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 막부 말기의 주요 사건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colbgcolor=#003400> 1716년 ~ 1735년 | 교호 개혁 |
1787년 ~ 1793년 | 간세이 개혁 | |
1830년 ~ 1843년 | 텐보 개혁 | |
1853년 7월 8일 | 쿠로후네 사건 | |
1854년 3월 31일 | 미일화친조약 체결 | |
1858년 7월 29일 | 미일수호통상조약 체결 | |
1858년 ~ 1859년 | 안세이 대옥 | |
1860년 3월 24일 | 사쿠라다 문 밖의 변 | |
1862년 2월 13일 | 사카시타 문 밖의 변 (坂下門外の變) | |
1862년 5월 21일 | 사쓰마 번 지사 숙청 사건 (薩摩藩志士肅淸事件) | |
1862년 8월 21일 | 나마무기 사건 | |
1863년 8월 15일 ~ 1863년 8월 17일 | 사쓰에이 전쟁 | |
1863년 9월 30일 | 8월 18일의 정변 (八月十八日の政變) | |
1863년 ~ 1864년 | 시모노세키 전쟁 | |
1864년 7월 8일 | 이케다야 사건 | |
1864년 8월 20일 | 금문의 변 | |
1864년 8월 24일 ~ 1865년 1월 24일 | 제1차 조슈 정벌 | |
1866년 3월 7일 | 삿초 동맹 | |
1866년 7월 18일 ~ 1866년 10월 8일 | 제2차 조슈 정벌 | |
1867년 11월 9일 | 대정봉환 | |
1868년 1월 3일 | 왕정복고의 대호령 | |
1868년 1월 27일 ~ 1869년 6월 27일 | 보신전쟁 | }}}}}}}}} |
安政の大獄
1. 개요
1858년부터 1859년까지 에도 막부의 다이로(大老) 이이 나오스케가 반대파 100여 명을 숙청한 사건. 당시 일본의 연호가 안세이였기 때문에 안세이(安政)의 대옥사라고 부른다.2. 배경
1853년 쿠로후네 사건 이후 에도 막부는 개화파와 양이파로 갈라져 끝없는 전쟁을 반복하고 있었다. 해가 갈수록 정쟁은 점점 심해졌는데, 하필이면 쇼군 이에사다는 병약해서 정치 전반을 로주(老中) 아베 마사히로(阿部正弘)에게 맡겨 놓은 상태였고, 3명의 정실부인과 1명의 첩실로부터도 후사를 얻지 못하는 등 도쿠가와 가문 내외의 혼맥상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이 시기의 에도 막부는 개화론과 공무합체론 등의 정치현안을 두고 두개의 파벌로 쪼개어진 상태였는데, 첫번째는 로주 아베 마사히로와 미토번주 나리아키(徳川斉昭)를 중심으로 존황양이와 공무합체[1]를 내세우는 히토츠바시 파벌이었고, 이에 맞서는 두번째 당파로 마츠다이라 노리야스(松平乗全)[2], 마츠다이라 타다카타(松平忠固)[3] 등 개화론/개국론을 내세우는 세력이었다. 1853년 페리 내항 당시 우라가 항의 수비를 맡고 있던 히코네 번주 이이 나오스케는 본디 쇄국주의자였는데, 로주 마사히로가 외교자문을 구하자 개국론을 주장하면서 양이주의자였던 나리아키와 갈등하게 된다.[4]
1857년 로주 아베 마사히로가 급사하고 이듬해 1858년 4월 23일, 오오쿠의 혼쥬인(本寿院: 쇼군 이에사다의 친모), 홋타 마사요시(堀田正睦)[5], 마츠다이라 타다카타(松平忠固) 등 개화파의 정치공작에 힘입어 나오스케가 다이로(大老)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다이로에 오른 그에게는 두 가지의 정치 현안이 있었는데, 첫번째는 병약했던 쇼군 이에사다의 후계자를 정하는 문제였고, 두번째로 미국과 맺은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비준하는 문제였다.
3. 전개
가장 시급했던 후계자 문제를 두고 히토츠바시파에서는 미토번주 나리아키의 아들[6] 히토츠바시 요시노부를 후계자로 밀었고[7], 오오쿠의 아츠히메(이에사다의 세번째 정실부인)[8]가 가세했다. 반대로 나오스케의 파벌[9]에서는 고산케 키슈(紀州)번주 이에모치를 밀었고, 오오쿠에서는 이에사다의 친어머니 오미츠노카타(お美津の方)/혼쥬인(本寿院)이 가세했다.1858년 6월 25일, 다이로 나오스케는 이에모치를 차기 쇼군으로 선언했고,[10] 히토츠바시 파벌에서 이 결정에 반발해 에도성에 올라가 항의했다.
