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신영철(申永澈, 申永徹) |
본관 | 평산 신씨[1] |
출생 | 1880년 11월 6일 |
평안도 숙천도호부 우상방 미남리[2] (현 평안남도 숙천군 장흥리)[3] | |
사망 | 미상 |
상훈 | 대통령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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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1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2. 생애
신영일은 1880년 11월 6일 평안도 숙천도호부 우상방 미남리(현 평안남도 숙천군 장흥리)에서 태어났다.그는 1905년 하와이로 건너가 1년간 노동자로 일하다가, 이듬해인 1906년 미국 본토로 건너갔다. 1907년 4월 미주 공립협회(共立協會) 샌프란시스코지방회(桑港地方會)에 신입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같은 해 12월 유타 주 솔트레이크 시티로 이주하였으며, 1908년 11월 9일 솔트레이크 시티 지방회를 설립하고 서기로 활동하다가 1909년 1월 지방회 회장에 선임되었다. 그해 10월에는 아세아실업주식회사 발기인이 되어 취지서를 발표하였다. 이 회사는 공립협회가 블라디보스토크 등 연해주 지역에 독립군 기지 개척을 위한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설립한 것이었다. 1910년 그는 대한인국민회 솔트레이크 시티 지방회 학무원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12월 '신영철'이라는 동명이인이 있어 '신영철'에서 '신영일'로 개명하였다. 이 즈음 캘리포니아 주 새크라멘토로 이주하여 같은 달 27일 새크라멘토에서 흥사단에 입단하고 제124단우가 되었으며, 1924년와 1925년, 2년 연속으로 새크라멘토 지방회 학무원에 선임되었다. 이후 새크라멘토 지방회에서 1927년 실업부원, 1928년 학무원, 1929년 법무원을 역임한 뒤, 1931년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후 양식당 사업 부진으로 폐업한 뒤에는 활동을 한동안 중단했다.
이후 1941년 공립협회 새크라멘토 지방회에 집행위원 겸 선전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41년 및 1942년 3.1절 기념식에서 각기 「독립운동사」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 밖에도 1907년부터 1942년까지 수십 차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한 행적이 확인된다.
그러나 1942년 이후의 행적 및 그의 최후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201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