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6월 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 |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914년 5월 9일[2] |
경상북도 대구부 횡정 64번지 (현 대구광역시 중구 서야동) | |
사망 | 1950년 7월 15일 (향년 36세) |
경상북도 대구시 | |
본관 | 파주 염씨[3]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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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2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914년 5월 9일 경상북도 대구부 횡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서야동) 64번지에서 아버지 염봉남(廉鳳南, 1876. 9. 27 ~ ?)과 어머니 창녕 조씨(1890. 8. 3 ~ ?)[4] 사이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5] 이후 달성군 달서면 내당동(현 대구광역시 서구 내당동)으로 이주하였다.대구 계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9년 동맹휴학 건으로 그해 3월 학업을 중단했다. 그러다가 그해 4월 일본으로 유학, 교토 도시샤중학교(同志社中學校) 4학년에 편입하여 학업을 지속했다.
1931년 3월 중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6월 말, 대구 중등학교 비밀결사단체 사회과학연구회 결성에 참여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7월 21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에 대해 혐의없음으로 불기소처분을 받고 출옥하였다. 이때부터 학생운동과 동시에 본격적인 사회주의 운동의 길로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출옥 후 그해 11월, 사회과학연구회 동료 및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 경상북도 조직원들 일부가 만든 적색노동조합 건설 대구 협의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었다. 1932년 12월 2일 대구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출옥하였다.
출옥 후 주요 활동지를 평안남도로 이동해 1933년 숭실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고 그해 10월 평양부에서 조선공산당재건동맹 평양 사동공작위원회에 참여하였다가 1934년 경성부 서대문경찰서에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검거되어[6] 1년여 간 서대문형무소에 미결수로 구금되었다.
1934년 4월 6일 경성부 서대문경찰서에서 촬영된 사진. |
그리고 1935년 3월 9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서의 예심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면소 처분을 받고 풀려났으며, 1936년 5월 관동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어 재차 체포되었으나 훈방으로 풀려났다.
석방된 후에는 평안남도와 대구부를 오가며 조선공산당재건동맹 활동에 집중하다가 1939년경 중국으로 건너갔으며, 허베이성 창저우역 앞에 거주하면서 점원으로 일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조선공산당 대구시당 결성에 참여, 조직부장에 취임하였으며, 또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대구 지방 평의회 결성에도 참여한 후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 9월 박헌영의 사주를 받아 남조선노동자총파업 대구시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철도파업 노동자들을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경상북도지부에 집결시킨 뒤 계획적인 파업지도 및 민심 선동에 나섰다. 같은 달 24일 파업 노동자들을 이끌고 대로로 나아가 '적기가'를 부르며 식량 추가 배급 및 임금 인상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주도했다.[7]
이후 체포되어 구금되었다가 1950년 7월 15일 6.25 전쟁 중에 총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와 더불어 그의 공훈을 기려 202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