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15 01:42:41

툴롱 프랑스 함대 자침

안톤 작전에서 넘어옴
파일:안톤작전 자침.jpg
자침해서 좌현으로 기울어진 수상기모함 코망단 테스트(Commandant Teste). 오른쪽에 보이는 함선들은 순서대로 브르타뉴급 전함 3번함 프로방스(Provence)와 당통급 전함 2번함 콩도르세(Condorect)이다.[1]
파일:타르투.jpg
완전히 가라앉은 보클랭급 구축함 4번함 타르투(Tartu). 상단 사진에서 코망단 테스테와 프로방스 사이에 마스트 비슷한 것이 보일 텐데 그게 바로 타르투의 마스트이다.

Scuttling of the French fleet in Toulon

1. 개요2. 배경3. 전개4. 결과

1. 개요

자침 당시 촬영된 영상. 기함 스트라스부르를 필두로 자침한 수많은 함선들이 보인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2년 11월 27일에 나치 독일이 당초의 약속을 어기고 프랑스 해군의 함대를 강탈하려 하자 도망도 불가능한 상황에서 프랑스 해군 장병들이 툴롱 항에 정박해있던 기함스트라스부르 함을 비롯한 프랑스 해군 함대를 자침시킨 사건이다.

2. 배경

1942년에 횃불 작전으로 연합군이 비시 프랑스북아프리카에 상륙하고 이 과정에서 연합군은 비시 프랑스 해군 총사령관 프랑수아 다를랑 해군원수포로로 잡는다. 다를랑 제독은 연합군에 협조하기로 약속하고 프랑스의 가장 강력한 전함리슐리외급 전함을 연합군에게 넘긴다. 이에 툴롱 항 사령관 겸 최고 함대사령관 장 요셉 쥘 노엘 드 라보르드 해군대장해군참모총장인 가브리엘 파울 오팡 해군대장에게 함대를 파견하여 연합군과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반나치 성향인 오팡 제독은 이를 거부한다. 이후 다를랑 제독은 라보르드 제독에게 함대를 연합군에 넘기라고 전보를 보냈고, 라보르드 제독은 "Merde"[2]라는 답변을 보낸다.

한편 나치 독일은 비시 프랑스가 배신할 경우 강제로 합병한다는 아틸라 작전을 세웠는데, 여기에 이탈리아 왕국군도 작전에 참여시킨다는 내용의 안톤 작전으로 바꾸고 프랑스와의 국경지대에 부대를 배치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프랑스 해군 함대를 접수한다는 라일라 작전을 실시하려 한다.

이에 오팡 제독은 11월 11일 라보르드 제독에게 툴롱 항에 외국 군대 진입 금지, 외국 함선 입항 금지, 이것이 불가능할 경우 함대를 자침할 것을 명령한다. 그리고 11월 15일 필리프 페탱 국가 원수, 오팡 제독, 라보르드 제독은 비밀 면담을 가졌고 이 자리에서 오팡 제독은 함대를 연합군에 양도할 것을 권유하나 라보르드 제독은 거부한다.

3. 전개

1942년 11월 19일에 시행된 라일라 작전은 독일 국방군 육군 제7기갑사단에 의해서 진행되었고 이들은 툴롱으로 진입하여 프랑스 해군 조병창, 해안 방어시설 등을 점령하였고 크릭스마리네는 7사단에 노획함 인수요원인 해군 파견대를 동행시키고 프랑스 함대의 탈출을 막기 위하여 기뢰를 부설하였다. 11월 27일 4시에 독일군은 툴롱으로 진입하였고 이는 프랑스 해군 장교들을 놀라게 하였다. 라보르드 제독은 자침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전달하고 군함에 접근하는 비 인가자는 쏴버리라는 지시를 내린다.

4시 50분에는 조병창을 점령한 독일 육군 병력이 프랑스 잠수함들에게 기관총 사격을 가했다. 이에 잠수함들은 자침하기 위하여 더 깊은 곳으로 이동하였고 이런 상황에서 5시 40분에 잠수함 카사비앙카는 홀로 알제리로 도주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 독일군은 조병창에서 예상보다 시간을 많이 지체하여 기지로 진입하는 것이 당초 계획보다 늦은 5시 25분에 진입하게 된다.

