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bgcolor=#ddd,#000><colcolor=#000,#ddd> 술탄 알 아트라쉬 سلطان الأطر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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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891년 3월 5일 |
| 오스만 제국 알쿠라야 | |
| 사망 | 1982년 3월 26일 (향년 91세) |
| 시리아 알쿠라야 | |
| 국적 | |
1. 개요
시리아 및 레바논 위임통치령시기 가장 큰 반란인 대시리아 반란을 이끈 지도자.2. 생애
2.1. 초기 생애
술탄 알 아트라쉬는 1888년 시리아 수와이다의 알쿠라야에서 드루즈 명문 가문에 태어나 1982년 사망했다. 아버지 두칸은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우다 1911년 처형되었고, 그는 형제들 중 장남으로 성장했다. 젊은 시절 두 번 결혼해 많은 자녀를 두었으며, 오스만 군대에서 복무해 ‘파샤’ 칭호를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후 그는 프랑스·영국의 점령에 맞서기 위해 아랍 민족운동과 연결되었고, 혁명군을 지원하며 시리아에서 가장 먼저 아랍 반란의 깃발을 올린 인물로 알려졌다. 1918년 다마스쿠스 입성에도 앞장섰고, 프랑스가 그에게 자발 드루즈국 통치를 제안했으나 단호히 거부하고 아랍 통일을 지지했다. 1920년 미슬론 전투 지원을 시도했으나 패전 소식을 듣고 돌아왔고, 이후 프랑스의 분할 통치와 자발 드루즈국 수립에 계속 반대했다. 1922년 프랑스가 혁명가 아드함 칸자르를 체포·처형하자 무장 저항을 조직했고, 그 보복으로 집이 파괴되자 유격전을 벌였으나 영국의 압박으로 요르단에서 프랑스에 일시 항복했다. 이후 프랑스가 약속을 어기고 가르비에 대위를 총독으로 임명해 가혹한 탄압과 굴욕적 조치를 이어가자 드루즈 사회 전체가 폭발했고, 1925년 대표단이 항의했지만 프랑스 고등판무관 사하일이 모욕적으로 거부하면서 봉기가 촉발되었다. 술탄 알 아트라쉬는 시위를 조직하고 다마스쿠스의 국민주의 지도자 압드 알라흐만 샤반다르와 협력해 전국적인 무장 항쟁을 준비했으며, 북부의 이브라힘 하나누와도 연계해 프랑스군의 전력을 분산시키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시리아 전역이 혁명 분위기에 들어섰고, 이는 결국 1925년 대시리아 반란으로 이어져 프랑스 식민지 통치에 대한 가장 큰 저항 운동이 되었다.2.2. 대시리아 반란
샤반다르는 다마스쿠스에서 유력자 무함마드 알 아이야쉬와 협력해 동부 지역으로 혁명을 확산시켰고, 아이야쉬는 데이르에조르에서 프랑스군을 공격하는 혁명조직을 구성했다. 혁명가들이 프랑스 장교들을 사살하자 프랑스군은 마을들을 무차별 폭격해 민가·농작물·가축이 파괴되고 민간인이 대량 희생되었다. 이후 프랑스는 하알라크 가문을 추방하고 여러 혁명가에게 사형을 선고해 처형했으며, 프랑스 당국은 보복으로 가문의 수장을 암살하기도 했다. 샤반다르는 함마에서 프랑스군의 충견으로 알려졌던 장교 파우지 알 카우크지와도 연결해 봉기를 조직했으며, 카우크지는 도시의 학자 및 지도층 탄압과 분할통치 정책에 분노해 1925년 10월에 함마 봉기를 일으켰다. 그는 도시 점령 직전까지 갔으나 프랑스의 공습으로 철수해 유목부족과 연합해 광범위한 타격을 이어갔고, 이후 국립혁명위원회는 그를 구타 지역 혁명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프랑스 고등판무관 사하일이 드루즈 지도자들을 협상 명목으로 속여 데이르 에조르·하스카 등지로 유배하자, 술탄 알 아트라쉬는 1925년 7월 21일 프랑스 식민지배에 대한 전면 항쟁을 담은 선언문을 방송해 전국적 봉기를 촉구했다.