1858년 7월 5일, 쇼군 이에사다가 죽기 하루 전, 다이로 나오스케는 쇼군 이에사다의 칙령을 빌어 도쿠가와 요시카츠(徳川慶勝)[11], 마츠다이라 요시나가(松平慶永)[12], 도쿠가와 나리아키(徳川斉昭), 히토츠바시 요시노부(一橋慶喜)의 은거와 근신을 명령하고, 추가적으로 도쿠가와 요시아츠(徳川慶篤)[13]의 등성 금지와 근신을 명했다. 나오스케가 멋대로 후계자를 정했다는 소식이 서쪽 끝 사츠마 땅에 전달되자 히토츠바시파의 좌장이었던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무력으로 불만을 표시하기 위해 가고시마에서 거병했지만, 7월 8일 병마(콜레라)로 갑자기 쓰러져 그대로 사망하고[14] 시마즈 문중의 내부정치는 다시 혼란에 빠진다.[15]
1858년 7월 29일, 이미 개국파들의 압력[16]과 자잘한 정치적 문제들[17]로 인해 골치를 썩고 있었던 다이로 나오스케는 기세를 몰아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카나가와에서 체결한다. 당연히 이번에도 히토츠바시파에서는 반발했지만 나오스케는 홋타 마사요시와 마쓰다이라 타다가타의 책임으로 돌려 그들을 해임시키는 선에서 정리하고, 그들의 후임으로 오타 스케모토(太田資始)[18], 마나베 아키카츠(間部詮勝)[19], 마츠다이라 노리야스[20]를 임명하면서 히토츠바시파와의 화해를 거부한다. 이에 히토츠바시파 측에서도 막부 다이로의 개화일변도의 정책을 고메이 덴노에게 일러바쳤다.
1858년 (음력) 8월 8일 (양력 9월 14일), 고메이 덴노는 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제대로 격노하여 미토 번을 포함한 몇몇 양이파 다이묘들에게 <무오밀지>(戊午の密勅)라고 불리는 양이(攘夷) 칙명을 내렸다. 이것은 큰 문제가 되었는데, 내용 자체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당시 덴노가 막부를 통한 정식절차를 거치지 않고 다이묘에게 직접 칙명을 내리는 경우는 막부 체제를 흔드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 밀지가 나오스케에게 발각되었는데, 이이 나오스케는 즉각 대대적인 조사를 시작했고, 밀지의 배후에 미토번과 히토츠바시가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대대적인 반대파벌 숙청 작업에 들어갔다.
4. 결과
이 사건으로 히토츠바시파의 다이묘들과 요시다 쇼인 같은 유신지사를 포함한 100여명이 숙청되었고, 이 숙청의 잔혹함을 비난하던 사람들에 의해 이이 나오스케는 조상인 이이 나오마사와 같은 이이의 붉은 귀신(井伊の赤鬼)[21]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안세이 5년의 대옥사 때 피를 본 다이묘들의 리스트[22]만 일부분 정리해도 한뭉큼이 나온다:- 히토츠바시 요시노부(고산쿄 히토츠바시 가문) : 은퇴 및 근신
- 도쿠가와 나리아키(고산케 미토 번) : 은퇴 및 근신[23]
- 도쿠가와 요시아츠(고산케 미토 번) : 은퇴 및 근신[24]
- 도쿠가와 요시카츠(고산케 오와리 번) : 은퇴 및 근신[25]
- 시마즈 나리아키라(사츠마 번) : 체포 전 사망[26]
- 다테 무네나리(우와지마 번) : 은퇴 및 근신
- 야마우치 요도(토사 번) : 은퇴 및 근신
- 마츠다이라 슌가쿠(후쿠이 번) : 은퇴 및 근신
- 마츠다이라 타다카타(우에다 번) : 은퇴 및 근신
또한 이때 짤린 다이묘들이 은거에 들어가면서 일본 전국에서 숱한 번사들이 낭인으로 전락했는데, 특히 히토츠바시파의 중심이었던 미토 번에서는 번사들의 불만이 폭발해, 결국 이이 나오스케도 사쿠라다 문 밖에서 암살됐다. 나오스케 암살 이후 연호는 1860년에 안세이(安政)에서 만엔(万延)으로 바뀌었다.
