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 대전 전투기 에이스 일람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순위 | 이름 | 국적 | 격추 수 | 주 기종 | 비고 |
<colbgcolor=#156b94> 1위 | 에리히 하르트만 | 독일 | 352대 | Bf109 | 세계 1위 | |
2위 | 게르하르트 바르크호른 | 독일 | 301대 | Fw190 | 세계 2위 | |
3위 | 귄터 랄 | 독일 | 275대 | Bf109 | 전후 서독 공군 총감 부임 | |
4위 | 오토 키텔 | 독일 | 267대 | Fw190 | Fw190 톱 에이스 | |
5위 | 발터 노보트니 | 독일 | 258대 | Fw190 | ||
6위 | 빌헬름 바츠 | 독일 | 237대 | Bf109 | ||
7위 | 에리히 루도르퍼 | 독일 | 222대 | |||
8위 | 하인츠 베어 | 독일 | 220대 | |||
9위 | 헤르만 그라프 | 독일 | 212대 | Bf109 | 세계 최초 적기 200기 격추 | |
10위 | 하인리히 에를러 | 독일 | 208대 | |||
▼ 11~20위 |
1. 개요
빌헬름 바츠(Wilhelm Batz : 1916. 5. 21~1988. 9. 11), 독일 공군의 전투조종사로 항공 전사를 통틀어 무려 6위에 랭크되어 있는 슈퍼 에이스지만 다른 에이스들과는 다르게 그다지 잘 알려지거나 유명하지는 않다.2. 1차 대전의 에이스를 동경한 소년
빌헬름 바츠는 독일 제국 시대인 1916년에 제국 중부 바이에른 왕국의 고도 밤베르크(Bamberg)에서 시청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소년 시절, 붉은 남작 같은 1차 대전 에이스의 영웅담을 탐독하던 바츠는 국가에서 장려하던 스포츠인 글라이더 클럽에서 첫 비행을 경험하게 되었고, 고교 졸업장을 받자 마자 신생 루프트바페에 입대하게 되는데 이때가 1935년 11월 1일이었다.그때만 해도 독일 전국에 군사 비행학교는 그리 많지 않았던 탓에 바츠는 훗날 비행학교를 옮겨다니며 수업을 받게되는 후배 생도들과는 달리 독일 남부의 카우프보이렌(Kaufbeuren)에 세워진 비행학교에서 고등 비행훈련까지 이수했고, 이론과 실기에서 모두 성적이 뛰어나 교관으로 선발되게 된다. 장교가 된 바츠는 바트아이블링(Bad Aibling)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비행교관을 맡아 생도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3. 뒷방 신세 교관
1939년에 독일이 폴란드 국경을 넘으며 2차 대전이 일어나고 공중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1940년에 접어들자 항공전의 규모는 점차 커지면서 루프트바페는 유럽 하늘을 피로 물들이기 시작했지만, 바츠는 여전히 비행학교에서 교관 생활을 하고 있었던 탓에 전선에 나가 있는 동료들이 부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그는 상부에 자신을 일선 부대로 옮겨달라고 여러차례 자청했으나 계속 거부당했다. 이렇게 빌헬름 바츠는 루프트바페의 전성기 시절을 모두 후방에서 속을 끓이며 보내야만 했다.1942년 12월, 동부 전투비행단 보충대(EJGr Ost)에서 대기하던 바츠에게도 드디어 기회가 주어진다. 모스크바 전투에서 전략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독일군은 소련의 반격으로 하르코프 공방전이 본격적으로 불붙자, 후방 비행학교의 교관에게도 전선을 향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바츠가 발령받은 비행단은 에리히 하르트만, 게르하르트 바르크호른, 귄터 랄이 몸담았으며 훗날 항공 전사상 가장 많은 격추수를 거둔 부대가 되는 JG 52 비행단이었다.