독일군이 군항에 진입하자 기함전함 스트라스부르 함은 전 함대에 자침 명령을 내렸다. 자침조를 제외한 승조원들은 탈출하였으며 남은 인원들은 해수 밸브를 열고 폭파시켰다. 일부 독일 육군 병력들이 프랑스 함정에 올라타서 자침을 저지하려고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4. 결과

결국 라일라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프랑스 해군은 그들의 배를 강탈당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전함 3척, 순양함 7척, 구축함 15척을 포함한 77척의 배가 자침하였고 독일은 전력으로 쓰기도 어려운 작은 배만을 건졌다. 카사비앙카 함 등 잠수함 몇 척은 자침하는 대신 북아프리카로 도망쳤다. 이후 일부 순양함들을 건져서 수리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연합군의 공습에 의하여 저지되었다. 인명 피해는 프랑스 해군 장병 12명 전사 및 26명 부상, 독일 육군 장병 1명 부상으로 크지 않았다.

당시 침몰한 함선만 해도 다음과 같다.
함급 함명 함급 함명 함급 함명
덩케르크급 전함 덩케르크, 스트라스부르 브르타뉴급 전함 프로방스 알제리급 중순양함 알제리
쉬프랑급 중순양함 콜베르. 포슈, 뒤플렉스 라 갈리소니에르급 경순양함 라 갈리소니에르, 장 드 비엔, 마르세예즈, 조르주 레그 에이글급 구축함 에이글, 보투르, 게포트
보클랭급 구축함 보클랭, 케르생, 카사드, 타르투 팡타스크급 구축함 린돔타블 게파르급 구축함 게파르, 베르됭, 보방
아르디급 구축함 르 아르디, 라드루아, 비종, 카스크, 르 프드흐와양, 랑스케네트, 맘루크, 시로코 모가도르급 구축함 모가도르, 볼타 자구아르급 구축함 링스, 판테레, 티그레
라드루아급 구축함 보르델레, 르 마르스, 르 팔므 부라스크급 구축함 트롬브 코망단 테스트급 수상기모함 코망단 테스트

그 외 잠수함, 소해함 등 총합 77척

자유 프랑스의 수장 샤를 드 골 장군은 함대가 도망가도록 지시하지 않은 비시 정권을 비난했으며 비시 프랑스는 이 사실을 부인했다. 애초에 기뢰로 봉쇄된 항만을 함정들이 탈출하는 것은 무리였고, 성공한 것들도 그나마 기뢰 밑으로 어떻게든 튈 수 있었던 카사비앙카 등 잠수함 뿐이었다.[3]

라보르드 제독은 툴롱 항 자침에 대해 별다른 문책없이 비시 프랑스 정부에서 해군부 차관으로 복무한다. 하지만 프랑스가 해방된 후 함대를 연합군에 넘기지 않은 죄와 비시 프랑스 정부에 협력한 죄로 사형 선고를 받고 최종적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으나 1954년 특사로 풀려난다.

오팡 제독은 1946년 궐석재판에서 반역 혐의로 기소되어 평생 강제노역형, 재산 몰수, 권리 박탈형에 처해진다. 이후 도피행각 중 1955년에 자수했고 거듭 감형을 받아 집행유예를 받고 5년간 권리박탈형에 처해진다. 프랑스 제4공화정은 오팡 제독만이 아니라 비시 프랑스에 복무한 군인들에 대해 전반적으로 소극적으로 처벌했다.[4]


[1] 이중 콩도르세는 당시 노후화로 인하여 병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2] 이라는 뜻의 프랑스어 단어로, 욕으로써의 의미는 씨발, 좆까 등의 뉘앙스로 쓴다. 사용예로 워털루 전투 마지막에 나폴레옹의 후퇴를 엄호하던 근위대에 대한 항복 권유에 지휘관 피에르 캉브론이 이렇게 외쳤다는 설이 가장 유명하다.[3] 그리고 생각보다 자주 간과되는 사실인데, 도주하려면 기뢰로 봉쇄된 항만을 벗어나야 할뿐만 아니라 독일 공군 및 이탈리아 해공군을 상대해야했다.[4] 좌파 레지스탕스-소련에 대항하기 위해 우파 기조를 내세우던 게 4공화국인데, 비시 프랑스도 반공-친나치=우익 이었기 때문이다. 당장 공산주의 막겠다고 나치 장본인들도 눈가리고 아웅 하며 서독에서 활개치게 두었으니... 물론 이들을 커버쳐주기 위해 숙청해도 되는 만만한 이들이 나치 부역자로 오만가지 린치를 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