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20 00:53:55

빅 빌 브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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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클레임드 뮤직 선정 1890~1949년대 최고 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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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빅 빌 브룬지
Big Bill Broonzy
파일:20210211_221050.jpg
본명 리 콘리 브래들리
Lee Conely Bradley
이후, '빅 빌 브룬지'
출생 1893년 6월 26일 (?)[1]
미국 미시시피 주 스콧
or
미국 아칸소 주 레이크 딕
사망 1958년 8월 14/15일
미국 일리노이 주 시카고
직업 소작농, 설교자 → 싱어송라이터, 음악가
장르 어쿠스틱 시카고 블루스, 컨트리 블루스
악기 보컬, 기타, 바이올린(~1920년대)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1차 전성기와 암흑기2.3. 2차 전성기2.4. 사생활 및 말년
3. 업적4. 여담5. 대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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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블루스 가수 및 기타리스트.

초기 블루스의 전설이자 시카고 블루스의 선구자이며 30~50년대 가장 영향력있는 블루스 음악가 중 한 명이다. 에릭 클랩튼, 키스 리처드, 존 레논 등 여러 인물이 그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수많은 명곡을 남겼다. 또한 순회공연을 돌며 유럽에 최초로 블루스를 전파한 인물로도 잘 알려져 있다.

2. 생애

2.1. 초기

아버지 프랭크 브래들리(Frank Bradley)와 미티 벨처(Mittle Belcher)의 17명의 자식 중 한 명으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와 출생년도는 꽤나 불명확한데, 브룬지 본인은 자신이 1893년, 미시시피의 스콧 카운티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후 블루스 역사가 로버트 리스먼에 말에 따르면, 브룬지 사후 조사 결과 그의 출생년도는 1903년, 출생지는 아칸소의 제퍼슨 카운티로 추측된다고도 한다.

그의 음악적 활동은 꽤나 어린 나이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10살이 되던 해에는 시가 박스로 피들을 만들어 그의 삼촌인 제리 벨처로부터 포크 송들과 스피리추얼을 연주하는 법을 배웠다고 하며 이후엔 그의 친구인 루이스 카터와 집에서 직접 제작한 기타로 교회 행사등에서 공연하기 시작했다.

2.2. 1차 전성기와 암흑기

이 후 세계 1차대전 시기에 군인으로 복무하다 1920년대에 시카고에 도착한 후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시작한다. 당세 피들을 주력으로 연주하던 브룬지는 피들 연주만으로는 성공을 이루기 어렵다 판단. 피들을 그만두고 기타를 전문적으로 배우게 되는데, 이 때 그에게 기타를 가르친 인물이 파파 찰리 잭슨이다. 그 후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다양한 일들을 전전하지만 주된 관심사는 역시 음악이었고 그렇게 점점 실력을 연마해나간다.

이후 파라마운트 사와 계약, 녹음을 했던 파파 찰리 잭슨덕에 그의 친구인 존 토마스와 함께 파라마운트 사에 오디션을 볼 수 있게 되는데, 첫 번째 시도는 실패했으나 두 번째 시도에서 나름의 성공을 거두어 그의 첫 싱글인 "House Rent Stomp"와 "Big Bill's Blues"가 나오게 된다. 그의 친구인 존 토마스와 함께 녹음했기 때문에 아티스트 명은 Big Bill and Thomps로 쓰여져 있다.

1930년엔 처음으로 그의 풀네임 싱글 "Station Blues"가 나오게 된다. 하지만 이 때의 풀네임 표기는 잘못되어 Big Bill Broonzy가 아닌 Big Bill Broomsley로 표기되었다. 이 싱글 또한 판매량이 저조했으며 이후에 "Big Bill Johnson" 등의 이름으로 몇 몇 곡을 더 내게 되고 그 후 그의 싱글이 팔리기 시작하면서 그 또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그 뒤 시카고로 돌아간 그는 내는 곡들이 여럿 성공하여 큰 인기를 얻게 되고 시카고의 사우스 사이드 지역의 클럽에서 정기적으로 공연을 하며 멤피스 미니와 투어도 하는 등 인생의 1차 전성기를 맞으며 그를 30년대 블루스의 왕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그는 초기 시카고 블루스에 지대한 영향을 주며 이를 발전시켰지만 이 후 머디 워터스[2]와 같이 일렉트릭 사운드를 중심으로 하는 뉴 시카고 블루스가 인기를 얻으며 그의 음악은 점점 인기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 후 브룬지는 여러 음악적 시도들을 하게되지만 그마저도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하고 화려했던 전성기 후 음악 인생의 암흑기를 맞게 된다.

