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F9B928><colcolor=#000000> 제3대 서퍽 공작 에드먼드 드라 폴 Edmund de la Pole, 3rd Duke of Suffolk | ||
성명 | 에드먼드 드 라 폴 Edmund de la Pole | |
출생 | 1471년 | |
잉글랜드 왕국 서퍽주 | ||
사망 | 1513년 4월 30일 (향년 41~42세) | |
잉글랜드 왕국 런던 탑 | ||
아내 | 마거릿 스크루프 (1496년 결혼) | |
자녀 | 엘리자베스 | |
형제 | 존, 제프리, 에드워드, 엘리자베스, 도로시, 험프리, 앤, 캐서린, 윌리엄, 리처드 | |
아버지 | 제2대 서퍽 공작 존 드 라 폴 | |
어머니 | 요크의 엘리자베스 | |
직위 | 서퍽 공작, 서퍽 백작 |
1. 개요
잉글랜드 왕국 공작, 군인. 튜더 왕조를 타도하고 요크 왕조를 재건해 자기가 왕위에 오르기 위해 해외에서 망명 활동을 하다가 도중에 체포되어 런던 탑에 수감된 후 7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헨리 8세에 의해 처형되었다.2. 생애
제2대 서퍽 공작 존 드 라 폴과 에드워드 4세와 리처드 3세, 클래런스 공작 조지 플랜태저넷의 누이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넷째 아들이다. 그의 형인 링컨 백작 존 드 라 폴은 한때 리처드 3세의 왕위 계승자로 여겨졌지만, 보스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가 전사하고 헨리 7세가 등극하자 일단 복종했다가, 1487년 클래런스 공작 조지 플랜태저넷의 아들인 제17대 워릭 백작 에드워드 플랜태저넷을 사칭한 램버트 심넬을 앞세워 반란을 일으켰다가 스토크 필드 전투에서 전사했다. 링컨 백작 존은 자녀를 남기지 못한 채 죽었고, 둘째 형 제프리는 일찍 죽었으며, 셋째 형 에드워드는 리치먼드 대주교를 맡다가 1485년에 사망했기에, 그가 서퍽 공작 후계자가 되었다.1492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서퍽 공작 작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1493년 백작으로 강등되었다. 1501년, 칼레 인근 기엔의 수비 대장 제임스 티렐과 모의한 뒤 그의 도움을 받아 형제 리처드와 함께 잉글랜드에서 탈출해 플란데런 백국으로 망명했다. 제임스 티렐은 이 일로 1502년 5월 6일에 체포된 뒤 처형당했다. 에드먼드는 플란데런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받지 못했고, 프랑스로 가서 지지를 호소했지만 역시 호응을 얻지 못한 뒤 당시 부르고뉴 공국의 공작인 펠리페 1세의 궁정에서 지냈다. 1504년, 헨리 7세는 그의 작위와 영지를 몰수하고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자라고 선언했다.
1506년 1월, 부르고뉴 공작 펠리페 1세가 플란데런 백국에서 스페인으로 항해하던 중 잉글랜드 해안에서 난파되었다. 이후 헨리 7세의 손아귀에 놓인 펠리페 1세는 요크 왕조의 마지막 지도자 중 한 명인 에드먼드를 잉글랜드에 넘기는 대가로 플란데런으로 돌아갔다. 헨리 7세는 에드먼드를 런던 탑에 가뒀지만, 목숨을 빼앗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 후 에드먼드는 7년간 감옥에 갇혔다. 프랑스 작가 미셸 드 몽텔은 그의 '수필'에서 헨리 7세가 죽기 전에 후계자인 헨리 8세에게 자기가 죽으면 에드먼드를 처형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기록했다. 실제로 헨리 8세는 왕위에 오른 후 1513년 4월 30일 에드먼드를 처형했다.
에드먼드는 리처드 스크루프 경의 딸인 마거릿 스크루프와 1496년에 결혼해 외동딸 엘리자베스를 낳았다. 엘리자베스는 수녀가 되었고, 1515년 런던 올드게이트 외곽의 미노레스 수녀원에서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 에드먼드의 동생이며 역시 해외 망명 생활 중이던 리처드는 형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서퍽 백작을 자칭하고 1525년 2월 24일 파비아 전투에서 전사할 때까지 요크 가문의 왕위 계승자로서 잉글랜드 왕위를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