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2-03 22:45:03

브와디스와프 슈필만

<colbgcolor=#000><colcolor=#fff> 브와디스와프 슈필만
Władysław Szpilman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W%C5%82adys%C5%82aw_Szpilman.jpg
출생 1911년 12월 5일
폴란드 입헌왕국 소스노비에츠
사망 2000년 7월 6일 (향년 88세)
폴란드 바르샤바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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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피아니스트
활동 기간 1930년 ~ 2000년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 및 음악 활동2.2. 2차 세계대전과 바르샤바 게토2.3. 은신과 생존2.4. 전후와 활동
3. 기타


1. 개요

폴란드유대계 피아니스트. 소스노비에츠 출신으로, 바르샤바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배웠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바르샤바 게토에서 겪은 참혹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자서전 『도시의 죽음(Śmierć Miasta)』은 로만 폴란스키 감독에 의해 영화 피아니스트로 만들어지면서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및 음악 활동

1911년 폴란드 소스노비에츠에서 태어난 슈필만은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에 재능을 보였다. 바르샤바 음악원에서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우며 전문 음악인의 길을 걸었고, 1935년에는 폴란드 공영 라디오 방송국에서 클래식과 재즈 피아노곡을 연주하며 인기를 얻었다.

2.2. 2차 세계대전과 바르샤바 게토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 슈필만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바르샤바 게토로 강제 이주되었다. 게토 내에서도 피아노를 연주하며 생계를 유지했지만, 나치의 학살 위협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1942년 게토 봉쇄 작전 당시 가족과 함께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로 이송될 위기에 처했으나, 한 유대인 경찰이 그를 알아보고는 그를 빼돌려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의 가족은 절멸수용소로 끌려가서 살아남지 못했다.

2.3. 은신과 생존

탈출 후에는 바르샤바의 게토 속에서 숨어 지냈고, 바르샤바 게토 봉기를 위해 무기를 조달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43년 2월에 유대인 절멸을 위해 바르샤바 게토에 SS가 진입했고, 유대인들이 이에 저항하면서 일어난 혼란 틈에서 게토를 빠져나가는 데 성공했다.

그 뒤로 슈필만은 폐허가 된 바르샤바에서 음식을 구하고 숨을 곳을 찾으며 극한의 상황을 버텨냈다. 그는 피아니스트로써 당시에도 명성이 있어서 때로는 친절한 폴란드인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언제나 체포될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가끔 그를 보호하겠다면서 나서고는 식량을 제대로 제공하지도 않고 몰래 돈을 훔쳐가는 질나쁜 인물들도 있었다고 한다.

1944년 11월에는 식량을 구하러 밖에 나갔다가 폴란드에 파견된 독일군 장교 빌헬름 호젠펠트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러나 호젠펠트는 내심 나치즘홀로코스트에 비판적이어서 오히려 그를 보호해주었다. 그와 호젠필트가 교류한 시간은 고작 1개월에 불과했지만, 호젠필트는 그에게 은신처와 식량을 공급하고, 독일의 패퇴를 알리는 신문지를 그에게 줄 빵에 싸는 식으로 희망을 주기도 했다.

12월에 호젠필트는 바르샤바에 밀려들어오는 소련군을 피해 후퇴하면서 슈필만과 이별하였다. 호젠필트는 그에게 몇날며칠을 버틸 식량과 모포, 자신의 독일군 코트를 건네주었다. 슈필만은 그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고 어려울 때 자신을 찾아오라고 말했다.

2.4. 전후와 활동

1945년 1월 소련군이 바르샤바를 점령함으로써 슈필만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후 직장 동료로부터 소련군에 포로로 잡혀간 호젠필트가 거리에서 자신의 이름을 외치며 구명을 요청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자리로 찾아갔으나, 그는 이미 소련군에 끌려가 사라진 뒤였다.

슈필만은 살아남아 다시 피아노 연주자로 활동하며 전쟁의 상처를 치유했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자서전 『도시의 죽음』은 1946년에 출판되었고 1948년에 폴란드에서 영화화되었으나, 영화는 평가가 좋지 못해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1950년에는 18세 연하의 의대생과 재혼하였고, 둘 사이에서 2명의 자녀를 두게 되었다.

1951년에는 호젠필트의 아내로부터 남편의 구명을 요청하는 편지를 받았는데, 그는 그제서야 자신을 구한 독일군 장교의 이름이 빌헬름 호젠필트임을 알았다. 그는 폴란드 통일 노동자당을 통해 소련에 호젠필트의 행방을 물었으나, 소련은 그런 인물은 모른다는 답을 전해줄 뿐이었다. 결국 호젠필트는 다시 독일 땅을 밟지 못하고 죽었으나, 슈필만과 호젠필트 가족의 교류는 그 뒤로도 계속되었다.

2002년에 그의 자서전이 로만 폴란스키 감독에 의해 영화 『피아니스트』로 재탄생하면서 슈필만의 이야기는 전 세계에 알려졌고, 그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를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3. 기타

  • 영화 『피아니스트』: 2002년 개봉한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는 슈필만의 자서전을 바탕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7개 부문을 수상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고,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며 전 세계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해당 작품에서 슈필만을 연기한 에이드리언 브로디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으며, 수상 당시 29세로 역대 최연소였다.
  • 슈필만은 뛰어난 피아니스트였을 뿐만 아니라 작곡가이기도 했다. 그의 음악은 주로 폴란드 민요와 유대인 음악을 바탕으로 하며, 전쟁의 아픔과 희망을 담고 있다.
  • 슈필만의 녹턴. 실제 역사에서 슈필만이 호젠펠트를 처음 만났을 때 연주했던 곡이라고 알려진 프레데리크 쇼팽의 녹턴 c# minor (B. 49; WN 37). 이 영상은 1997년 슈필만의 자택에서 그의 연주를 녹음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영화에서는 같은 작곡가의 발라드 1번(Op. 23)을 연주했다는 설정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