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bgcolor=#c29f6d><colcolor=white> 블라이부르크 송환 Случај Блајбур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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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간 | 1945년 5월 | ||
| 장소 | 오스트리아 블라이부르크 | ||
| 원인 | ※ 우스타샤와 슬로베니아 향토방위군의 잔혹 행위에 대한 복수 | ||
| 결과 | 수만 명이 재판없이 학살당함 | ||
1. 개요
1945년 5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이 유고슬라비아를 떠나 귀환 한 추축국 소속 군인과 민간인 수만 명을 상대로 자행한 보복 행위로 수천 명이 사망했고, 많은 사람들이 학대를 당하고 강제 노동 수용소로 향하는 긴 행군을 당했다. 희생자들은 대부분 크로아티아인, 우스타샤, 그리고 슬로베니아 향토방위군이었다.2. 배경
1940년 추축국의 유고슬라비아 침공 이후 유고슬라비아는 독일, 헝가리, 이탈리아, 불가리아에 분할 점령당했다. 그리고 같은 날 독일은 괴뢰국인 크로아티아 독립국을 세우고 안테 파벨리치를 포글라브니크로 임명하였다. 유고슬라비아의 점령과 분할 이후, 우스타샤는 그들만의 인종 법률을 제정하고 세르비아인과 유대인, 집시 인구에 대한 대량 학살을 시작했다. 가장 큰 수용소인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였으며 대부분이 여성과 어린이였다. [1] 세르비아는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 불가리아, 크로아티아 독립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으며, 독일은 밀란 네디치가 이끄는 괴뢰정부를 세워 통치했다. 1941년 공산주의 주도의 대규모 봉기가 일어나자 독일군은 두 달 만에 세르비아 민간인과 유대인 3만 명을 학살했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우스타샤와 슬로베니아 향토방위군에 의해 학살당했다.하지만 독일이 점차 패망하자 독일군, 이탈리아군, 우스타샤, 슬로베니아 향토방위군은 미국과 영국에 항복하려고 했다. 그리고 이들은 이 부대가 소련과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에 맞서 서방 연합군 편에서 싸울 새로운 크로아티아 군대의 핵심이 되기를 바랬다. 수천 명의 민간인이 파르티잔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후퇴하는 군대를 뒷따랐다. 이들은 모두 유고슬라비아 군대의 부대와 싸우면서 후퇴하고 있었는데, 전쟁이 이미 공식적으로 끝났기 때문에 전쟁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선봉이 오스트리아로 넘어가 영국군에 항복하려고 했다. 하지만 토마스 스콧 준장은 독일의 항복 조항을 근거로 항복을 거부하고 파르티잔에게 항복하라고 명령했으며, 거부할 경우 파르티잔에게 넘기겠다고 위협했다. 당시 영국군과 미군은 항공기와 지상 병력을 동원해 해당 지역에서 힘의 시위를 펼쳤으며, 이를 통해 대규모 행렬이 더 서쪽 오스트리아 내로 진입하는 것을 막고 유고슬라비아군에 넘겨지는 쪽으로 유도했다. 이 항복 절차는 곧이어 대규모 환송 및 처형 과정으로 이어졌으며, 이 중 일부는 학살당했다.
3. 전개
1945년 5월 15일 오후 16시경, HOS(크로아티아 독립국 NDH의 군사조직) 대표자들이 항복을 수락했다. 이후 같은 날 항복한 병사들의 즉각적인 환송이 완료된 뒤, 파르티잔들은 병력은 그들을 무장해제하고 포로들을 수송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행렬은 4열로 구성된 대열을 이루며 슬로베니아를 통과하는 강제행군을 시작했으며, 영국군의 영향권 내에 있을 때는 초기 대우가 비교적 적절했으나 행렬이 국경에서 멀어질수록 상황은 악화되었다. 이들은 식량과 물을 제공받지 못했고, 귀중품이 약탈당했으며 뒤처진 자들은 사살당했다. 개별 처형이나 소규모 집단학살이 곧 시작되었다. 행렬은 드라바강변을 따라 마리보르 인근으로 향했고, 5월 17일 첫 포로들이 마리보르에 도착해 임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일부는 기차나 트럭으로 체례나 자그레브로 수송되었고, 다른 이들은 마리보르 인근 테즈노 지역의 대전차 참호로 이송되어 손이 철사로 묶인 채 대열로 세워져 수일간 학살되었다. 참호에서 회수된 시신은 1,179구였으며, 사망자는 약 1만5천 명에 이를 수 있다는 추정이 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HOS 소속이었고 몬테네그로 국민군과 기타 부대 포로도 있었다.슬로베니아의 슬로븐예 그라데츠 인근 행렬에도 난민들이 합류했고, 해당 지역 주민들이 도로변에 음식을 놓아두기도 했으나, 행렬에서 벗어나거나 쉬려던 자들은 사살당했다. 체례에서는 대부분의 포로가 도심 외곽 축구장 부지에 수용되었고, 명령부 보고에 따르면 5월 17일 기준 약 3만 명의 포로가 접수되었다. 포로 처형은 사바강 인근과 부코브즐락 일대 대전차 참호에서도 이뤄졌으며, 한 사례로 약 100~200명이 저수지에 가두어져 천천히 물을 배출해 익사당했다.
