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4-10 17:48:01

실리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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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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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준 쾨프뤼 (미마르 시난 다리)

1. 개요2. 역사
2.1. 동로마 제국의 주요 도시2.2. 중세 이후
3. 볼거리

1. 개요

Silivri

튀르키예 서북부의 도시. 이스탄불에서 서쪽으로 40km, 초를루에서 동남쪽으로 30km 떨어진 해안에 위치한다. 인구는 약 22만명이고, 이스탄불 도에 속하긴 하나 시가지가 이어져 있지는 않아 독립적인 생활권을 지닌다. 고대~중세 시기 셀림브리아 (Selymbria)로 불리며 동로마 제국 시기 황제들의 여름 휴양지로써 활용되었다. 현대에도 이스탄불 시민들의 여름 휴양 도시로써 성수기에는 인구가 5배까지 증가한다. 시내에는 옛 성벽과 오스만 시기 주택 등의 볼거리가 있다. 시가지 서쪽 외곽에는 미마르 시난이 세운 333m에 달하는 다리가 있다. 서쪽 7km 지점에는 튀르키예 최대의 감옥 중 하나인 실리브리 (마르마라) 감옥이 있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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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 절벽 위에 세워진 동로마 시기의 성채 유적

상고대 시기부터 트라키아인 마을이 있었고, 기원전 7세기 무렵 메가라 그리스 인들이 50m 높이의 해안 언덕에 식민도시를 세워 셀렘브리아 (Σηλυ(μ)βρία)라 명명했다. 스트라본에 따르면 지명은 창건자 셀레우스에 트라이카어 접미사가 붙은 결과라고 한다. 트라키아 평원에서 비잔티온으로 향하는 육상 교통로 상에 있고 안전한 항구를 지닌 덕에 도시는 빠르게 발전했고, 기워전 5세기의 명의 헤로디쿠스의 고향이었다. 기원전 351년 셀렘브리아는 비잔티온 등과 전쟁을 벌이던 아테네와 동맹했다. 마케도니아 왕국 시기에도 도시는 자치를 누렸으나, 기원전 2세기 들어 비잔티온이 성장하며 그에 종속되었다.

로마 제국 시기에는 작은 마을이었고, 서기 400년경 아르카디우스의 황후 아엘리아 에우도키아의 이름을 따서 에우도키오폴리스 (Εὐδοξιόπολις)로 개칭되기도 했다. 6세기 초엽 아나스타시우스 1세콘스탄티노플 방어를 위해 아나스타시우스 성벽을 둘렀을 때에 셀렘브리아는 그 남쪽 끝의 거점으로써 요새화되었다. 6세기 중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지진으로 파괴된 아나스타시우스 성벽 및 셀렘브리아 성채를 수리하며 한동안 도시에 머물렀고, 8세기 중반 콘스탄티노스 5세도 성벽을 보수했다. 하지만 813년, 제1차 불가리아 제국크룸이 도시를 함락하며 성벽을 파괴했다. 9세기 중반 미하일 3세가 성벽을 재건했으나 915년 불가리아의 차르 시메온 대제가 도시를 완전히 파괴할 때에 허물어졌다.

2.1. 동로마 제국의 주요 도시

사라센, 루스 해적에 시달리던 셀렘브리아는 1204년 제국의 붕괴 후 라틴 제국제2차 불가리아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1247년 니케아 제국에게 점령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의 거점으로써 활약했다. 1282년에는 미하일 8세의 유해가 시내의 한 성당에 안장되었다. 1346년, 동로마 내전 중에 요안니스 6세오스만 베이국오르한에게 딸 테오도라를 결혼시켜 동맹을 맺었다. 부부는 셀렘브리아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그 무렵 도시의 성벽이 재차 세워졌다.

1376년 정변을 일으켜 부친 요안니스 5세를 폐위하고 즉위한 안드로니코스 4세는 3년 후 동생 마누일 2세에게 폐위되며 명예 황제 직을 받아 셀렘브리아로 은퇴했다. 1385년 안드로니코스 4세가 사망하자 셀렘브리아 영지를 계승한 아들 요안니스 7세 역시 1390년에 정변을 일으켜 즉위했으나 5개월 만에 축출되었다. 이후 바예지트 1세의 중재로 셀렘브리아로 돌아온 요안니스 7세는 1392년 제위 요구를 포기하며 마누일 2세와 화해했고, 1399년 그가 유럽으로 떠나며 섭정으로 세울 정도로 사이가 좋아졌다.

같은해 바예지트 1세는 셀렘브리아를 점령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으나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패하며 물러났고, 요안니스 7세는 이듬해 셀렘브리아와 테살로니키 등의 영토를 수복한 후 후자의 황제가 되었다. 1411년 2월, 오스만 공위기의 루멜리아 군주 무사 첼레비가 도시를 포위했으나 격퇴되었다. 같은해 9월에는 베네치아 공화국이 무사와 매년 1600 두카트의 연공을 대가로 알바니아, 파트라스, 레판토 지배권을 인정받는 셀렘브리아 조약이 체결되었다.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던 순간까지 인근 에피바토스와 함께 버티던 셀렘브리아는 1453년 5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된 후에야 메흐메트 2세에게 항복했다.

2.2. 중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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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0년에 세워진 피리 메흐메트 파샤 모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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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2년에 미마르 시난이 세운 우준 쾨프뤼. 33개의 아치 중 하나는 퇴적물에 덮혀 32개만 드러나 있다.

오스만 시기에 지명은 실리브리로 바뀌었지만, 도시는 여전히 지배층의 여름 휴양지로 이어졌다. 1509년 대지진 당시 성벽이 완전히 붕괴한 후 일부만 재건되었다. 한편 피리 메흐메드 파샤는 대재상 (사드라잠)에 오르기 전에 실리브리에서 판관 (카디)로 부임하며 주민들의 존경을 받았고, 1523년 은퇴한 후 실리브리에서 9년간 여생을 보냈다. 그는 1530년에 지금도 실리브리의 대사원 (울루 자미)로 쓰이는 피리 메흐메트 파샤 모스크를 세웠다. 1562년에는 마지막 원정을 떠나던 쉴레이만 1세가 건축가 미마르 시난에게 실리브리 서쪽의 하천에 33개의 아치를 지닌 다리를 세우게 했다.

본래 도시에는 다수의 유대인 주민이 있었으나, 상당수가 20세기 초엽 쿠바의 카마궤이로 이주했다. 오스만 제국의 쇠퇴와 함께 1878년 2월 러시아 제국군이 도시를 점령했다가 휴전 후 철수했다. 1차 발칸 전쟁 중인 1912년 3월에는 불가리아 군대가 점령하여 1913년 5월에야 철수했다. 전란 중에 많은 튀르크 유대인들이 미국의 뉴욕시애틀 등지로 이주했고, 일부는 팔레스타인 / 프랑스 / 남미 등으로 향했다. 1차 대전세브르 조약에 따라 1920년 7월, 실리브리는 그리스 왕국령이 되었다. 다만 터키 독립 전쟁에서 패배한 그리스 군이 철수하자 1922년 10월에 이탈리아 군이 진주했다가, 이듬달 터키군이 수복했다.

3. 볼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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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마르 시난이 세운 우준 쾨프뤼. 2006년까지 차량이 통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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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리 메흐메트 파샤 모스크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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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미마르 시난이 세운 시내의 작은 다리. 우준 쾨프뤼와 600m 거리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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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누니 술탄 술레이만 다리. 동쪽 25km 방면, 이스탄불 방면 뷔윅체메제 석호의 입구에 636m의 길이로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