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10-15 11:23:49

야리카와 공방전

파일:고스트 오브 쓰시마 로고.png
등장인물 갑옷 호부 평가
코모다 해변 전투 · 카네다성 전투 · 야리카와 공방전 · 코야산 성채 전투 · 시무라성 탈환작전
야리카와 공방전
<colbgcolor=#D0D0D0><colcolor=black> 날짜 <colbgcolor=#E8E8E8><colcolor=black> 불명[1]
장소 일본 쓰시마 섬의 야리카와
교전 세력 쓰시마 섬의 농민군 <colbgcolor=#E8E8E8><colcolor=black> 파일:원나라 국기.jpg
지휘관 사카이 진 테무게†
병력 측정불가 측정불가
피해 규모 농민 10~20여명 사망, 농민군 30여명 사망 추정 장수 테무게의 전사
몽골군 전멸
결과 진이 이끄는 농민군의 승리

1. 개요2. 전개3. 결과4.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고스트 오브 쓰시마의 전투.

2. 전개

쓰시마 섬의 하나 남은 사무라이였던 사카이 진은 부랑배들을 모병하고, 몽골군 주둔지를 혼자 잠입하여 박살내는 등 유례없는 활약을 펼치며 쓰시마 섬에 거주하는 주민들에게는 희망을, 몽골군에게는 공포를 선사했다. 이러한 활약이 망령 이야기라는 설화로 전파되어 퍼지기 시작하자 결국 당시 쓰시마에 주둔한 몽골군의 사령관인 코툰 칸은 이를 보다못해 진이 은신한 야리카와를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뒤이어 몽골군 내부에서도 악명이 높았던 장수 테무게와 그가 지휘하는 다수의 몽골군들을 야리카와로 진군시켰다.

당시 기준으로 뛰어났던 몽골군 장수 테무게가 이끄는 몽골군은 궁수와 창병을 앞세워 야리카와를 포위하였다. 테무게는 그때 야리카와 거주민들에게 성문을 열고 항복할 것인지, 지옥을 맛볼 것인지의 선택지를 제시했다고 한다. 이에 위협을 느낀 사카이 진은 야리카와의 우두머리인 야리카와 우지마사에게 협력을 요청하였으나, 야리카와의 난[2] 이후 시무라 가와 철천지 원수 사이가 된 야리카와 우지마사는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진과 그의 동료였던 유나가 "지금은 쓰시마 전체의 위기이니 그런 이념 싸움과 고집을 부릴 때가 아니다"라며 설득했다고 하나, 우지마사는 '야리카와 성이 뚫릴 일은 절대 없으며, 몽골군은 본토가 목적이므로 언젠가는 쓰시마를 떠날 것이다' 라고 하고는 이를 무시했다. 심지어 우지마사는 몽골에 의해 섬 전체가 난장판인 이 때를 이용하여 야리카와가 다시 한번 쓰시마의 지배자로 군림할 생각까지 갖고 있었다고...

그러나 이런 우지마사의 안이하고 그릇된 생각에 반발하여 성 밖에서 몽골과 싸우는 부하들도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인 궁병 다이코쿠가 진에게 몽골에게 잡힌 동료들을 구해주는 것을 도와달라고 부탁하고, 진과 유나, 타카는 무사히 인질들을 구한다. 망령의 싸움에 감탄한 다이코쿠는 테무게와의 공방전 시에 진에게 협력할 것을 약속하고, 우지마사는 자신들이 어떻게든 설득해보겠다고 약속한다.

이후 테무게와 몽골군은 밤에 야리카와성의 정문을 공격하고, 진과 다이코쿠를 포함한 야리카와의 사무라이들과 족경병들, 농민군들은 맞서 싸운다. 진은 몽골군들을 야리카와 성의 백성들의 지원을 받으며 몽골군을 차례차례 쓰러트리고, 성 중앙에 도달하여 테무게와 몽골군을 처치한다. 그리고 진은 테무게와 1:1 전투를 벌여 승리한다. 테무게는 마지막 발악을 하지만...
침략자들이여! 너희 장군을 보아라!
도망쳐라! 그렇지 않으면 똑같은 최후를 맞게 될지니!

야리카와의 백성들이여! 몽골군을 마지막 한 명까지 구축토록 하시오!! 누구도 살려보내지 마라!
야리카와를 위하여!
(야리카와를 위해!)
진은 몽골군의 앞에서 테무게의 머리를 참수하며 그들의 사기를 꺾는다.[3] 망령의 모습에 겁을 먹은 몽골군들은 도망치고, 진과 농민군은 그들을 추격하여 죽인다.

이로써 야리카와 공방전은 끝났다.

3. 결과

전투는 야리카와 연합군의 완벽한 승리로 막을 내렸다. 그리고 망령 전설이 한층 널리 퍼지게 되고, 농민군들과 진의 유대가 깊어지는 결과도 낳았다. 농민들은 '우리도 몽골과 맞서 싸울 수 있다'라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10여년간 시무라 가문과 원수 사이였던 야리카와 가문이 쓰시마의 위기 상황에서 과거의 원념을 떨쳐내고 함께 힘을 합치고, 고립되고 몰락한 골칫거리 사무라이 가문에서 누구보다도 마음 든든한 협력군이 되었다는 결과도 낳음으로써 쓰시마 전체가 하나가 되는데 큰 공헌을 한 전투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몽골군들은 피해가 막심했다. 장수 테무게의 사망, 다수의 몽골군 사망, 야리카와에 발도 붙이지 못하게 되었고, 이는 코툰 칸이 직접 나서고 이후 타카가 사망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나비 효과

4. 관련 문서



[1] 정확한 날짜의 추산이 어렵다.[2] 15년 전 우지마사의 아버지인 야리카와 토키요리가 쓰시마를 차지하기 위해 시무라 가문을 상대로 일으킨 반란. 야리카와 가는 이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여 사무라이 가문으로써 몰락하지만, 살아남은 후예들은 여전히 토지와 다이묘의 지위를 잃지 않고 야리카와의 백성을 이끌고 있었다. 진의 어린 시절 회상을 보면 야리카와의 자객이 사냥 중이던 시무라를 기습하는 등, 시무라 가에 대한 원한은 없어지지 않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3] 이때 처음으로 망령의 자세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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