5월 18일에는 약 4만 명의 행렬이 주로 크로아티아 병사로 구성되어 체례에서 지다니 모스트로 이동했으며, 일부는 인근 숲으로 이끌려 처형되었다. 이 행렬은 5월 20일 사모보르에 도착했고, 기차 수송으로 자그레브로 이동한 포로들도 있었다. 자그레브 시내 전환수용소는 많은 수용자를 수용하기에 부적합했으며, 일부 포로들은 수용소 마당에 놓였고, 그 주변에는 음식이나 친척을 찾는 시민들도 모였다. 주요 수용소 중 하나인 프레초에서는 음식이 제공되었지만 불규칙했고 약 50명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했다. 당시 정보기관 최고 책임자 알렉산다르 란코비치가 자그레브 처형 속도에 불만을 표하며 크로아티아 지부 정보국에게 더욱 단호한 조치를 요청했고, 이어서 1945년 6월과 7월 자그레브 시민의 다수 체포가 이루어졌다.
또한 5월 24일에는 오스트리아 빅트링 수용소에서 슬로베니아 향토방위군 및 민간인에 대한 환송이 시작되었으며, 약 1만1천 명의 슬로베니아 향토방위군과 600여 명의 민간인이 두 방향으로 이송되었다. 일부는 크란, 쉬코프야 로카 혹은 셴트비드 수용소로, 또 일부는 체례 인근의 테하르예 수용소로 이동되었다. 이들은 이송 중 구타당했고 다수가 도중에 살해되었다. 셴트비드 수용소 출신은 코체브스키 로그 학살지대로 넘겨졌으며, 테하르예 수용소 출신은 그 주변 동굴과 광산에서 처형되었다. 테하르예로 이송된 약 5천 명 중 거의 전원이 1945년 8월까지 사망했다. 또 류블랴나 인근 포두틱에서는 약 800명의 슬로베니아 홈가드 및 민간인이 처형되었다. 이들 시신의 부패가 수도 루블랴나의 식수원을 오염시켜 독일 포로들이 시신을 새 매장지로 이동시키는 조치가 취해졌다.
유고슬라비아 정보국은 슬로베니아·오스트리아 국경 일대에서의 포로 행렬 이동이 6월 8일까지 주로 완료되었다고 보고했으며, 영구수용소가 설치된 지역으로 대부분 행렬이 도착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총 175,922명의 포로가 있었다. 6월 25일에는 유고슬라비아 부총리 에드바르드 카르델리가 슬로베니아 수상 보리스 키드리치에게 조속한 처형 진행을 촉구하는 공식 전보를 보냈다. 8월 3일에는 체트니크, 세르비아국가수비대,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향토방위군, 알바니아 및 무슬림 민병대를 대상으로 일반 사면 및 용서 법령이 채택되었고, 1946년 2월 보고서에 따르면 41,320명의 포로가 이 조치에 따라 사면을 받았다. 이후 1946년 3월 2일 유고슬라비아군 총사령부는 형사절차가 진행된 자들을 제외한 적성 군대 구성원에 속한 모든 유고슬라비아 국적자의 석방을 명령했다. 그러나 수용소 및 강제노역 캠프는 이후 수년간 계속 운영되었으며, 전쟁 종말 후 시작된 숙청은 195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다.
[1] 전쟁 전 크로아티아에 살던 유대인 79%가 학살당했고, 세르비아인은 약 32만 2천 명이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