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8-14 00:04:35

왕화정

<colbgcolor=#F0C420><colcolor=#ffffff> 왕화정
王化貞
출생 1572년
대명 산동성 청주부 저성현
(現 산둥성 웨이팡시 주청시)
사망 1632년 (향년 60세)
대명 북경 순천부
(現 베이징시)
원기(元棋)
소천(小千)

1. 개요2. 생애

1. 개요

명나라의 문관.

2. 생애

청주부 저성현에서 태어났다. 동림당 소속이였으며 과거에 급제했으며 호부에서 일하며 우의까지 승진했다. 광녕에서 몽골인들이 침입해오자 광녕순무로 임명되어 몽골인들을 설득해 물러나게했다. 이후 요동경락 웅정필을 보좌했으나 싸우지 않는 웅정필에 비해 왕화정은 큰 공을 세울 비책[1]을 노리며 서로 조화되지 않았고 불화가 잦았다. 왕화정은 권신 위충현, 병부상서 장학명에게 연줄이 있었다.

이 둘의 불화를 들은 누르하치는 광녕 인근 서평을 공격해 점령하고 손득공에게 3만의 병력을 주고 후금군을 상대했으나 패배하고 손득공은 후금에게 투항했다. 손득공은 거짓으로 광녕으로 돌아와 성 안에 혼란을 일으켰고 갑자기 사무를 보고 있던 왕화정은 놀랐으며 휘하 장수는 그를 말에 태워 성 서쪽으로 보냈다. 이에 후금은 광녕에 무혈입성했다.

웅정필은 돌아온 왕화정에게 차가운 말을 남기고 산해관 수비에 전념하도록했다. 이 일은 조정에까지 들어와 왕화정, 웅정필 모두 체포되었다. 위충현은 두 사람에게 4만냥을 요구했고 왕화정은 돈을 줬으나 웅정필은 돈을 주지않아 모함당하고 처형되었다. 하지만 왕화정 역시 목숨만 부지했지 옥에서 풀려나오진 못했고 1627년 위충현의 사망과 동시에 그가 믿을 수 있는 인물은 사라졌다. 결국 5년 뒤 처형되었고 효수되었다.

[1] 이영방과 내통해 조선 가도에 주둔하고 있던 모문룡과 연락하여 양 쪽에서 후금을 노리는 계책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