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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궈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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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사상4. 여담

1. 개요

[ruby(王, ruby=wáng)][ruby(國, ruby=guó)][ruby(維, ruby=wéi)], 1877~1927

청말 민국초의 인문학자. 저장성 하이닝시 출신이다. 문학 방면에서는 중국 전통과 서구의 문학론을 정립하여 새로운 문학관을 확립하였고, 역사학 방면에서는 고고학적 업적을 중국 고대사와 연결시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2. 생애

20대에 임마누엘 칸트아르투어 쇼펜하우어에 천착하여 그들을 비롯한 서구의 학술저서를 중국어로 번역하는데 힘을 기울이다가, 30대 중반 이후로는 중국 문학 방면으로 연구를 전환하여 중국 시가에 대한 평론집인 『인간사화(人間詞話)』와 희곡을 연구한 『송원희곡고(宋元戱曲考)』 등을 발간한다. 신해혁명 이후로는 역사학 방면으로 연구를 전환하여서 갑골 문자 및 상주시대의 고대 제도 등에 천착, 여러 성과를 올리며 갑골사당(甲骨四堂)[1]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다. 말년에는 청화학교 국학연구소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중국 서북지역 및 , , 등의 역사를 연구하다가, 장제스의 북벌 등과 같은 정치적 혼란에 비관하여 이화원 곤명호에 투신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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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상

「인간사화」에 수록한 '인생삼경계(人生三境界)', 즉 위인들이 살면서 거치는 경지는 중국 제자백가 사상과 서양 철학이론 구조를 융합하여 정립한 대표적인 개념이다. 아래가 바로 그 내용인데, 각 경지의 개념을 설명할 때 사(문학)의 대목을 가져와서 서술한 것으로 유명하다.
첫번째 경지: 목표를 분명히 하고 그 성취를 위해 전략을 세우는 경지.
- 昨夜西風凋碧樹, 獨上高樓, 望盡天涯路.
어젯밤 서풍에 푸른 나무가 시들었네. 홀로 높은 누각에 올라 하늘 끝까지 이어진 길을 바라보네.[2]

두번째 경지: 식음을 전폐하고 잠을 설치면서도 목표에 매진하는 경지.
- 衣带漸寬終不悔, 爲伊消得人憔悴.
몸허리띠 갈수록 헐거워도 후회 않고, 그대 때문이라면 내 기꺼이 여윌테요.[3]

세번째 경지: 노력 끝에 드디어 깨달음을 얻는 경지.
衆裏尋他千百度. 蓦然回首, 那人却在, 燈火爛珊處.
사람들 속 그녀를 백 번 천 번 찾는데, 문득 고개 돌린 곳에, 그녀가 있었다오. 등불 어슴푸레한 곳이었다오.[4]

4. 여담

  • 그 자신도 늘 지적할 정도로 어릴 때부터 매우 병약하였다. 한 번은 일본 유학 중에 각기병에 시달려서 하고자 하던 공부를 마치지 못하고 귀국을 했을 정도였다. 이러한 건강적 요소는 그가 항상 삶에서 우울감에 시달리는 중대한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 선통제의 스승이 된 적이 있다. 이때가 1923년으로 임명된 직위는 남서방행주(南書房行走). 이 직위를 맡은 후로 자금성 내의 서적들이나 제기 및 여러 보물들을 조사, 감정하고 이를 목록화하는 일들을 하였다.
  • 남서방행주를 맡은 것에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중화민국이 들어선 후에도 청에 대한 강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다. 스스로를 이미 존재하지 않는 청나라의 신하라 칭했고 1924년 2차 직봉전쟁 시기 풍옥상의 북경정변으로 인해 자금성에서 퇴거하는 선통제를 시위했으며, 인생의 말년에 선통제의 권유를 받고 청화학교 국학연구원의 교수를 맡기도 했다.
  • 집안 여인들이 단명하는 징크스가 있었다. 친모는 그가 네 살 때, 장녀는 태어난 지 석 달이 좀 못 되었을 때, 첫 아내는 결혼 10년 만에 사망했다. 재혼한 부인이 낳은 장녀도 반 년이 채 못되어 숨을 거두었고, 사녀와 오녀, 장손녀들도 몇 개월에서 세 살 안쪽 나이로 요절하였다. 이랬던 까닭에 왕국유 본인도 장손녀가 죽은 후 자기 집안에 태어나는 여자들이 매번 잘못되는 것이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 학문을 함에 있어 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여섯 가지를 들었다.

    不放言高論

    고담준론 하지 말라.

    不攻擊古人

    옛 사람을 공격하지 말라.

    不議論他人短長

    다른 사람의 장단점을 논하지 말라.

    不吹噓

    허풍떨지 말라.

    不誇淵博

    박학다식하다고 자랑하지 말라.

    不抄襲他人言論

    다른 사람의 논의를 베끼지 말라.
  • 투신하기 전에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五十之年 只欠一死

    인생살이 50년. 다만 죽음 하나가 빠졌네.

    經此世變 義無再辱

    이러한 세상의 변화를 겪어왔지만 도의를 다시 욕보이지는 않으리.


    我死後當草草棺殮,即行槁葬於清華墓地。汝等不能南歸,亦可暫於城內居住。汝兄亦不必奔喪,因道路不通,渠又不曾出門故也。

    書籍可托陳、吳二先生處理。家人自有料理,必不至不能南歸。我雖無財產分文遺汝等,然苟能謹慎勤儉,亦必不至餓死也。

    내가 죽은 후 시신은 대충 염습하여 곧장 청화 묘지에 장사를 치루어라.

    너희들이 남쪽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거든 잠시 이 북경성 안에 살고 있거라.

    네 형들이 내 장사를 치르겠다고 반드시 올 필요는 없다. 도로가 막혀있고 그 애들은 일찍이 집 밖을 나가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남긴 서적들은 진인각(陳寅恪) 선생과 오복(吳宓) 선생 두 분께 맡겨서 처리하도록 하거라.

    집안 사람들은 각자 알아서 자기 일을 처리하되, 반드시 남쪽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

    내가 비록 너희들에게 나눠줄 재산은 없지만, 근신하고 근검한다면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다.


    五月初二日。父字。

    5월 2일, 아비 씀

[1] 청말 민국 시기에 갑골문을 연구하여 많은 성과를 이룩한 네 명의 학자를 이르는 말로, 왕국유와 사돈지간이었던 나진옥(羅振玉, 1866~1940), 왕국유, 곽말약(郭沫若, 1892~1978), 동작빈(董作賓, 1895~1963)이 그들이다.[2] 북송 안수(晏殊)의 접련화(蝶戀花)[3] 북송 유영(柳永)의 접련화(蝶戀花). 번역은 을유문화사 판 송사삼백수 주조모 엮음, 김지현 옮김을 인용.[4] 남송 신기질(辛棄疾)의 청옥안(靑玉案). 역시 을유문화사 판 송사삼백수 인용. 여담으로 검색엔진 바이두(百度)의 이름은 이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