의 페더급 챔피언십 경기가 있었다. 펩의 다른 스포츠 관련 직업으로는 레슬링 감독관과 스포츠 칼럼니스트가 있다. 또한 나이트클럽을 관리했고, 양조장 고객 서비스 담당자, 레스토랑 안내원, 코네티컷 주 하트퍼드의 형사 법원에서 보안관 대리로 일했다. 1970년대에 펩은 코네티컷 주 운동부 권투 사무실에 취직했고, 1980년대 후반까지 그 직책을 유지했다.

1977년 국립 이탈리아계 미국인 스포츠 명예의 전당(National Italian American Sports Hall of Fame)과 1990년 국제 복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등 여러 영예를 받았으며, 2005년 IBRO 역시 펩을 역대 페더급 1위로 선정하였다.

펩은 생애 마지막 몇 년간 알츠하이머병을 앓았고, 그의 여섯 번째 부인 바바라가 남편에게 병의 원인이 복싱 때문이라고 말했을 때
"하지만 여보, 나는 맞은 적이 없어."
“But honey, I never got hit.”
라고 대답했다.

2006년 11월 23일 코네티컷 주 로키 힐에 있는 웨스트 힐 요양원에서 사망했다.

5. 여담

링 위에서의 익살스러운 행동으로 복싱 팬들을 즐겁게 했으며, 또한 재치와 밤의 유흥을 선호하는 라이프스타일로 스포츠 칼럼니스트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선수 생활 동안 백만 달러 이상을 벌었지만, "빠른 여자와 느린 말(fast women and slow horses)"에게 모두 잃었다고 농담을 던진 적도 있었다.

총 여섯 번 결혼했다. 첫 번째 결혼에서 두 명의 자녀를 두었고 세 번째 결혼에서 아들을 한 명, 다섯 번째 결혼에서 딸을 한 명 두었다. 나중에 "내 아내들은 모두 훌륭한 가정부였다"며 "이혼할 때마다 그들은 집을 지켰다"고 말했다.

1946년 7월 25일, 재키 그레이브스와의 경기에서 펀치 한 방 없이 세 번째 라운드를 이겼다는 주장이 있다. 일명 "노-펀치" 라운드. 펩은 경기 전에 몇몇 링사이드 리포터에게 미리 "분노의 펀치(a punch of anger)" 한 방 없이 세 번째 라운드를 이길 것을 알렸다고 전해진다.

1954년 2월 26일 루루 페레즈에게 2라운드 KO패를 당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펩이 경기를 일부러 졌다고 믿는다. 페레즈에 대한 베팅이 급증하면서 그에게 유리한 배당률이 6-5에서 3½-1로 바뀌었고, 일부 북메이커는 이 경기를 포기했다. "The Fix"라는 1980년 Inside Sports 잡지 기사에 따르면 "The Champ"로 알려진 권투 선수가 1954년에 루루 페레즈에게 16,000달러를 걸고 경기를 치렀다고 한다. 펩은 Inside Sports를 소유한 Newsweek Inc.를 상대로 7,500만 달러의 명예 훼손 소송을 제기했지만, 배심원단은 단 15분 동안 심의한 후 펩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렸다.

1938년 코네티컷 주 노리치의 사료 가게 다락방에서 슈거 레이 로빈슨과 맞붙었다. 펩의 후일담에 따르면 로빈슨은 아마추어 복서가 돈을 받지 못하는 뉴욕 주에서 아마추어 챔피언이었기 때문에 코네티컷에서 돈을 받고 경기를 하기 위해 가명을 사용했다고 하며, 이 때문에 펩은 당시 자신이 누구와 싸우는지 몰랐다고 한다.
[1] 오른팔잡이 격투 스타일을 부르는 것이다. 이와 반대인 왼손잡이 격투 스타일은 사우스포로 불린다.[2] 당시 아마추어 우승자에게는 금시계가 선물로 주어졌는데, 나중에 조용히 프로모터에게 돌려주어 몇 달러를 받았다.[3] 1949년 링매거진 올해의 경기로 명명되었다.[4] 링매거진 선정 가장 더티한 경기 6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