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1 03:13:06

사방지

1. 개요2. 실록의 기록3. 필원잡기의 기록4. 진짜 기형이었나?5. 매체에서
5.1. 영화5.2. 그 외
6. 관련 문서

1. 개요

사방지(舍方知)조선 세조 시절, 어지자지와 그와 관련된 스캔들로 한동안 조선을 발칵 뒤집었던 인물. 사방지는 세종 때 조선 고유의 역법인 "칠정산"을 만드는데 공헌한 이순지의 종이었는데 이순지의 딸인 과부 이씨와 놀아나 결국 그 꼬리가 밟히게 되었다. 실록에 의하면 그녀의 어머니는 경주 최씨 집안의 양반집 딸이었다고 한다.

2. 실록의 기록

그 발단은 세조 8년[1]인 1463년, 신숙주의 동생인 장령 신송주(1419 ~ 1464)의 고변으로 시작되었다. 신송주가 세조에게 아뢰길
“이제 서부(西部)의 정문(呈文)에 의거하면, 여경방(餘慶坊)[2]에 사는 고(故) 학생(學生)[3] 김구석(金龜石)의 처(妻) 이씨(李氏)[4]의 가인(家人) 사방지(舍方知)가 여복(女服)을 하며 종적(蹤跡)이 괴이하다고 하였으므로 본부(本部)에서 잡아다가 이를 보았더니, 과연 여복(女服)을 하였는데, 음경(陰莖)과 음낭(陰囊)은 곧 남자였습니다. 사방지가 남자로서 여장(女裝)을 한 것은 반드시 그 까닭이 있을 것이니, 청컨대 가두어 고신(栲訊)하게 하소서.”
라고 하였고 이에 세조는 자신의 사위인 하성위 정현조[5]를 보내 사방지를 살피게 했다.

결국 사방지는 이순지에 의해 시골로 쫓겨났다.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이씨 외에도 여승 중비(仲非), 지원(智遠), 소녀(小女), 내수(內竪) 김연(金衍)의 처[6] 등 최소 다섯 명의 여성과 간통행각을 벌였던 모양이다.[7] 그러나 1465년에 이순지가 죽은 후, 이씨는 다시 사방지를 불러 올려서 간통을 즐겼고 2년 뒤 결국 더 이상 이를 묵과할 수 없었던 세조는 사방지를 변방의 관노비로 내쳐버렸다.#

내치면서 세조가 다시 말하길
“이 사람은 인류(人類)가 아니다. 마땅히 모든 원예(遠裔)와 떨어지고 나라 안에서 함께 할 수가 없으니 외방 고을의 노비로 영구히 소속시키는 것이 옳다.”

라고 했다.

이 사건은 당사자 과부 이씨의 아들이었던 김유악에게 두고두고 주홍글씨로서 작용했었던듯 하다. 성종 때 이 일로 경상도 도사에서 개차 당하였고# 연산군은 이 일 때문에 부마를 선택할 때 김유악의 아들은 궐에 들이지 말라고 했었다.#

3. 필원잡기의 기록

조선 초 대신이었던 서거정이 자신의 저서 필원잡기에 사방지에 대해 적은 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서거정은 사방지를 관노비로 보낼 때 세조가 의견을 물은 신하였으며 성종 때 대사헌을 지내면서 위 사건의 피해자 김유악을 경상도 도사로 임명하는걸 반대한 인물이다. 세조가 서거정에게 의견을 물었던 것을 실록에는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으나 서거정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실제로는 좀 더 길게 얘기했었던 듯 하다. 관련 기록은 다음과 같다.
근래에 한 사내종의 모습이 여자와 흡사한 자가 있었다. 이 사내종은 어려서부터 여자의 옷을 입고, 나이 40이 넘도록 사대부 가문에 출입하다가 이 사실이 드디어 탄로되었다. 대간이 법에 의하여 논죄할 것을 청하였으나 세조(世祖)는 일이 애매하다 하여 이를 용서하고 나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경의 의사는 어떠하냐." 하니, 이렇게 답하였다.

"신이 소시 때에 《강호기문(江湖記問)》을 열람하였는데 강회(江淮) 사이에 한 비구니(比丘尼)가 수(繡)를 잘 놓았으므로 양가(良家)에서 딸을 보내어 배우게 하였더니, 돌연 임신을 하였습니다. 부모가 이를 힐책하니, 딸은, '비구니와 더불어 날마다 서로 잠자리를 같이하자 성(性)의 감각이 있는 것 같더니 드디어 이에 이르렀습니다.' 하였습니다. 양가에서 지방관에 호소하여 비구니를 자세히 조사해 살펴보니, 음양(陰陽)의 두 생식기가 모두 없었습니다. 지방관이 장차 이를 관대히 용서하려 하자, 한 늙은 할미가 말하기를, '소금물로 양경(陽莖 자지) 뿌리 위를 적신 다음 누런 개를 데려다가 이를 핥게 하면 양경이 튀어나옵니다.' 하므로, 지방관이 시험하니 과연 그러하였습니다. 지방관이 판단하여 말하기를, '천도(天道)에 있어서는 양과 음이요, 인도(人道)에 있어서는 남자와 여자이다. 이제 이 비구니는 남자도 아니며 여자도 아니니, 인도의 바른 것을 어지럽히는 자이다.' 하고 마침내 죽이니, 강회 사람들이 모두 통쾌하게 여겼다 하오니, 대개 천하의 사리(事理)가 무궁함이 이와 같사옵니다."

