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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성밍

파일:쉬동님.jpg
<colbgcolor=#DC202E> 웨이취안 드래곤스 No.85
쉬성밍
徐生明
<colcolor=#FFFFFF> 출생 1958년 9월 11일
가오슝시 미노구
국적
[[대만|]][[틀:국기|]][[틀:국기|]]
사망 2013년 8월 24일 (향년 54세)
학력 중국문화대학
중앙대학교 대학원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소속팀 웨이취안 실업야구단 (1979~1984)
한국화장품 (1984~1988)
지도자 웨이취안 드래곤스 투수코치 (1990)
웨이취안 드래곤스 감독 (1991~1993, 1996~1999)
가오핑 레이공 감독 (2000~2002)
띠이진강 감독 (2003)
대만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2003~2004)
중신 웨일스 감독 (2004~2005)
싱농 볼스 감독 (2008~2010)
EDA 라이노스 감독 (2013)

1. 개요2. 선수 시절3. 은퇴 이후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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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만 가오슝 출신의 야구 선수이자 감독이다.

2. 선수 시절

훗날 웨이취안 드래곤스를 운영하게 되는 웨이취안에서 후원하는 중국문화대학에서 야구선수로 활약하였으며, 졸업 후에도 웨이취안 실업야구단에서 활약한다.
전성기를 보낸 한국화장품 시절
이후 웨이취안과 자매결연을 맺고 있던 한국화장품 야구단을 통해 한국 진출을 시도한다. 1984~1988년에 실업야구 한국화장품 야구단의 에이스이자 대한민국과 대만 야구 최초의 너클볼러로 통했던 투수다. 1985년 국제 야구 교류전에서의 서생명의 투구모습[1] 1984년 LA올림픽에 대만 대표로 출전하였고, 당해년도 한국 실업리그 최우수투수로 선정되었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선보였다. 한 때 한국 프로야구 진출도 노렸지만 이 때는 외국인 규정이 없어서 단념했다.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 중앙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기도 했다. 이는 대만 야구선수로서는 대만 국내외를 막론하고 첫 번째 석사학위 취득자였다고 한다. 일부 한국선수들이 CPBL에 진출할 때 가교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김덕칠 선수의 경우 본인의 팀에서 기용해서 타이완시리즈 최초의 한국인 승리투수가 되기도 했다.

어찌됐던 대한민국 야구 역사상 최초의 대만 출신 외국인 선수라고 볼 수 있다. KBO에 진출한 대만 출신 선수는 왕웨이중이 최초다. 하지만 앞으로도 CPBL에 소속된 대만인 선수가 한국에 올 가능성은 매우 낮다. KBO와 CPBL은 양 측 협정에 따라 선수 영입 시 신분조회 절차를 거치며 CPBL의 FA 보상 규정을 따르게 된다. 이 보상 규정 때문에 CPBL 소속 선수의 영입 비용이 상당히 높아 대만 출신 선수를 보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왕웨이중미국에서 활동하다가 NC 다이노스에 영입된 케이스라 영입 비용 문제에서 자유로웠다.

3. 은퇴 이후

현역 시절 말기인 1988년 서울 올림픽에 팀 통역 및 코치로 참가하면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다. 이후 대표팀 코치를 역임하다 현역 시절 소속팀이었던 웨이취안 실업야구단이 프로로 전향하면서 1990년 웨이취안 드래곤스의 투수코치를 역임하였고 코치로 CPBL 첫 우승을 경험한다.[2] 다음 시즌 1991년 만32세에 감독으로 승격되었다. 전년도 우승팀을 맡아 2년 간 준우승[3]을 하였고 3년 차에는 반등에 실패하여 3위가 되면서 감독직을 내려놓는다. 감독을 그만둔 후 바로 스바오 이글스에 코치로 이적했다가, 1996년 다시 감독으로 웨이취안에 복귀한다. 웨이취안 2기에는 1997년부터 1999년까지 웨이취안의 3연속 우승을 이끌어낸다. 이 때가 지도자로서 가장 화려했던 시기로 3년 연속 최우수감독상을 수상한다.

