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원자력 사고 4~7등급 목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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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2011) |
스리마일 섬 원자력 발전소 사고 Three Mile Island accident | |
원자력 사고 요약도 | |
<colbgcolor=#f5f5f5,#2d2f34> 사고 레벨 | 5등급 - 시설 외부의 위험을 수반한 사고 |
사고 일자 | 1979년 3월 28일 01시 24분경(UTC+3) 사고 D[dday(1979-03-28)]일 |
사고 유형 | 원자력 발전소 멜트다운 사고 |
사고 지점 | 미국 펜실베이니아 헤리스버그 스리마일 섬 원자력 발전소 |
누출 방사능 | |
피폭자 | 확인된 바 없음[1] |
사망자 | 0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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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Three Mile[2] Island accident[3]1979년 3월 28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미들타운에서 일어난 멜트다운 사고. 국제 원자력 사고 척도에 따르면 시설외까지 위험을 수반한 사고(레벨 5)로, 윈드스케일 화재와 같은 등급이다.
당시 스리마일 섬에는 총 2개의 원자로가 건설되어 있었고 원자로의 유형은 가압수형 원자로였다. 가압수형 원자로는 압력을 가한 물을 원자로 냉각재 및 중성자 감속재로 사용하기 때문에 이 물이 끊임없이 순환되도록 유지하여 끓지 않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 사고는 가장 중요한 급수 시스템에서 문제가 생겼던 것이 원인이다.
2. 사고 발생과 처리
사고를 발생시킨 최초 원인은 뚜렷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아마도 자정 무렵 발전소 1호기 핵연료를 재장전하려고 차단 조치를 취했는데, 여기서부터 상황이 꼬이기 시작했다고 추정한다. 이 조치로 발전소는 2호기만 가동 중이었고 가동 내내 큰 문제가 없었는데, 새벽 4시 무렵 주 급수 펌프가 고장나는 사고가 발생했다. 가압수형 원자로는 물 공급이 중요하기 때문에 주 급수 시스템이 뻗으면 보조장치가 바로 작동하여 위험한 사태를 피하도록 설계되었는데, 최초 보조급수 계통 밸브가 닫혀 있었다.정상시 보조급수 계통이 개방된 채로 가동되어야 하지만, 당시 운전원은 개방되었는지 닫혔는지를 몰랐다. 데 MCR 내부 보조급수기 개폐 여부를 표시하는 표시등이 표지판 같은 Tag에 가려져 운전원이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열려야 할 보조급수계통 밸브 중 몇 개는 닫혀 있었다. 열리지 말아야 할 가압기 압력 방출 밸브가 개방된 상태는 아니었지만 미세한 누출이 있었는데, 통제실 콘솔 표시등에는 수치가 정상수치 범위 내로 표시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ECCS(비상 노심 냉각 시스템)가 가동되어 원자로를 식히고 중이었는데, 이를 정상이라고 판단한 운전원은 ECCS를 꺼 버렸다.
당시 원자로 내 냉각수는 실제로는 줄어들고 있었지만, 계측기에는 냉각수 수위가 올라간다고 표시되었다. 가압기 압력방출밸브에서 미세한 누설이 발생하자, 정상상태에서는 고압이어야 하는 원자로 내 압력이 조금씩 빠지고 있었다. 압력이 떨어진 액체 상태의 물은 기체 상태로 변하므로 냉각수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즉, 액체와 기체 혼합물, 쉽게 말해 거품이 위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중이었는데, 당시에 설치된 노심 수위 계측기는 거품과 물을 구분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압력이 떨어지는데도 수위는 올라간다고 계측되었고[4] 냉각수의 수위가 상승하는 상황에서는 비상 냉각수를 공급하면 안 되므로 운전원 입장에서는 당연히 ECCS를 끌 수밖에 없었다. 운전원 매뉴얼에서는 가압기 내의 냉각수 수위는 절반을 유지하도록 지정되었고, 운전원들 또한 해당 수위가 가득차게 운전하지 않도록 교육받았다.
