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화성시 출신 독립운동가, 우성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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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 | 우성오 (禹聖吾) |
출생 | 1857년 |
경기도 남양군 (現 경기도 화성시) | |
사망 | 1908년 (향년 51세) |
경기도 남양군 (現 경기도 화성시) |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우성오는 1857년생이며 경기도 남양군 출신이다. 그는 1907년 11월 아들 우용안(禹龍安)이 남양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즉각 가담하여 감찰관(監察官)이 되었다. 그는 의진의 군기(軍紀)를 단속하고 서무(庶務) 일체를 관장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1908년 남양군내 일본군 수비대에 의해 피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우성오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2. 임실군 출신 독립운동가, 우성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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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0년 5월 16일 |
전라북도 임실군 오천면 선천리 (現 전북특별자치도 임실군 오천면 선천리) | |
사망 | 1943년 5월 15일 (향년 62세) |
전라북도 임실군 (現 전북특별자치도 임실군) |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우성오는 1880년 5월 16일 전라북도 임실군 오천면 선천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천도교 신자로, 1919년 3월 2일 천도교 전주교구가 임실군 천도교 교구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했다는 소식을 듣고 교구장인 한영태 및 천도교도인 강계대·박판덕(朴判德)·한준석(韓俊錫)·최양옥(崔養玉)[1]·황성진(黃成 )·김영원(金榮遠)·박성근 등과 만나 독립선언서 배포문제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이때 그는 한영태로부터 전해받은 18매의 독립선언서를 임실·오천 두 면의 주요장소에 게시함으로써, 3월 12일 전개된 임실읍 독립만세시위의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이후 경찰에게 체포된 그는 1919년 5월 29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임실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3년 5월 1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우성오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