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2-24 17:51:40

왕무(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1. 개요2. 작중 행적3. 기타

1. 개요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의 남주인공. 원 역사의 고려 제2대 왕 혜종에게서 모티브를 따왔다.

고려의 왕위계승자 정윤으로, 주인공 임연우의 첫 인상은 질투조차 못할 만큼 시대를 잘못 타고난 미소년. 작중에서 절세미남이라 언급되며 임연우도 웬만한 연예인 이상의 미남이라 감탄했다. 힘이 매우 세다.[1] 항상 왕도를 추구하며[2] 사랑하는 여인에게는 정말 다정한 고려스윗남.

설정상 여주인공인 임연우는 원 역사 혜종의 정실인 의화왕후 임씨에게 빙의된 인물이며, 설정상 임연우가 왕무보다 1살 연상이다.

2. 작중 행적

921년 즈음에 상산 임씨 임연우와 약혼했지만, 나주 오씨가 외가라 다른 대호족들을 외가로 거느리던 이복 동생들보다 입지가 매우 약했다.[3] 믿을 구석이라고는 장남이라는 태생에서 나오는 정통성뿐이라 정통성을 강화할 방법이 없나 싶어 작제건의 수수께끼가 숨겨진 왕실의 비밀통로를 뒤지다 학교폭력을 당해서 비밀통로에 어쩌다가 오게 된(...) 임연우와 마주하게 된다. 임연우는 거타지의 전설을 알고 있어 작제건의 설화의 진상을 빨리 파악할 수 있어 비밀통로 너머에 숨겨진 지하실을 발견할 수 있었고, 저민의의 묘지명과 작제건의 일기장을 통해 증조모 저민의의 정체와 그 내력을 알게 되었다.[4][5]

이때 왕무는 임연우와 첫만남에서 그대로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임연우는 이를 깨닫지 못한다. 왕무는 임연우가 공을 세운 거라고 굳이 밝히려 하지 않았지만, 임연우는 왕무에게 책임을 전가하고자 왕평달에게 왕무가 문을 열었다고 고하고 이로 인해 왕평달을 비롯한 왕씨 가문 사람들과 관계가 가까워지지만 찜찜함을 느낀다. 임연우는 왕무와 파혼하고 싶어하지만 그렇다고 정윤인 왕무의 심기를 거슬렀다가는 그건 그것대로 죽을 게 뻔하니 상산같은 어중간한 가문이 아니라 힘 있는 가문과 혼인하는 쪽이 안전하다고 왕무를 설득하였다.

이후에 왕건의 명을 받아 나주원에 1달에 1주일씩 머물게 되어 찾아온 연우하고 나주원에서 정식으로 인사한다. 그리고 서경까지 같이 다니면서 왕무의 처지를 지켜본 연우는 왕무한테 미안하지만 자신과 가문이라도 살기 위해 파혼을 더더욱 굳게 결심하게 되는데... 처음에는 연우를 '그대'라고 칭하다 결혼 이후에는 '국선'이라 칭하고, 연우가 왕무 자신의 입지를 높이기 위해 사지인 고창성으로 들어가겠다고 자원한 직후에 처음으로 직접 연우의 이름을 부른다.[6]

삼년산성 전투에 아버지를 따라 종군하며, 충주에서 견훤이 후백제 왕자를 보내려는 것에 맞서 격을 맞추기 위해 자신을 부석사에 보내려 고민하는 아버지에게 자신이 스스로 가겠다 자원하며, 이걸 보는 연우는 머리를 짚는다. 그리고 부석사로 향하면서 "대책은 있냐"고 물어보는 연우에게 "고려를 지지하는 희랑을 정윤으로서 외면할수 없다는 책임감만으로 무작정 부석사에 간다"는 답을 해서 연우가 마음속으로 뒷목을 잡게 만든다. 연우는 이렇게 올곧기만 한 왕무를 보고 혼사를 파토내고 더 나아가 정윤파에서 가문을 이탈시킬 생각이 더 굳어지게 된다.

관흔을 견제하기 위해 왕건이 불러들인 왕충을 기다리면서 무차대회가 열릴때 까지 희랑을 구하기 위해 같이 동행한 이들하고 같이 작전을 짜며, 부석사에 도착해서는 희랑을 만나고, 신라 왕의 초상화에 궁예[7]가 새겨놓은 흔적을 보며 고려가 연패를 하여 부석사까지 백제의 영향권에 들어간거를 안타까워한다. 이후 연우가 주도하는 사기극에서 희랑이 기적을 발휘하도록 보이게 하는 연출로 이야기가 진행되자 왕건에게 고해 희랑을 왕사로 삼겠다 말하는 역할을 맡으며, 무차대회가 파토난 이후 희랑이 경위를 물어보려 하는 와중에 분노한 백제인들을 피해 일행과 함께 도망치면서 나중에 개경에서 가르침을 듣겠다는 식으로 자리를 뜨고, 도주 중에 체력이 다해 기절한 연우를 구한다.

