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윤집(允執) |
본관 | 영월 신씨[1] |
출생 | 1890년 9월 10일 |
전라도 부안현 동도면 선은동 (現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선은리) | |
사망 | 1925년 9월 20일[2] (향년 35세) |
전라북도 정읍군 (現 정읍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288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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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시인 신석정은 그의 5촌 당질(堂姪)이다.
2. 생애
1890년 9월 10일 전라도 부안현 동도면 선은동(現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선은리)에서 아버지 신승렬(辛升烈, 1870 ~ 1895. 7. 12)과 어머니 행주 은씨(幸州 殷氏, 1865 ~ 1918. 5. 5)[3] 사이에서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부안군 부령면(現 부안군 부안읍) 동중리로 이주했다.일찍이 동지 이상규(李祥奎)와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의를 다지고, 먼저 지방 자산가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받아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군자금으로서 송금하는 한편, 지방 청년들의 독립사상을 고취하기로 계획했다. 이에 1920년 11월 중순 경기도 인천부(現 인천광역시)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애국금(愛國金) 모집원으로 있던 고려민(高麗民)[4]을 방문해 위와 같은 평소 생각을 말하고 고려민의 동의를 얻었다.
11월 27일 고려민과 함께 전라북도 김제군 김제면 읍내로 와서 이튿날인 11월 28일 고려민, 이상규와 함께 김제면 읍내에 거주하던 조기담(趙紀淡)을 방문해 앞서 언급한 평소 생각을 말했는데, 조기담 또한 이에 찬동하고 자신과 예전부터 친했던 김제군 지역의 유지인 유천(揄泉) 조재돈(趙在敦, 1881. 2. 13 ~ 1942. 12. 12)[5], 나갑순(羅甲淳)을 소개해주기로 했다. 이때 고려민은 조기담에게 조기담을 전라북도 군자금 모집원에 임명한다고 적혀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총장 명의의 사령서를 주었다.
11월 29일 조기담이 조재돈과 나갑순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책인 고려민이 면회를 요청한다는 말을 전했고, 당일 김제군 김제면 옥산리(現 김제시 옥산동) 나갑순의 집에서 면회하도록 했다. 이때 고려민은 조재돈과 나갑순에게 자신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애국금 모집원으로서, 군자금 모집을 위해 왔으니 조선인의 의무로서 본분에 맞게 돈을 납부할 것을 요구했다. 조재돈과 나갑순이 이에 응하지 않자, 고려민은 으름장을 놓으며 위해를 가할 것을 암시하면서 조재돈에게는 1921년 3월 9일(음력 1월 30일)까지 돈 200원을 납부하겠다는 서약서를, 나갑순에게는 1921년 3월 9일까지 돈 50원을 납부하겠다는 서약서 각각 1통을 제출하도록 했다. 또한 조기담은 조재돈의 신분이면 즉시 200~300원을 제공할 수 있으니 돈을 납부하고, 그 자리에서 돈 10원을 납부하도록 요구했다. 이후 조재돈은 조기담과 함께 김제면 요촌리(現 김제시 요촌동)에 사는 자신의 9촌 삼종숙(三從叔)인 소강(小岡) 조순섭(趙順燮, 1880. 12. 19 ~ 1948. 1. 5)[6]의 집에 갔다가 소강 조순섭의 큰조카인 춘강(春岡) 조재식(趙在軾, 1898. 10. 1 ~ 1957. 5. 13)[7]을 우연히 만났고, 그에게서 돈 10원을 빌려 조기담에게 주어 상황을 가까스로 모면했다.
그러나 이후 조재돈과 나갑순의 신고로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고, 1921년 3월 28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이른 바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공갈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공소했으나 5월 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공소가 취하되어 결국 전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옥고의 여독으로 1925년 9월 20일 전라북도 정읍군(現 정읍시)에서 별세했다. 향년 35세.
198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당초 부안군 계화면 창북리 염창산(廉昌山) 선영에 안장되었다가 2006년 9월 7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1] 부원군파(府院君派) 30세 기(基) 항렬. 족보명은 신기중(辛基中).[2] 영산·영월신씨대동보 8권 42쪽에는 9월 29일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돼 있다.[3] 고부군과 전라감영 아전 출신으로 김제군수(金堤郡守)에까지 오른 은송열(殷松說 또는 殷松悅, 1841. 3. 1 ~ ?)의 딸이다.[4] 본명 이의(李儀).[5] 조기담의 장인인 김제 조씨(金堤 趙氏) 조상순(趙相淳, 1861. 7. 18 ~ 1925. 3. 7)의 8촌 삼종손(三從孫)이다. 1935년 조선총독부에서 일제 식민통치에 협력하거나 공헌한 조선 각 지방의 공로자를 선정해 정리한 《조선공로자명감》에도 수록되었다. 초명은 조판남(趙判男), 자는 경안(景安). 대한협회 김제지회 회원, 김제공립보통학교 학무위원, 김제읍회 의원, 김제군농회 특별의원, 김제금융조합 감사, 김제향교 직원, 전라북도평의회 평의원, 주식회사 김만자동차(金萬自動車) 감사 등을 역임했다.[6] 조기담의 장인인 조상순에게는 7촌 재종질(再從姪)이 된다. 자는 윤완(綸玩).[7] 조재돈에게는 12촌 지간의 족제(族弟)가 되며, 조기담의 장인인 조상순에게는 10촌 지간의 족손(族孫)이 된다. 초명 조재은(趙在殷). 1948년 김제농업중학교설립기성회 회장에 선출되었고, 자신의 논밭을 학교 설립에 기금으로 희사해 김제농업중학교 설립에 큰 기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