그는 즉시 군사작전을 벌여 프랑스 위원부를 불태우고 여러 지휘관을 상대하며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알카프르 전투에서는 적보다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프랑스군 대부분을 섬멸해 사하일을 격분하게 했다. 프랑스는 5,000명 규모의 대병력을 총동원했지만 에즈라아와 알마즈라아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고 패퇴했다. 이후 다마스쿠스의 민족주의 지도자들과 협력해 도시 봉기 가능성을 논의했으나 병력 부족과 프랑스의 철도 방어 강화로 계획은 보류되었고, 혁명군은 프랑스의 새로운 대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여러 지역에서 야간 기습을 감행했다. 프랑스군은 항공기 지원을 앞세워 반격했지만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싸움은 수와이다·다마스쿠스·하마·골란 등지로 확산되었다. 다마스쿠스에서는 하산 알 카라트가 이끄는 고타 지역 투사들이 시가전에 돌입해 도시 일부를 장악했고, 사하일은 대포로 수도를 포격해 수백 채의 가옥을 파괴했다. 혁명군은 사하일을 생포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전투는 계속 이어졌다. 1925~1926년 동안 혁명은 하스피야·라샤야 등 레바논 산악지대까지 확대되었으나 탄약·물자 부족으로 점차 소모전 양상에 들어갔고, 프랑스의 대대적인 병력 증원으로 포위망이 좁혀지자 술탄 알아트라시와 동지들은 동부 요르단과 사우디 북부로 피신했다. 영국이 장기 체류를 허용하지 않자 그들은 다시 이동해야 했고, 알아트라시는 항복 대신 망명을 선택해 프랑스의 사형 선고를 받았다. 1936년 프랑스-시리아 협정 체결 후 일반 사면이 내려지자 그는 1937년 귀국해 국민적 환영을 받았다. 혁명 당시 그의 용맹과 여러 전사들의 희생은 수많은 일화로 남아 있으며, 프랑스 항공기의 폭격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타고 버틴 그의 모습, 아랍 부족들의 보호 아래 프랑스군의 포위망을 돌파한 사건 등은 영웅담처럼 전해진다. [1]
2.3. 대시리아 반란 이후
술탄 알아트라시는 1945년 레반트 위기와 1948년 제1차 중동전쟁에서 젊은이들을 독려하는 등 독립 이후에도 정치·군사적으로 적극 활동했다. 그러나 같은 시기 드루즈 일부가 유대인과 협력했다는 논란이 발생해 지역 사회에 큰 균열이 생겼다. 그는 시시크리 통치에 반대해 1954년 요르단으로 망명했다가 정권이 무너지자 귀환했으며, 1958년 레바논의 카말 줌블라트가 이끈 봉기를 지지했고 시리아·이집트의 아랍연합에도 찬성했다. 1961년 분리에도 단호히 반대하며 일관된 범아랍주의 입장을 유지했다. 말년에는 사회 활동에 집중하면서도 1966년 하페즈 알아사드 정권의 드루즈 탄압에 항의해 석방을 요구하는 경고 전문을 보냈다. 이 때문에 정권과의 관계는 냉랭했으며 알아사드는 그의 생전에는 산지를 방문하지 않았다. 1982년 그가 사망하자 50만 명 이상이 장례에 참여했으며 시리아·레바논·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이 조의를 표했고, 시리아 정부는 그의 이름을 딴 광장과 기념비를 세워 업적을 기렸다.[1] 고타·골란·수웨이다 등 여러 전장에서 여성·아이·노약자를 구출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투사들의 희생, 공포 속에서도 깃발을 끝까지 지켜낸 전사들의 이야기는 대시리아 반란의 상징적 기억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