2.3. 2차 전성기

40년대에 암흑기를 겪고, 그럼에도 꾸준히 음악활동을 해오던 그는 다시 한번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맞게 되는데 바로 1951년에 유럽 투어 일정이 잡힌것. 이 때 그는 영국, 독일, 프랑스 등을 전전하며 기립박수와 큰 호평을 받았으며 미국으로 돌아와서 음악 스타일을 다시 한번 바꾸게 되고 유명 포크 음악가들인 피트 시거, 소니 테리, 브라우니 맥기 등과 활동하며 국제적인 스타로 거듭나 그의 음악인생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50년대의 유럽 투어 외에도 영국의 재즈, 포크 클럽에서의 연주 또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데, 이러한 그의 영국 공연들은 초기 영국 록,포크 리바이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어 비틀즈, 에릭 클랩튼, 키스 리처드 등과 같은 음악가들 및 밴드에게 큰 영향를 주게 되고 영국 내의 포크와 록씬의 발전에 기여해 이 후 음악계의 매우 큰 사건인 브리티시 인베이젼의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2.4. 사생활 및 말년

1915년엔 22세의 나이로 결혼을 한 후 소작농으로 일을 하게 되면서 피들 연주를 포기하고 전도사가 된다.

그런 것도 잠시, 현지의 한 행사에서 50달러를 줄 테니 바이올린 연주를 해 달라는 제안을 받게 되는데, 그가 제안에 답하기도 전에 그의 아내가 먼저 그 돈을 받고 써버리게 되어 그가 어쩔 수 없이 연주를 해야하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그리고 1916년, 가뭄으로 인해 비축해둔 그의 작물이 모두 쓸모없어지게 되면서 다른 일들을 하다가 1917년 1차 세계대전 시기에 징집되어 유럽에서 2년간 파병 생활을 하게 된다. 이후 그는 아칸소의 파인 블러프를 떠나 리틀 록이라는 도시로 이사를 가게되고 그 후에 다시 시카고로 이동하게 된다.[3]

앞서 서술한듯 그의 첫번째 부인과의 결혼생활은 그닥 유쾌하지 못했던 듯 한데 이는 당시의 브룬지 노래에 가사에서도 가끔씩 엿볼 수 있으며 이 후 성공을 거둔 후에는 이혼한 듯 보인다. 그 후 네덜란드의 Pim Van Isvedlt라는 백인 여인과 결혼해 Michael이라는 아이를 갖게 된다. Michael은 아직도 네덜란드에 살고 있다 한다.

1958년에는 인후암에 걸려 그 소식을 들은 여러 사람들이 후원을 해주었지만 결국 8월 14~15일경 숨을 거두게 된다. 수술 전날에 브룬지는 자신이 다시 목을 제대로 쓸 수 없을것이라 생각한것인지 평소 친하게 지내던 유명 포크 음악가 피트 시거에게 자신이 부르는 몇곡의 동영상을 찍어주기를 부탁였는데 이 영상은 지금도 유튜브에서 찾아 볼 수 있으며 브룬지의 몇없는 라이브 영상으로 남아있다. 이후 그는 일리노이의 링컨 묘지에 장사되었며 블루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3. 업적

어릴 때부터 블루스, 포크 음악, 스피리추얼, 노동요, 랙타임, 호쿰, 컨트리 음악 등등을 들으며 자라왔고 블라인드 블레이크, 블라인드 레몬 제퍼슨과 같은 당시의 다른 유명 음악가들의 음악을 들으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구축해낸다. 그 이후 소니 보이 윌리엄슨 1세, 탬파 레드와 함께 초기 시카고 블루스 스타일 중 하나인 어쿠스틱 시카고 블루스의 선구자이자 전설적인 인물로써 평가받게 된다.