운전원이 냉각수 수위를 절반으로 유지하도록 한 이유는 이러하다. 가압수형 경수로에서 냉각수 가압장치는 냉각계통 전체를 통틀어서 유일하게 압축성 유체[5]가 든 구역이므로, 여기가 완전히 물로 가득 차 공기가 사라진다면 냉각수 밸브 폐쇄 등으로 발생하는 갑작스러운 압력상승[6]을 받아낼 방법이 없기에, 압력이 직접 원자로 압력용기를 가격하여 압력용기가 파열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작업자들은 노심용융의 위험성을 간과했는데, 이미 제어봉이 끝까지 내려와서 핵반응은 멈춘 상태였기 때문이다. 당시 작업자들은 오랫동안 해군용 가압수형 원자로 운전 훈련을 받아 왔고, 함정용 원자로는 크기가 작아 핵반응 중지 후 잔류방사능이 높지 않았기 때문에 잔류방사능의 열로 노심융해가 될 가능성이 없었다. 그러나 발전용 대형 가압수형 원자로는 잔류방사능의 열만으로도 노심용융이 충분히 가능했는데, 이 점을 당시 작업자들은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래서 해군용 원자로를 운전할 때처럼 냉각수 수위에만 온 신경을 곤두세웠고 수위가 상승하자 ECCS를 꺼야만 한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결국 최후의 보루인 ECCS마저 꺼지자 증기압력이 증가하여 파이프가 파손되고 원자로의 냉각수가 유출되었다. 게다가 원자로 온도가 치솟아 원자로 노심이 녹기 시작하면서(노심용융) 방사능 수치가 급상승하였다. 관계자들이 원인 파악을 못 하고 우왕좌왕하는 사이 원자로 방호장비가 녹아 최악의 상황 직전까지 갔으나, 16시간 만에 간신히 사고의 원인을 파악할 수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교대하는 운전원이 가압기 압력방출 밸브의 미세누설을 발견하고 보조 급수 펌프를 자동기동으로 변경하면서 최악의 사태는 모면할 수 있었다. 결국 수동으로 조작하여 밸브를 닫고 냉각 펌프를 작동시킨 후에야 간신히 사태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원인 파악이 늦어지는 바람에 노심의 절반 이상이 녹았지만 원자로가 파괴되거나 붕괴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아 인명피해도 없었고 다행히 발전소만 날아갔다.[7] 더불어 당시 1호기는 고장이 없었는데 2호기에서 사고가 나는 바람에 나란히 가동중지 조치가 내려졌으며 2호기는 1980년대 말까지 정화작업을 해야만 했다.
3. 후폭풍과 영향
발전소에서 사고가 발생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직후 주 정부에서는 인근 지역에 대피령을 내렸고 주민들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여 미친듯이 탈출하였다. 다행히 누출된 방사능 수준이 자연 방사선량에 못 미쳐 민간인들의 피폭 피해는 없었지만 미국에서 원자력 발전에 대한 불신감이 팽배하여 반원전 운동이 발생하였고 이에 석유 파동으로 국면전환을 꾀하던 지미 카터 대통령은 더 이상의 원자력 발전소 건설은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여 70여 개에 달하던 원자력 발전소 건설 계획이 싸그리 휴지통으로 직행했다. 하지만 그러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카터는 재선에 실패했다.이후 원자력 발전소 건설은 정치권의 금기처럼 치부되다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30년~40년 만에 원자력 발전소 건설 재개를 선언하였는데 하필 일본에서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일어나면서 반대가 격심해졌다. 일단 오바마 대통령은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었다. 2012년 2월 조지아 주 보그틀(Vogtle) 원자력 발전소에 원자로 2기 증설이 최종 승인되었다. 건설될 원자로는 웨스팅하우스[8] AP1000이며 기존의 원자로 1, 2호기는 2040년까지 2009년도에 수명연장되었다.
사고가 발생한 발전소는 2010년 1월에 1호기가 재운전을 시작했으며 같은 달에 2호기의 발전기는 해체되어 노스캐롤라이나 주에 있는 시런 해리스(Shearon Harris) 원자력 발전소로 옮겨 설치되었다.
이후 원자로 겉에 붕소-10을 가득 넣은 냉각수를 채우는 형태의 극히 안전한 원자로 설계가 나왔으나 도입비가 너무 비싸서 아무도 안 쓰려고 했다. 대신 이 설계 개념은 현재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대한민국의 원전 같은 가압수로 원자로들이 이 개념에 착안해 비상시에 중성자독(붕산)을 투입하는 경우는 있지만 평시에 이러면 안 된다. 스리마일 사고나 후쿠시마 사고 모두 핵반응은 중지상태였다. 문제는 정지 후 한동안 붕괴열이 발생하는데 규모가 큰 노심은 붕괴열만으로 위험해서 냉각을 신경써야 한다는 점이다. 더불어 이 사건을 악화시킨 수위 계측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압수형 원자로에는 냉각수의 실제 수위를 표시하는 계측장비 설치가 의무화됐다. 또한 MCR룸을 인체공학적으로 설계하여 운전수가 MCR의 계측 표시기를 모두 확인할 수 있도록 설계를 변경하였다.