하였더니, 세조는 웃으며, "경은 부디 억지로 무슨 일을 밝히려고 하지 말라." 하였다.

이 얘기를 보아 사방지의 행각은 꽤 오래 전부터 지속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4. 진짜 기형이었나?

지금 와서 보면 과연 사방지가 실제로 반음양인이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사방지가 불완전한 남성의 성기를 가진 것은 맞다. 정도(精道)가 경두(莖頭) 아래에 있다고 하는데 이는 '사정관=요도'가 음경 끝이 아니라 밑으로 열린 요도밑열림증(요도하열)을 말한다. 요도하열(尿道下裂)은 음경에서 보이는 선천적 기형으로, 발기와 삽입은 되나 요도구가 제자리에 있지 않아 사정을 하여도 정액이 질 안으로 들어가지 못해 통상 성행위로는 임신시키기가 어렵다. 수술로 고칠 수 있다.

신송주의 고변에서는 여장남자의 뉘앙스를 풍기던 사건이 하성위 정현조의 검사 이후로는 이의(二儀)의 사람, 다시 말해 양성인간으로 바뀌었고[8] 심지어 처음 고변했던 신송주마저 파직시켰다.

세조가 불완전하지만 엄연한 남성인 사방지를 양성인으로 보아 일을 처리한 데에는 자신의 공신이자 사돈인 정인지를 위해서일 가능성이 크다. 정인지는 김유악을 사위로 삼았는데 김유악은 바로 사방지와 간통한 이씨의 아들이었다. 만약 이씨와 간통한 사방지를 여장남자로 인정해버리면 김유악은 물론 장인인 정인지까지도 체통이 심히 깎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간통자들이 오랜기간 간통했으면서도 임신하지 않았던 점을 생각하면 사방지의 요도하열증에는 불임으로 연결되는 다른 원인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요도하열이 매우 심한 경우는 사실상 불임을 기본으로 수반하는 인터섹스의 몸에 가까우며, 상태에 따라 잠복고환이나 안드로겐 불감응 증후군을 동반하거나 심지어는 성염색체 이상이나 초음파 검사에 의해 자궁이나 난소도 함께 발견되는, 그리고 설령 자궁, 난소 등의 기관이 없다 해도 사고로 손상된 음경 수술이 너무 어려워 결국 영아 시절 질 성형을 한 뒤 여자로 키워지는(그리고 그렇게 키워짐과 별개로 남성의 성 정체성을 타고난 덕에 일생 동안 번민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사방지가 인터섹스가 아니었다고 단언하기에도 무리가 있다. 다른 간성 분류도 그렇지만 이런 심한 요도하열 영아의 성기를 한 쪽으로 교정하는 것도 아이의 삶을 위해 온당한 것인지는 현재까지도 논쟁 중이며, 이로 인해 일생을 고생하는 간성인들도 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지금에 와선 문헌 기록을 보고 추측하는 선의 추론일 뿐이긴 하다. 당시 조선의 의학이나 생명과학 지식 수준이 그렇게 뛰어나지는 않기 때문에, 현대적으로 판단을 내리는 게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

5. 매체에서

5.1.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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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그 외

  • 2022년에는 '내 이름은 사방지'라는 제목의 사방지를 주인공으로 한 창극이 상연되었다.#

6. 관련 문서



[1] http://sillok.history.go.kr/id/kga_10804027_002[2]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세종로 사거리 남측 일대 부근으로 신문로, 세종로, 태평로, 무교동, 다동 일부에 해당한다.[3] 여기서 학생은 별 다른 품계나 관직이 없는 이를 말한다.[4] 이순지의 딸이다.[5] 정인지의 아들[6] 내수란 내시를 말한다. 놀라운 것은 김연의 처는 사방지 아비의 동복, 다시 말해 사방지의 고모였다는 점이다. 즉 근친상간.[7] 이중 중비는 머리를 다시 기르고 환속하기까지 했다.[8] 다만 정현조 역시 남자의 형상이 더 많고 음경, 음낭이 좀 이상할뿐 남자의 형상이 더욱 많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