이후 연우와 같이 말을 타면서 백제군의 추격에서 도망을 가며, 견훤의 분노로 인한 백제군의 집요한 추적을 뿌리쳐가면서[8] 충주에 있는 왕건의 본대로 귀환하여 왕건에게 치하를 받고, 같이 개경으로 돌아간다.

비밀통로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연우에게 반해있던 걸로 보인다. 같이 출장 다니면서 썸을 탔고 결혼 후에는 연우가 관계를 무서워하자 참고 기다려준다. 문제는 연우가 여우짓을 하면서 여지를 주는데 정작 동침은 거부한다는 것.[9]하지만 6년을 기다린 끝에 연우가 마음의 문을 열자 곧바로 3일내리 같이 침대에서 뒹군다. 몇달동안 뜨거운 밤을 보내다가 연우를 임신시키고는 득남했다.

드디어 왕건 사후에 왕으로 즉위했다! 국정과제로 북벌을 설정해 군량을 모으고 백두산 폭발에 대비하는 등 거란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926년 양력 12월 백두산이 폭발하자 왕건 생전에 준비한 계획대로 북벌에 나서고, 927년 초 염상, 견권으로 하여금 1만 병력으로 강동을 점령하게 하고 다음해 봄 기병 5만 + 보병 1만의 총합 6만 대군을 이끌고 신라도를 따라 북벌에 나섰다.[10] 두만강을 건넌 후 대광현으로 하여금 중경현덕부와 동경 용원부를 해방하게 하고 동모산에서 1만 병력을 이끌고 온 정안국주 열만화, 3천 기병을 모은 대광현과 합류한 뒤 발해의 수도 상경 용천부로 입성했다.

그러나 상경에 주둔하던 병사들을 포함하여 발해령 각지에 있던 거란군이 주둔지를 버리고 요충지인 부여부로 집결하고 있었고, 이에 황보제공, 황보금산, 박수문, 박수경에게 1만 2천의 정예 기병들을 이끌고 부여진을 공격하게 지시하고 연우에게 1만 보병과 나이가 많거나 부상당한 기병 4천을 이끌고 퇴로를 확보하게 지시한 다음, 정예만 추려서 바로 부여진으로 출진했다. 왕무는 내심 거란군을 상대로 승리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하여 여차할 경우 임연우가 삼남 출신으로 주로 구성된 후군과 함께 후퇴하도록 조치하였다.

부여진에서 거란과 일전을 벌이나 기병의 숙련도 부족으로 점차 밀리던 중 연우가 백두산의 부석을 이용하여 강 상류로 우회해 후방을 들이치고 열기구로 고려(高麗)의 글자를 하늘 높이 띄워 신호를 보내자 이를 기회로 삼아 총공격을 가해, 거란 승상을 직접 효수하며 승리한다. 이로 인해 개봉부를 한참 공격하던 야율덕광이 화병으로 죽고,[11] 야율욜욕(요세종)과 야율이호 간에 내전까지 벌어지자 태후 술률평을 인질로 삼고 양쪽의 내전을 부추긴 틈을 타 구발해령을 안정시킨다.

종전 후에는 서경(평양)으로 천도해 아내와 함께 나라를 다스렸다. 나중에는 연우의 전생이 남자, 그것도 흉노 선우였다고 전해 듣고는 "그래서 7년을..."이라며 신혼 때 튕긴 것을 이해했다고 한다. 그렇게 잉꼬 부부로 살다가 재위 40년에 연우보다 3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두 사람의 금슬은 국제적으로도 유명해서 연우가 슬퍼하기만 할 것이라고 여겨서 거란이 침공했지만 임연우가 침착함을 유지하며 제장(諸將)들을 이끌고 압록강으로 오자 거란군이 그냥 회군했다고 한다.

승하한 뒤 원 역사와 달리 '성조'라는 묘호를 받았다.[12] 작중 고려사에서 성조 사후 세종 황제가 즉위하였다는 것을 보아 북벌에 성공한 뒤 칭제건원해서 초대 황제 포지션이 되어 조(祖)의 묘호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3. 기타

취미는 격구로, 연우는 오빠인 임연객이 격구단을 만들자고 할 때는 꼼짝도 안 하다가 왕무가 아내 눈치를 보면서 하고 싶다는 티를 내자 곧바로 지갑을 열었다.

