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4 17:23:49

송재만

파일:송재만.pn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명 송요혁(宋堯爀)
본관 여산 송씨
출생 1891년[1] 10월 15일[2]
충청도 태안군 이원면 내리
(현 충청남도 태안군 이원면 내리)[3]
사망 1951년 2월 27일[4]
충청남도 당진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160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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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송재만은 1891년 10월 15일 충청도 태안군 이원면(현 충청남도 태안군 이원면) 내리에서 아버지 송명현(宋名鉉)과 어머니 양씨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천안군 천안면 읍내리로 이주했다가 서산군 대호지면 조금리에 정착했다. 3.1 운동 이후에는 대호지면 두산리로 이주하기도 했다.

그 뒤 그는 대호지면사무소에서 심부름꾼으로 근무했는데, 그러던 1919년 함께 근무하는 김동운(金東雲), 강태완(姜泰玩)과 대호지면 유지 남계원(南桂元) 등과 상의 하에 대호지면장 이인정의 직인을 사용해, 도로보수를 위한 부역이란 명목으로 그해 4월 4일 대호지면사무소 앞 광장에 면민들을 모이게 하도록 각 마을 이장에게 통지하였다.

거사 당일인 4월 4일, 그는 수백명이 모인 대호지면사무소 광장에서 대호지면장 이인정, 면내 유지 남상학·남상은 등과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고 시위군중을 지휘하여 서산군 정미면 천의리 천의(天宜) 장터까지 행진하였다. 이날 정오에는 시위군중과 함께 경찰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 경찰의 총칼을 빼앗으며 격렬하게 독립만세시위를 계속했다.

그 뒤 그는 일본 경찰의 검거를 피해 은신하여 1919년 6월 30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정치범 처벌령 위반 혐의에 대해 기소중지로 불기소처분내려지기도 했으나, 얼마 뒤 결국 검거되었다.

그리고 1919년 10월 24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 보안법 위반, 출판법 위반, 강도, 공문서 위조 행사 등의 혐의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이에 공소하여 그해 12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강도, 소요, 상해, 가택침입, 보안법 위반, 출판법 위반, 공문서 위조 행사 등의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 중 송재만 본인에 관한 부분이 취소되었으나, 형기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는 이에 상고하였으나 1920년 2월 7일 고등법원에서 위 혐의들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어 당일 서대문형무소에 입소하여 옥고를 치렀다.

1925년 2월 6일 만기출옥한 후에는 서산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1년 2월 27일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송재만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7년 6월 27일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에 이장했다.

[1] 1919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896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2] 1919년 12월 24일 판결문에는 8월 1일생으로 등재되어 있다.[3] #[4] 대전현충원묘적부에는 2월 10일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