그의 여러 히트곡들은 후에 블루스의 고전이 되어 지금까지도 연주되고 있으며 당시 라디오에 출연해 당시 여러 사람들에게 블루스에 대해 알렸다.

유럽에 최초로 블루스를 전파하여 영국에 포크, 록 리바이벌의 기틀을 만들었고 이는 비틀즈, 롤링 스톤즈, 크림, 더 후 등 여러 전설적인 영국 음악가들이 나타나는 브리티시 인베이젼으로 이어진다.

브룬지는 음악 경력이 긴 만큼 블루스 연주자들 중에서도 특히 자신만의 음악적 스타일이 독특하고 또한 방대한데 20년대 후반 ~ 30년대 초반에는 자신을 포함 2명의 기타연주를 중점으로 하는 잔잔한 블루스를 불렀고 또한 만돌린이나 피들 등과 함께하기도 했으며 Hokum Boys라는 그룹에서 기타연주를 맏으며 호쿰 블루스 또한 시도하였다.[4] 이후 좀 더 도시적인 블루스로 전향한 그는 피아노를 중점으로 세우며 뒤에서 핑거스타일 연주나 리듬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으며 30년대 중후반 ~ 50년대 초반에는 색소폰, 클라리넷, 트럼펫 연주자들을 고용하기도 했다. 그의 곡 "New shake 'em on down"에서는 당시 생소하던 일렉기타 연주자를 고용 하였는데 이는 일렉기타의 가장 최초의 형태 중 하나이다. 이후에도 그의 곡에서 일렉기타를 기용한 곡들을 찾아 볼 수 있으며 브룬지 본인이 일렉기타를 연주한 곡들도 드물지만 찾아 볼 수 있다. 5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기타 한대로 핑거스타일 곡들을 연주하거나 리듬을 중점으로 오래된 포크 블루스를 연주하였으며 블루스 색채를 띄는 여러 재즈, 팝 음악들을 편곡해 연주하기도 하였다.

에릭 클랩튼은 빅 빌 브룬지를 자신에게 가장 영향을 크게 미친 음악가들 중 하나로 꼽았으며 이와 같은 록 음악가, 블루스 음악가 가리지 않고 영향을 주었다. 대표적으로는 시카고 블루스의 또 다른 전설들인 윌리 딕슨, 머디 워터스, 멤피스 슬림 등이 있고 마찬가지로 머디 워터스에게 영향을 받은 로리 갤러거에게도, 킹크스레이 데이비스와 비틀즈의 존 레논, 조지 해리슨, 롤링 스톤즈의 키스 리처드, 로니 우드 등등 수 많은 음악가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머디 워터스는 브룬지 사후 그의 관을 들기도 하였으며 그를 기리는 의미로 그의 곡들로만 채워져있는 헌정 앨범을 발표하였고 에릭 클랩튼은 데렉 앤 도미너스 시절 key to the highway[5], Unplugged 앨범에서는 hey hey와 guitar shuffle[6]이 등장하며 피트 시거와 브라우니 맥기, 소니 테리는 black, brown and white를 연주했다. 로리 갤러거는 bank's blues를 편곡해 자주 연주하였으며 이외에도 많은 곡들이 많은 뮤지션을 통해 연주되었다.

4. 여담

1929년엔 Hokum Boys라는 그룹에, 1935년에는 State Street Boys라는 그룹에 속해있었으며 그 후에 Big Bill Broonzy & his far four이라는 그룹을 이끌기도 하였다.