마침 이 사고로부터 몇 주 전에 나왔던 영화 《차이나 신드롬》이 이 사고로 인해서 대박을 터뜨렸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가 냉전 시대였던 만큼 당연히 소련에서는 "양키들은 원자력 발전소 발로 돌리냐"고 비웃었다. 정확히는 국제적으로 이를 자본주의의 실패라 표현하며 자국의 원자력 체제의 우위를 주장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원자력 산업의 이미지 실추를 막기 위해 이를 검열하는 식이었다.[9] 그러나 몇 년 후 역대 최악의 원자력 사고를 치는 바람에 역관광당해 버로우타게 된다. 애초에 소련은 그 이전에도 이 사고보다 더 높은 등급의 키시팀 사고를 일으킨 적이 있었던 만큼, 진짜로 원자로를 발로 돌리던 건 그들 자신이었던 셈이다.[10] 어쨌든 이 사고로 인해서 미국을 비롯한 서방에서는 운전원 교육을 철저하게 시키는 등의 발전이 있었다.[11]
이 사고로 인한 인명 피해나 환경 오염은 거의 없다. 따라서 다른 산업에서의 사고에 비하면 그 건강 및 환경 영향은 아주 미미하였지만 경제사회적인 영향은 컸으며 특히 원자력 산업계에 미친 영향은 막대했다. 이 사고는 미국 유권자들의 뇌리에 원자력 발전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을 각인시켰으며 1988년부터 2000년대 초반에 신규 원전 건설이 중단되었다.[12] 이후 미국은 수십년간 화력발전에 크게 의존했고 세계 제1의 탄소 배출 국가로 자리잡았는데 이는 21세기 지구 온난화에도 크게 기여했다. 어찌 보면 전 세계에 엄청난 후폭풍을 가져온 사고인 셈이다.
USS 포레스탈 화재 사건처럼 사소한 우연이 겹쳐서 엄청난 사고가 일어나 버린 사례다. #
스리마일 원자력 발전소는 한국의 주력 원자로인 가압경수로를 사용한 곳으로 한국의 원자력 사고 대비를 위해 사건 분석이 필수적이다. 원전 반대측에서는 안전을 중시한다는 가압경수로 역시 멜트다운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는 데 주목하지만 반대로 원전계에선 심각한 사고가 났음에도 인명피해 및 환경피해 없이 수습 가능했다는 점을 들어 가압경수로의 안전성을 강조한다.
4. 현재
2024년 마이크로소프트의 전력 요구를 충당하기 위해 개명 후 재가동할 예정이다.[13]5. 미디어에서
넷플릭스에서 이 사고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2022년 5월 4일에 공개했다. #대체역사소설 나, 스탈린이 되었다?! 에서는 OTL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급으로 터졌다는 언급이 있다[14].
[1] 사고 이후 통계학적으로 인근 지역 암환자 발생율이 유의미하게 증가한 것이 확인되긴 했지만 인과관계에 대한 반발하는 의견이 존재한다[2] 이 섬 크기가 3마일이라 스리마일이다.[3] 줄여서 TMI 사고라고 부르기도 한다.[4] 이런 상황은 훗날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에서도 비슷하게 벌어졌다.[5] 여기서 말하는 압축성 유체는 공기이며 물은 압력을 가해도 부피가 거의 변하지 않는 비압축성 유체이다.[6] 이를 수격작용(Water Hammer)이라고 한다. 물이 나오는 수도관에서 꼭지를 갑자기 닫거나 보일러 온수밸브가 갑자기 닫힐 때 파이프에서 '텅' 하는 소리와 진동이 나는 원인이다. 수격작용은 종종 배관 파열사고를 일으킨다.[7] 이는 스리마일 원전 자체의 고유안전성 덕분이 컸다. 여기서 더 갔으면 주변지역까지 상당히 피폭되었을 것이다.[8] 도시바에 인수됨.[9] 미국도 그 때까지 최대의 원자력 사고였던 키시팀 사고를 어느 정도 파악했음에도 원자력 산업이 위축되는 걸 막기 위해 반쯤 모른 척한 전적이 있다.[10] 도리어 스리마일 섬 사고는 운전원들의 숙달 문제와는 별개로 상술한 것처럼 원전의 고유 안전성 덕분에 사고 규모가 그 정도로 그친 셈이었다. 후에 원전 결함은 물론 발전소 구조나 운영이나 총체적 난국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 비할 바는 아니었던 것.[11] 소련도 물리학자들이 이 사고로 원전의 사고 가능성을 분석하며 원자력 안전 규제 지침을 수정하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원자로를 새로운 규제 지침에 맞춰 수정하려는 움직임은 없었다.[12] 그 덕분에 한국에서 미국의 원자력 기술을 도입, 발전시켜서 원전 시장의 강자가 된 것은 덤이다.[13] #[14] 여기에서의 미국은 소련이 먼저 핵을 개발하고 그리고리 쿨리크의 조기 숙청, 유연한 현장지휘 허용 등으로 인해 2차대전이 조기 종전되어 맨헤튼 프로젝트가 미완성된 데다 메카시즘 광풍으로 인해 원자력 관련 인재들(아인슈타인 등)이 소련으로 이민을 간 데다 미국이 소련의 과학 발전을 지나치게 의식해 무리하게 원전을 지었다가 체르노빌 급으로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