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by(월상계택,ruby=月象谿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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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조(李朝)의 예원(藝苑)에서 문장정종(文章正宗)을 말하는 자 반드시 손가락을 꼽아 月(월사 이정귀), 象(상촌 신흠), 谿(계곡 장유), 澤(택당 이식)의 사대가(四大家)를 말한다. 대개 이 4인은 직접 중국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를 접종(接踵)코저 함으로 그 문장이 순정(醇正)하기를 요구하나니 (···) 즉 사대가(四大家)라는 명칭은 어느 때부터 되었는지 모르되 인의(仁義)의 언(言)- 다시 말하면 유가(儒家)의 척도에 탈선되지 않는 문장가 4인이란 말이다.
김태준, 《조선한문학사》
김태준, 《조선한문학사》
당시에 또 상촌(象村), 월사(月沙), 계곡(溪谷), 택당(澤堂)이 있었는데, 세상에서 상월계택(象月溪澤)이라 일컬었다 상촌의 글은 단련하고 깨끗하게 씻어내어 명말청초(明末淸初)의 문기(文氣)가 있었고 월사의 문장은 아로새기고 채색하는 데 힘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문장을 짓는 것이 순조롭고 익숙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다할 뿐이었다. 논하는 이들이 또 말하기를 “계곡은 타고난 재주가 넉넉하고 택당은 인위적인 솜씨가 뛰어나다.”라고 하였으니, 각기 그 잘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김윤식, 《운양속집》
월상계택은 조선 중기의 문장에 뛰어났던 4명의 문장가들이다. 상월계택(象月溪澤), 계택상월(溪澤象月), 한학사대가(漢學四大家), 사대문장가(四大文章家),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 등으로도 불린다. 구성원인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 1564 - 1635), 상촌 신흠(象村 申欽, 1566 - 1628), 계곡 장유(谿谷 張維, 1587 - 1638), 택당 이식(澤堂 李植, 1584 - 1647)의 호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김윤식, 《운양속집》
그러나 정작 조선의 문단에서 '월상계택'이라고 언급되었던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으며 현대에 들어와서야 쓰이게 된 병칭이다. 김태준이 1994년에 발표한 '조선한문학사'에서야 처음 언급되었는데 이들은 물론 대가이지만 과연 최절정인 4명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김태준은 그 근거로 근대의 김윤식에서 찾았던 바 있으며 김윤식만 이 4명을 단독으로 언급하였고 다른 후대의 비평 자료에서는 1,2,3명만 언급된다거나 4명을 포함한 다른 작가도 함께 언급되는 다양성이 존재한다. 결국 김태준이 이 4명을 확정 지은 근거는 김창협의 '농암잡지'이고, 김태준 이후 연구자들이 김태준의 연구를 언급하며 현재의 한문 4대가로 굳어지게 된 셈이다.[1]
2. 구성원
2.1. 월사 이정구
자세한 내용은 이정구(조선) 문서 참고하십시오.2.2. 상촌 신흠
자세한 내용은 신흠 문서 참고하십시오.2.3. 계곡 장유
자세한 내용은 장유(조선) 문서 참고하십시오.2.4. 택당 이식
자세한 내용은 이식(조선) 문서 참고하십시오.3. 평가
조선 중기 한문학의 모범이 된 인물들이다. 이들은 동시대 인물들이며 당송팔대가의 영향을 받았고, 명문가 출신의 주자학 위주로 공부하고 관료로도 출세한 인물들이다. # 곧 전후로 살짝 세대가 다르거나, 조선 후기 정권을 잡은 노론계의 선조가 아니고, 규격에서 벗어난 인물은 아무리 대가라도 이 명단에 포함되지 못했다. 그래서 당대 문단의 변화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인물들인 윤근수(尹根壽, 1537 ~ 1616)[2], 최립(崔岦, 1539 ~ 1612)[3], 이항복(1556 ~ 1618)[4], 유몽인(柳夢寅, 1559 ~ 1623)[5], 허균(1569 ~ 1618)[6]이 빠지게 된 것이다. 김창협의 경우에는 세대가 뒤다.이들 4대가가 대표성을 획득한 것은 김창협 계열의 문인들의 비평과 영향이 지대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문단에서는 앞선 세대인 '월상'에 비해 '계택'에 대한 평가가 일반적으로 더 높았고, '월상'을 빼고 최립과 김창협을 더해 '사군자(四君子)'로 규정된 적도 있으며, 당송 8대가를 본떠 만든 문집에서 '월상'이 빠진 적도 많다. 결국 4대가라는 건 만든 사람 마음인 것이지 여기 포함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들의 수준이 떨어지는 건 아니다.[7]
4. 기타
신흠과 이식은 허균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인물들이다. 신흠은 허난설헌의 남편 김성립의 이종사촌이며, 김성립은 허균의 매형이다. 이식은 허균의 제자인 적이 있었으며, 허균 사후 저서에서 허균이 쓴 홍길동전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었다.[1] 출처: 권진옥, 조선 중기 한문 사대가의 비평사적 존재 양상과 위상 재고, 2022[2] 세대가 빠르다.[3] 세대가 빠르기도 하고 명문가 출신이 아니어서 조정의 주변부만 맴돌았다. 청요직도 역임하지 못했고 학문을 소관하는 관청에 재임한 적도 없다.[4] 후손인 이광좌 등이 소론이 되었다. 유연한 성품으로 문학적으로도 상대적으로 개방적이라고 평가되는 장유가 보기에도 지나치다 싶을 만큼 생경하고 기이한 글을 좋아했다고 한다.[5] 북인으로 인조 반정 이후 역적으로 몰렸다.[6] 재기발랄하며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사는 방식이 당대 사람들과 달랐다. 사회 비판 의식과 격식에 맞지 않는 행동, 불교 및 천주교에 대한 숭상 및 관심 등으로 결국에는 역적으로 몰려 사망.[7] 참고: 김우정, 신흠의 ‘視古修辭’와 이정구의‘隨意抒寫’에 관하여, 2010 / 김우정, 16~17세기 近畿 지역 서인계 문인의 교류와 古文辭,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