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시리아 반란 الثورة السورية الكبرى | |||
| 날짜 | <colbgcolor=#fff,#191919>1925년~1927년 | ||
| 장소 | 시리아-레바논 | ||
| 결과 | 프랑스의 승리 | ||
| 교전 세력 | |||
쿠르드 | |||
| 지휘관 | |||
1. 개요
시리아에서 프랑스 통치에 맞선 가장 중요한 반란으로 자발 드루즈국에서 시작되어서 다마스쿠스, 칼라문, 하마, 골란 고원, 레바논 남동부로 확산되었다. 프랑스군의 탄압은 잔혹했고, 대부분이 민간인인 시리아인 약 10,000명이 사망했다. 이 반란으로 인해 프랑스군 병사 약 4,000명이 목숨을 잃었다.[1]2. 배경
제1차 세계대전으로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 독일, 오스만 제국 등 4대 제국이 붕괴했고, 오스만 제국의 아랍 영토는 연합국인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분할 통치(위임통치)되었다. 프랑스는 시리아와 레바논을, 영국은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을 맡았으며, 이를 통해 장차 독립과 자치가 가능하도록 준비하도록 했다. 1915년 영불 양국은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통해 오스만 제국 분할 계획을 합의했고, 같은 해 영국은 아랍 측과 협약을 맺고 아랍 독립을 약속받는 대신 아랍 반란을 유도했다. 1916년 5월 오스만 제국의 처형 사건을 계기로 아랍 반란이 시작되어, 1916년 6월 메카에서 반란이 발발하고, 영국 지원 아래 군사적 승리를 거두며 시리아와 레바논 등 오스만 제국 아랍 영토를 점령했다. 1918년 10월 무드로스 휴전 협정으로 오스만 제국은 아랍 지역에서 완전히 철수하며 아랍 통치권이 사실상 성립되었다.오스만 제국 지배가 끝난 후, 파이살 1세는 다마스쿠스에 아랍 정부를 세우고 알리 리다 알루카비를 총리 겸 군사통치자로 임명했으며, 시리아 전역을 대표하는 정부임을 강조했다. 파이살은 시리아군 창설을 시도했으나 영국의 무기 지원은 거부되었고, 1918년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해 아랍 지역에 세 개의 정부(히자즈, 시리아, 이라크)를 제안했으며, 미국 측은 국민투표를 통한 의견 수렴(킨그-크레인 위원회)을 권고했다. 위원회는 시리아 독립을 요구하는 결과를 보고했지만, 미국 대통령 윌슨은 국내 정치적 이유로 이를 무시했다. 이후 파이살은 프랑스와 ‘파이살-클레망소 협정’을 체결했으나, 시리아 국민이 이를 거부하며 독립과 통일을 요구했고, 프랑스의 정치 변화로 협정은 사실상 무효화되었다. 1920년 3월 시리아 총회에서는 시리아의 완전한 독립과 파이살을 헌법적 왕으로 추대, 민간 의원제 군주제 수립, 아랍어 공식화, 통화 교체, 영국과 프랑스의 통치 거부, 팔레스타인 유대인 국가 설립 반대 등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연합국은 산레모 회의에서 시리아·레바논을 프랑스, 요르단·팔레스타인을 영국 위임통치하에 두기로 결정했고, 시리아 정부는 이를 거부하며 일부 지역에서는 튀르키예와 연계한 반프랑스 움직임이 있었으나, 케말 아타튀르크가 프랑스와 1921년 앙카라 조약을 체결하며 북부 시리아를 튀르키예에 양도하면서 시리아의 독립운동은 제한되었다.
1920년 7월 5일, 파이살은 프랑스 장군 그루에게 그루 경고를 전달받았고, 내용은 프랑스 위임통치 수용, 프랑스 발행 화폐 사용, 철도 점령 허용, 시리아군 해체, 반프랑스 행위자 처벌 등이었다. 대부분 정부 인사들은 그 요구를 수용하자고 했지만, 국방장관 유세프 알-아즈마는 강하게 반대하며 저항을 결심했다. 파이살은 결국 조건을 수용하고 군을 해체했으나, 알-아즈마는 남은 병력과 자원봉사자들을 모아 프랑스군에 맞서 싸우기로 했다. 1920년 7월 24일, 프랑스군 9천 명이 다마스쿠스로 진격하며 포병, 탱크, 항공 지원을 받았고, 시리아군은 약 3천 명의 병력으로 맞섰다. 전투 중 프랑스군에 협력한 내부 배신자들이 발생하고, 매설한 지뢰도 제대로 터지지 않았지만, 알-아즈마는 최후까지 저항하며 사수했다. 결국 그는 전사했고, 이는 시리아군이 프랑스 점령에 맞서 처음부터 저항했음을 역사에 남기는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
반란을 진압한 프랑스는 소수민족을 분리시키고, 도시와 농촌, 유목민과 정착민을 갈라 놓는 분할통치 정책을 사용해 저항을 약화시켰다. 1925년 봉기 발생의 원인은 프랑스 점령 거부, 시리아 분할, 경제적 피해, 프랑스 군정의 독재, 아랍 문화 탄압, 자유 억압과 민족주의자 탄압, 그리고 드루즈 지도자와 프랑스 총독 간 갈등이었다. 봉기의 요구는 시리아 통일과 완전 독립, 국민주권 기반 정부 수립, 점령군 철수, 국군 조직, 자유·평등·박애 등 프랑스 혁명 원칙 지지였다.