1927년에 녹음된 Big Bill Blues와 House Rent Stomp가 들을 수 있는 브룬지의 가장 오래된 곡이지만 이보다 전에 녹음되었던 곡이 있다고 한다. 다만 이 녹음은 기록으로만 남아있으며 녹음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워시보드 샘과 재즈 길럼과는 특히 인연이 깊어 많은 곡들을 같이 작업하였으며 소니 보이 윌리엄슨 1세와 릴 그린에게 피쳐링을 해주기도 하였다.[7]

1930년대에 다른 유명 블루스 뮤지션 로버트 존슨의 대역으로 카네기 홀에서 연주한 적이 있는데 당시 청중들의 박수갈채를 받았고 백인들의 박수를 처음 받아보았던 브룬지는 무대의 막이 내려간 후에도 몇십초간 멍하니 서있었다고 한다.

당시 인기가 절정을 달하던 30~50년대의 브룬지는 미국, 유럽, 아프리카 등을 돌아다니며 굉장히 많은 곡들을 녹음하였는데 그 수는 당시 전세계의 모든 뮤지션들 중 2위에 달한다고 하며 브룬지는 그 곡들로 지금까지 총 300개가 넘는 곡의 넘는 저작권을 가지고 있다.

독일 공연 당시 녹음된 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을 들어보면 루이 암스트롱과 함께 노래를 부른다. 아마 독일 공연때 브룬지와 같이 공연한 악단에 루이 암스트롱이 속해 있었던 모양.

여러모로 유명하다보니 노래의 소재로도 가끔 등장하는데 비틀즈의 조지 해리슨의 Wreck of the hesperus의 가사에 브룬지가 등장하며 champion jack dupree의 노래 중 death of the big bill broonzy란 노래가 있으며 아예 제목이 big bill broonzy인 노래 또한 존재한다.

오래된 블루스 뮤지션들은 보통 생전에 큰 인기를 얻지 못하고 사후에 그 업적을 인정받는 반면 브룬지는 활동 당시에도 큰 인기 를 얻어 라디오에 출연하거나 자서전을 내고 다큐멘터리 등이 나오기도 했다.

5. 대표곡

  • Key to the Highway (1941)
  • Hey Hey (1951)
  • Saturday Night Rub (1930)
  • Rockin chair blues[8]
  • I feel so good
  • Just a dream
  • Banker's blues


[1] 이는 의견이 분분하여 1903년생이라는 설도, 1898년생이라는 설도 있다. 브룬지 본인은 자신이 1893년생이라 주장했다.[2] 브룬지는 머디 워터스가 인기를 얻지 못했을 당시 클럽에서 공연일정을 잡아주거나 하는 등 그를 여러모로 인도해주었다.[3] 허나 앞서 서술한 블루스 역사가인 로버트 리스먼이 말하길 그는 1917년엔 14살에 불과했으며 실제로 군인으로 활동한 적도 없다고 한다. 원래 초기 블루스 연주자들은 그 정보가 워낙 적다보니 그 생애에 관해선 여러모로 의견이 분분하다. 그나마 브룬지는 음악적으로도 성공하고 라디오에 출연하거나 자서전까지 내는 등 여러 활동으로 정보가 많은편이다. 그마저도 생애 초기에 관한 정보는 불확실하고.[4] 호쿰 보이스는 탬파 레드, 블라인드 블레이크, 케이시 빌 웰던, 워시보드 샘, 르로이 카, 스크래퍼 블랙웰처럼 기라성같은 블루스 음악가들이 멤버로 참여하기도 한 영국의 야드버즈와도 같은 그룹이다.[5] 이는 블루스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많이 연주된 블루스 중 하나이며 프레디 킹, 비비 킹, 레드 제플린, 키스 리처드 등 수많은 뮤지션들이 연주하였다.[6] cd에서는 들을 수 없고 디럭스 DVD에서 Worried life blues 트랙 초반에 잠깐 연주한다. 참고로 guitar shuffle은 제프 백의 기타 콜랙션 영상에서도 등장한다.[7] 릴 그린의 피쳐링으로 참여한 곡들에서는 드물게 브룬지의 핑거스타일이 아닌 단음으로 된 기타솔로를 들을 수 있다.[8] 이 곡은 후에 비비킹, 머디 워터스의 히트곡이 되는 Rock me baby의 초기 버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