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8 23:43:05

선인체육관

<colbgcolor=#ffd><colcolor=#000> 선인체육관
善仁體育館 | Seonin Gymnasium
파일:인천전문대학 예체능학부.jpg
기공/개장 1970년 4월/1973년 10월
수용 인원 3만 명
공사 비용 20억 원
폐장 2012년 11월
소속 인천체육고등학교 (1976~2012)
인천전문대학 (1973~2010)

1. 개요2. 역사
2.1. 철거2.2. 철거 이후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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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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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도화동에 있었던, 국내 최대이자 아시아 최대 규모의 체육관.

수용 인원은 3만명으로 웬만한 실외 운동장 수준의 규모였다. 내부에 육상 트랙, 농구·배구 코트, 유도장, 사격장, 검도장 등이 있어 거의 종합운동장 수준의 거대한 체육관이었다. 엄청난 규모의 실내 공간으로 관중을 압도했으며, 외관 역시 거대한 규모로 높은 지대에 우뚝 솟아있어 인천의 랜드마크 중 하나였다.[1]

2. 역사

<colbgcolor=#ffd>
파일:1973 선인체육관.png
1973년 건축 중인 선인체육관[2]
대형 체육관 건설이 일생의 꿈이었던 선인학원 이사장 백인엽에 의해 1970년 4월에 착공되어 1973년 10월에 완공되었다. 당시 아시아 최대의 사학인 선인학원 소속 16개 학교가 공동으로 사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졌다.[3]

가로 176m, 세로 142m에 높이 60m,[4] 당시에는 보기가 힘든 크기의 체육관이었다.[5] 건물 내부에는 야구를 제외한 거의 모든 스포츠 종목을 할 수 있는 기구, 물건이 마련되어 있었고, 이외의 여러 가지 많은 편의 시설을 갖추었다.[6] 그리고 외부에는 차량 수천 대가 주차할 수 있는 장소까지 마련되어 있었고, 출입구가 12개나 되는 등 많은 것이 만들어졌다.

1976년에 선인체육관에서 홍수환 선수의 WBA 타이틀 매치가 열렸고, 1987년 WBC 챔피언 장정구 선수의 12차 타이틀 방어전이 국민들의 큰 관심 속에서 열리기도 했다.

추가로 체육관의 부속 시설인 14층 강의동 빌딩에는 인천체육전문학교와 인천체육고등학교가 있었다. 인천체육전문학교는 인천체육전문대학, 인천전문대학을 거쳐 2010년 인천대학교에 통합되어 송도캠퍼스로 이전했고, 인천체육고등학교는 2012년 11월청라국제도시로 이전하여 이후 더 이상 쓰이지 않는 건물이 되었다.

2.1. 철거

파일:he2HrmUUQjc2qb.jpg
철거 진행 중인 체육관
파일:2013080301000000000025251.jpg
발파 준비 중인 강의동
발파 해체 영상
이렇게 동양 최대 라는 명칭이 있는 체육관이었지만, 선인학원 재단 건물 대부분이 다소 부실하게 지어져 안전 문제가 제기되었고, 위에서도 서술했듯이 난방 및 냉방 시설을 제대로 안 갖춰서 사용 횟수가 크게 줄어들었다.

2000년대에 들어 도화지구 재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인천체육회관으로 재단장하려고 하였으나 보수 비용이 약 170억원으로, 신축 비용보다 비싸다는 판단에 따라 2013년 1월부터 천천히 철거를 시작하여 그 해 8월 3일 아직 남아 있던 강의동이 폭파되면서 철거가 완전히 끝났다.

2.2. 철거 이후

파일:제물포캠퍼스 부지 전경(2008).jpg
파일:제물포캠퍼스 부지 전경(2020).jpg
개발 이전(2008) 개발 이후(2020)
프로젝트의 계획은 인천 구도심의 재개발 프로젝트 시작의 일환으로 도화오거리를 도화사거리로 변경하는 것이었다. 그 외로는 아파트 단지와 공원, 상업 시설, 그 외 등등 많은 것을 추진했다. 일명 인천도화도시개발사업.

그리고 마침내 인천 포스코 더샵 스카이타워라는, 주거동과 상가동이 분리된 3세대 주상복합(MXD)이 들어섰다. 또한 주변 단지 역시 빠르게 변화하고 재개발이 속히 이루어졌다. 지반까지 싹 밀어버리고 지었기 때문에 과거 선인체육관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졌다.

3. 여담

  • 거대한 규모 덕분에 지역 주민은 맘모스체육관 이라고 불렀다.
  • 1977년박근혜가 이곳에 온 적이 있다. 이유는 '새마음갖기운동'이라는 프로젝트 관련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서 왔다고 한다. 실제로 1977년에 새마음갖기운동 결의대회가 해당 체육관에서 열렸다.
  • 2002년 4월 새천년민주당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 국민경선 당시 인천 연설회가 열렸던 곳이다. 여기서 노무현 당시 후보는 이인제 당시 후보가 제기했던 장인 권오석남조선로동당 활동 비판에 대해 길이 남을 명연설로 반박한 바 있다. 당시 연설 내용은 아래와 같은데 노무현의 연설은 특유의 감성 전략으로 지지층의 결집을 노리고 반대파를 향한 설득의 시도였다. 그리고 이 전략은 성공적으로 적중하며 노풍을 그대로 이어가게 했다.
    “음모론, 색깔론 그리고 근거 없는 모략 이제 중단해 주십시오. 한나라당조선일보가 합창해서 입을 맞춰서 저를 헐뜯는 것을 방어하기도 참 힘이 듭니다. 제 장인은 좌익 활동을 하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해방되는 해실명을 하셔서 앞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무슨 일을 얼마나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결혼하기 훨씬 전에 돌아가셨는데, 저는 이 사실을 알고 아내와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 잘 키우고 지금까지 서로 사랑하면서 잘 살고 있습니다. 뭐가 잘못됐습니까? 이런 아내를 제가 버려야 합니까? 그렇게 하면 대통령 자격 있고, 이 아내를 그대로 사랑하면 대통령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까? 여러분,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께서 심판해주십시오. 여러분이 그런 아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신다면 저 대통령 후보 그만두겠습니다. 여러분이 하라고 하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2002년 4월 6일, 노무현 #


[1] 참고로 인천대학교 제물포캠퍼스의 건물은 하나같이 크고 웅장한데, 선인체육관은 그 건물 중에서도 제일이었다.[2] 뒤 3개의 건물은 현재 기준으로 왼쪽부터 인천소방고등학교, 인천대학교 제물포캠퍼스 본관, 인천대중예술고등학교/인천전자마이스터고등학교 건물이다. 그 외 공학관, 인천대학교 옛 본관은 지어지기 이전이라 보이지 않는다.[3] 이 건물 공사에도 선인학원 학생과 교사들도 인부로 동원되었다고 한다. 비교적 간단한 일에만 동원되었다고는 하지만 일반적으론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4] 혹은 65m. 강의동 건물 최상단의 평지붕을 포함한 수치로 예상된다.[5] 넓이만 고려해도 장충체육관의 세 배를 넘는 상당히 거대한 건물이었고, 이 체육관을 받추어 주고 있던 지반까지 포함하면 높이는 80m 이상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6] 다만 나중에는 시설이 부실해서 제대로 쓸 수가 없었는지 많이 쓰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