3. 전개
프랑스는 1921년 카트루를 보내 드루즈들을 분리 통치하고, 드루즈 족과 협약을 체결해 자치 정부를 설치했으나, 현지 주민들은 이를 거부했다. 1922~1923년 아드함 칸자르 사건과 프랑스의 탄압, 술탄 바샤 알 아트라쉬 가문의 박해로 드루즈 반군은 게릴라 전투를 벌였고, 알 아트라쉬는 결국 요르단으로 피신 후 프랑스와 휴전 협정을 맺었다. 프랑스의 가브리엘 카르빌레 총독 폭정과 차별 정책으로 주민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1925년 7월 21일 술탄 바샤 알 아트라쉬가 시리아 대혁명을 선언하고, 드루즈족들과 연계해 프랑스 점령군에 대한 무장 봉기를 시작했다. 반군은 소수 인원으로도 프랑스군에 지속적인 타격을 가했으며, 다마스쿠스와 주변 지역에서 여러 전투를 벌였다.7월 21일 알-카프르 전투에서 프랑스 원정대가 거의 전멸하고, 8월 3일 알-마즈라 전투에서도 약 640명이 사망하며 무기 상당수를 반군이 확보했다. 9월 24일 메시프르 전투에서 프랑스가 승리하여 수와이다 점령의 길을 열었으나, 10월 시리아 혁명이 선포되며 반군은 다마스쿠스와 주변 지역으로 이동해 수도 봉기를 준비했다. 10월 18일 다마스쿠스 반란이 발생하고, 반군의 공격에 프랑스군은 보복과 도시 폭격을 감행하여 민간 피해가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국제사회(중국, 이집트, 인도, 소련, 미국)와 일부 프랑스 내 의견이 반군을 지지했으며, 프랑스 국내 여론도 군사적 실패와 민간 피해로 인해 점점 반대 여론이 확산되었다. 1925년 10월~1926년 5월, 드루즈 산 지역은 약 7개월 동안 프랑스 점령이 미치지 못했고, 반군은 다마스쿠스와 주요 교통로를 공격하며 프랑스군을 압박했다. 그러나 1926년 4월 25일, 65일간의 수와이다 포위가 프랑스군에 의해 해제되면서 드루즈 산과 남부 레바논은 진압되었고, 다마스쿠스 주변 지역도 장기간 작전 끝에 평정되었다. 프랑스는 항공 지원과 폭격을 활용해 봉기를 진압하고, 반군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은 채 점령 통치를 확립하며 위임통치국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1925년 11월 22일, 시리아 반프랑스 봉기에 대응하여 계엄령이 선포되고, 안드레아 대령은 다마스쿠스를 게릴라와 차단하기 위한 방어 계획을 수립했다. ‘미화 계획’으로 명명된 이 계획은 12km 철조망과 기관총 진지로 도시를 둘러싸고 1,500명의 인력이 공사에 동원되었으며, 1926년 2월 초 완공되었다. 안드레아는 다마스쿠스 주변의 오아시스 구타를 확보했지만, 게릴라를 완전히 소탕하지는 못했다. 다마스쿠스에서는 아흐메드 나미 베이가 내각을 구성하고 민족주의 장관들이 프랑스 정책에 반발했으나, 1926년 6월 11일 반란 관련 동의서 서명을 거부하며 체포되어 제지레로 추방되었다. 봉기는 시리아 내 공동체 간 갈등과 프랑스 고등위원 앙리 드 주브넬의 군사력 지원에 따라 점차 약화되었으며, 레반트에는 약 4만 명의 병력과 포병, 항공기, 전차 연대가 투입되었다. 봉기 결과, 위임통치 정책은 군사와 민간 권력을 분리하는 방향으로 재조정되었고, 사르라이 장군은 해임되어 책임을 인정받았다. 인명 피해는 시리아 민간인을 중심으로 약 1만 명, 프랑스군은 2,500~6,000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다.
4. 결과
대시리아 반란은 프랑스로부터의 완전한 독립과 민족적 투쟁에 큰 성과를 가져왔다. 프랑스는 시리아 국민이 굴복하지 않을 것을 깨닫고, 시리아 민족주의 정부 수립과 국민 의지 존중, 독립 필요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1928년에는 시리아와 레바논을 국제연맹으로 반환하자는 제안이 나왔으며, 혁명은 시리아 내 왕정 수립 운동을 촉발했으나 국민의 반대로 실패했다. 또한 프랑스는 시리아를 분할했던 4개 국가(다마스쿠스, 알레포, 알라위트, 드루즈)를 다시 통합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이브라힘 하나누와 하셈 알아타시가 이끄는 국민야당이 선거에서 승리했다. 프랑스는 행정 개혁을 시행하고 고위 관리와 군 장교를 교체했으며, 반란 지도자들의 승리에 대응해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장군인 가믈랑을 파견했다. 반란은 1946년 프랑스 완전 철수로 이어지는 정치적 투쟁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다마스쿠스 폭격과 마을 파괴 등 희생에도 불구하고, 종족·지역주의를 넘어선 민족적 의식과 단결을 상징하는 성과를 이루었다.[1] 대부분 프랑스의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온 병사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