5. 여담
은혼의 칸세이 대옥사는 이것을 모티브로 삼은 것으로, 양이전쟁 도중에 일어난 사건으로 묘사된다.[1] 로주 아베 마사히로는 웅번 다이묘들의 중앙정치 참여에 관심이 많았다. 덕분에 토자마 출신의 시마즈 가문에서도 아츠히메를 입궁시키고 중앙정치에 운을 띄우는 등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난벽 다이묘로 이름이 높았던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굳이 양이를 내세우는 히토츠바시파와 동맹을 맺은 것도 이 때문이었는데, 그들의 우정/동맹 관계는 나리아키라가 시마즈 가문의 가독을 상속할 때부터(오유라 소동) 밀접했던 것으로 보여진다.[2] 미카와 니시오번 4대 당주. 에도 막부에서 로주를 맡았다.[3] 시나노 우에다번 6대 당주. 에도 막부에서 로주를 맡았다.[4] 자세한 사항은 이이 나오스케 문서 참조.[5] 나리아키가 노리야스와 타다카타를 로주에서 해임하자, 이에 대한 응수로 나오스케 파벌에서 로주수좌(老中首座)로 내세운 인물. 나오스케의 친구이자 개화파였다고 한다.[6] 미토번주 도쿠가와 가문에서 고산쿄 히토츠바시 가문의 양자로 들어갔다.[7] 여기에서 히토츠바시파의 이름이 유래했다.[8] 히토츠바시파에서 좌장을 맡았던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양녀였다.[9] 키슈의 별칭에서 따와 난키파(南紀派)라고도 부른다고 한다.[10] 쇼군 이에사다의 뜻이, 혈연적으로 가까운 이에모치에게 기울어져 있다는 핑계를 댔다고 한다.[11] 고산케 필두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의 14대 당주. 히토츠바시파가 에도성에 등성해 항의할 때 같이 손잡고 등성했다.[12] 후쿠이 번주이자 히토츠바시 파벌의 핵심 인사. 호가 본명보다 유명해서 NHK 대하드라마 등에서는 흔히 에치젠노카미 슌가쿠(越前守 春嶽)로 불리기도 한다. 에치젠은 후쿠이현의 옛 이름.[13] 미토 번주 도쿠가와 가문의 10대 당주. 나리아키의 아들이자 요시노부의 형이다.[14] 이 당시 사츠마번의 시마즈 가문의 인사들은 콜레라로 인해 많은 인물들이 사망했다. 하지만 1858년에 이르면 사츠마의 콜레라 유행이 어느정도 사그라들었다는 점, 나리아키라의 부검 결과에 대해 콜레라가 맞다 아니다로 왈가왈부가 많았다는 점 때문에 암살의혹이 있었다고 한다.[15] 오유라 소동 때 히토츠바시파의 외교질로 이복형 나리아키라에게 가독을 빼앗겼던 히사미츠(久光)가 사츠마 국주에 오른다. 안세이 대옥으로 (자신의 즉위를 훼방놓았던) 히토츠바시 계열의 다이묘들이 줄줄이 몰락하자 히사미츠는 사츠마번과 히토츠바시파의 관계에 선을 긋고, (나리아키라 파벌의 행동대장이었던) 타카모리를 아마미 군도 오오시마 섬으로 유배 보냈다.[16] 여기에는 미국 영사였던 타운젠트 해리스(Townsend Harris, 1804-1878)가 언제까지 미룰거냐고 겁박한 것을 포함한다.[17] 천황의 허락을 받으려고 했으나 양이 성향이 강했던 고메이 덴노는 도장 찍기를 거부하고 있었다.[18] 토도우미 카케가와번 5대 당주. 과거 로주 시절, 미토번의 나리아키와는 작은 트러블이 있었다.[19] 에치젠 사바에번 7대 당주.[20] 나리아키와 싸우다가 짤린 그 로주가 맞다.[21] 당연히 좋은 의미는 아니다. 조상 나오마사처럼 사람을 마구 때려잡는 오니(鬼)라고 비꼬는 의미. 나오마사도 센고쿠 시대 당시에 '성은 이이(いい: 좋다)인데 전혀 좋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평가가 있었는데, 그에 빗댄 말이다.[22] 하시모토 사나이, 요시다 쇼인 같은 유신지사나, 막부 바깥의 조정대신, 에도성 공무원 등은 모두 생략.[23] 이미 코우카 원년(1844년) 철포제사 사건으로 사고를 쳐서 아들 요시아츠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미토번주를 은퇴한 상태였지만, 사실상의 상왕질을 하고 있었는데, 안세이 대옥 때 영구 칩거를 명받으며 완전히 정계를 은퇴한다.[24] 前미토 번주 나리아키의 아들이자, 쇼군 후보 요시노부의 형. 요시아츠의 처분은 9월에 해제되긴 한다.[25] 다이로 나오스케의 권력이 고산케 필두 오와리 도쿠가와 당주의 목마저 꺾어버렸음을 알 수 있다.[26] 암살 음모론을 따를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