99시즌 후 팀이 해체되었고 2000년 고향팀인 TML 가오핑의 감독으로 취임한다. 그러나 웨이취안 시절과 달리 두 번의 TML 챔피언시리즈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는데 그친다. 2003년 이 팀의 선수들이 합류한 CPBL 띠이진강의 초대감독이 되었으나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해 7승 24패의 시점에서 해임된다.

이번에도 해임 직후 바로 중신 웨일스의 투수 코치로 부임했다. 그리고 2004년 중신 웨일스의 감독으로 선임되어 두 시즌 감독직을 역임한다. 그러나 띠이진강이나 중신 웨일스 모두 워낙 약체라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한편 2003년 성적 부진으로 해임된 후 중신 투수코치를 하던 당시 대표팀 감독을 맡아 한국에게 5-4로 승리하며, 아시아 2위로 2004 아테네 올림픽 본선에 진출하였고 올림픽 본선 감독까지 역임하였다.

2008년 싱농 불스의 감독이 해임되자 시즌 후반기부터 팀을 지휘하였고 2010시즌 전기리그 우승 및 종합승률 1위를 차지했으나, 타이완시리즈에서 완패하면서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2013년 다시 고향팀인 EDA 라이노스[4] 감독으로 돌아와 전기리그 우승을 이끌어냈는데, 당시 매니 라미레즈를 기용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다 후기리그 진행 중 갑자기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는데 불과 50대 중반이었다. 시신은 화장되어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우승경력은 초창기 3회에 불과하지만 감독으로서도 평가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던지라 여러팀에서 감독을 지낼 수 있었다. 비록 이른 나이에 사망했으나 현재까지도 최연소 감독으로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이른 시기부터 감독 생활을 시작해 통산 승수가 많다. 그가 감독으로 오른 나이가 만32세이니 이 기록은 깨지기 어려울 듯 하다. CPBL 610승과 TML 105승으로 총 715승을 기록하였으며, CPBL 모든 감독 중 통산 2위에 해당하는 승수다. 통산 승률은 .507이다.

그렇게 쉬성밍의 사후 6년이 지나 2019년 웨이취안이 다시 재창단되었고, 2021년 그를 기려 그의 감독 시절 등번호 85번을 영구결번했다.

4. 기타

  • 1993년 감독직을 맡고 있는 상태에서 선수로 로스터에 등록된 바 있다. 하지만 실제 경기에서 등판한 바는 없다. 그 당시 만 35세였고 현역 시절 대표적인 투수였으니 실제 출전했다면 꽤 화제가 되었을 것이다.
  • 1990년대 후반 대만 프로야구는 폭력조직이 연루된 대형 승부조작 스캔들로 몸살을 앓고 있었는데, 1999년 승부조작 가담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백주대낮에 자택에서 괴한에게 습격을 당한 적이 있었다.


[1] 한국화장품의 상대팀인 光華팀은 국가대표 상비군에 해당하며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유니폼도 당시 대만 대표팀과 동일한 디자인이다. 경기가 펼쳐진 곳은 현재는 실업팀 경기가 가끔씩 열리는 가오슝리더야구장으로 80년대 초반 한국야구팀들도 이 곳에서 전지훈련을 했었다.[2] 본래 웨이취안의 감독이 있었으나 갑작스러운 병으로 인해 쉬성밍을 감독으로 선임하려는 분위기도 있었는데 너무 젊은 나이로 감독 데뷔가 한 해 미뤄졌다. 웨이취안의 첫 시즌은 현업에서 은퇴한 고등학교 감독 출신 야구인을 모셔오다시피해서 첫 해 우승을 달성한다.[3] 92년은 퉁이 통합우승으로 타이완시리즈 무산[4] 이전에 감독으로 있던 싱농불스를 인수해 가오슝으로 연고이전을 하였다. 이전에 가오슝에 있던 띠이진강의 후신 라뉴베어스는 타오위안으로 연고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