본작에서는 로맨스물이라는 특성 때문인지 연우 외의 부인은 묘사되지 않는다. 원 역사의 혜종은 후광주원부인, 청주원부인, 궁인 연씨도 부인이었다.

왕건이 즉위(918년) 전에 낳은 장남답게 남동생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 912년생으로 923년생인 왕요(정종定宗)보다 11살 연상, 925년생인 왕소(광종)보다 13살 연상이다. 사실 고려사에 기록된 왕건의 부인들은 부인들의 서열 순에 따라 아들들의 순번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고려사에 기록된 왕자들의 순번과 왕자들의 실제 출생 순번에 따른 차이가 다를 가능성이 높다.[13]

원 역사에서는 출신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얼마 못 가 죽었지만, 본작에서는 고려 건국 세력인 고구려계의 최대 열망이었던 북진을 성공시키는 업적을 세워 이 문제를 해결하고 본인의 왕조를 세우는데 성공하였다는 점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성공판과 유사점이 있다.

성격이 착한 거지 멍청하지는 않아서 예리한 모습도 여러 번 보인다.


[1] 원 역사에서도 자객을 주먹 한 방에 제압해서 쓰러뜨렸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의 무골이었다.[2] 임연우의 평에 따르면 원 역사 혜종은 작정하고 호족들에게 대숙청하려고 했으면 공멸할 정도의 힘은 충분히 있었지만, 신생 왕조고 삼국통일한 지 10년도 안 된 상태에서 무리하게 숙청하려다 나라가 통째로 공중분해당할 수 있어 자신의 생존을 포기하고 왕조의 존속을 택해 왕요와 왕소를 비호했다고 한다.[3] 나주 오씨가 객관적으로 힘이 약한 가문은 아니나, 서남해 끄트머리에 있어 고려와 월경지였기 때문에 견훤에게 치이고 있었고, 실제로 견훤에게 망해버린 뒤 왕건이 죽을 때까지 세를 회복하지 못했다.[4] 저민의의 아버지 두은점이 장보고의 부하로 청해진의 비호를 받고자 한 패강진 호족들이 두은점이 데리고 온 청해진군을 데리고 왔다가 951년 청해진이 망한 뒤 신라 조정에게 멸족당했다고 한다. 저민의는 작제건이 개성 왕씨 당주에게만 내려오던 송악산 아래 지하실에 숨겼다가 몇 년 안 가 숨졌고, 작제건은 죽기 직전 원종·애노의 난(889)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사후 신라 조정이 추적할 여력이 남지 않게 되었을 때 누군가가 이곳을 찾아서 저민의를 매장해주기를 원해 수수께끼를 만들었다.[5] 이후 저민의의 유해와 묘지명은 수습되어 어느 절에 봉안되었다.[6] 그 후에는 분위기가 잡힐 때마다 이름을 부른다.[7] 세간에는 폐주라고 지칭된다[8] 이 와중에 죽령을 틀어막고 연우를 생포하는 임무를 맡은 부대를 이끄는 관흔이 공세종말점에 달해 스스로 돌아가게 되고, 이를 알게 된 연우가 같이 타던 말에서 내리자 아쉬운 기색을 보인다.[9] 그래서 TS물이 아니었다면 연우가 욕을 먹었다는 게 중론이며 연우가 여우짓할 때마다 왕무 몸에서 사리 나오겠다는 댓글이 달린다. 실제로 혼인 후 관계 거부는 이혼사유다.[10] 이는 북벌에 실패해도 강동 6주를 장악하면 거란이 침공했을 때 방어하기 용이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강동 6주는 원 역사 여요전쟁의 주요 격전지였다.[11] 원 역사에서도 947년 5월 15일에 죽지만(실제로 임연우가 시기를 노렸다) 본작에서는 화병까지 겹쳐서 더 빨리 죽었다고. 작중 요사 고려전에서는 왕건 말년에 거란 사신들이 왕건의 치매 연기에 속아 넘어가 오보를 한 것에 대한 분노로 오보한 사신들을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12] 成인지 聖인지는 불명이나 정황상 聖이었을 가능성이 높다.[13] 예를 들어 제5후 신성왕후는 사서에 따르면 935년에 왕건과 혼인했기 때문에 신성왕후의 외아들 안종은 사서에서 8남이라 기록된 것과 달리 실제 출생순은 29명의 아들 중 상당히 뒤일 가능성이 더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