(좌에서 우로 : 하인리히 슈투름, 게르하르트 바르크호른, 빌헬름 바츠, 오토 푀네콜트)[1]
4. 실전에 데뷔
이즈음 바츠는 중위가 되어 있었는데, 교관 생활을 하며 엄청나게 반복된 비행을 했던 탓에 일선에 배치된 모든 기종을 눈 감고도 몰 수 있었고, 무려 5,000 비행시간을 기록하고 있었다. 1943년 3월, 바츠는 케르치 반도 상공에서 LaGG-3 1대를 잡으면서 자신의 첫 격추를 달성한다. 그리고 불과 5일만에 그의 격추 스코어는 7대 이상이 되어 후방에서 편안히 교관이나 했던 그를 의구심어린 눈길로 보던 부대원들의 선입견을 깨끗이 일소시켜 버린다.원래 실전 경험이 처음인 조종사에게는 편대원 보직이 주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바츠 중위의 경우는 나이도 많고 이미 기량이 입증되었다고 판단을 내린 비행단장 디트리히 흐라박 중령은 그를 5./JG 52의 비행중대장으로 삼았다. 이때부터 9월 초까지 바츠는 20기를 격추시켰고, 11월 중순까지는 40기, 그리고 그 달 말에는 50기를 채우며 꾸준한 격추 행진을 계속했다. 빌헬름 바츠 중위는 다른 수퍼 에이스들처럼 하루에 10대 이상씩 때려 잡는 기적 같은 공중전을 보여주지는 않았더라도,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무엇보다 자신은 전혀 피해를 입지 않으면서 스코어를 늘리고 있었다.
빌헬름 바츠의 수기에 따르면 그가 공중전의 감각을 완전히 터득했다고 느꼈던 것은 75대째를 떨구고 기사철십자장을 받은 1943년 12월 말이었다. 이때부터 바츠 중위의 격추 기록은 가파른 그래프를 그리며 1944년에 접어들면서 스코어는 급상승하는데 놀랍게도 이 시기는 루프트바페가 상대하는 소련 공군의 기세가 최고조에 이른 시기였다. 150대 이상의 놀라운 격추 기록을 달성한 독일 에이스들 대다수가 그 대부분을 독소전 초기에 약체에다 무기력했던 소련 공군을 대상으로 거두었던 점을 생각하면 빌헬름 바츠의 전투력은 더욱 빛난다.
1944년 3월 24일, 바츠는 드디어 100대 격추를 달성했다. 그는 항공전 역사를 통틀어 67번째로 꼬리날개에 센튜리 마크를 그려넣은 엑스페아텐 에이스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활약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5월 31일, 세바스토폴 전선에서 그는 단 하루만에 15대를 격추하여 부대의 일일 최다 격추 기록을 고쳐 썼다. 이제 대위가 된 바츠는 1944년 한 해 동안만 해도 149대를 격추하여 200대 격추를 넘게 된다.
5. 포로가 되다
JG 52에게 1만 대 이상의 항공기를 잃은 소련군이 이들을 얼마나 증오했는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소련군은 미군 사령부에게 JG 52의 장비 일체와 모든 장병을 인도해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고, 당시 이런 지엽적인 문제로 동맹국인 소련과 껄끄럽게 되는 상황을 원치 않았던 아이젠하워 장군은 이 조건에 토를 달지 않았다.종전 시에 바츠가 속해 있던 그루페는 오스트리아에 머무르고 있었고, 소련군의 주둔지와는 거리가 있었던 데다 바츠가 파울 다이히만(Paul Deichmann) 장군을 태우고 미군이 점령하고 있던 노이비베르크(Neubiberg) 비행장에 내려 소련의 손아귀를 벗아나는데 성공한다. 바츠와 같은 비행단 소속이었던 하르트만이나 헤르만 그라프 같은 경우 미군에게 투항했다가 소련군에게 넘겨져 수용소로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빌헬름 바츠는 아주 운이 좋았던 셈이다.
독일이 항복했을 때 빌헬름 바츠의 계급은 소령이었다. 그는 2년도 채 안되는 짧은 기간동안 445회의 실전 출격을 달성했고, 합계 237대 격추라는 미증유의 기록을 세웠다. 이런 놀라운 무공에도 불구하고 바츠는 평소 과묵하던 그의 성격대로 조용히 여생을 보낸 탓에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는 못했을지도 모른다.
6. 재건된 공군에 재입대
1955년에 미군의 주도로 서독 공군이 재건되자 과거 전투와 지휘 경험을 살리고 싶었던 빌헬름 바츠는 소령 계급을 다시 받고 서독 공군에서 복무하기 시작했다. 여기서도 다시 란츠베르크에 세워진 훈련 학교를 책임지게 된 그는 여러 보직을 두루 거쳤지만 중령에서 진급이 멈추자 1972년에 예편했다. 이 위대한 에이스의 묘는 레버쿠젠의 시립묘지에 자리잡고 있다.[1] 여담으로 이 사진에서 바츠만이 편안한 최후를 맞았고, 나머지 셋은 모두 사고로 사망하거나 전사했다. (슈투름은 이륙 중 사고로, 바르크호른은 전역 후 교통사고로 인해, 푀네콜트는 이륙 도중 기습으로 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