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屛虎是非1620년(광해군 12) 이후 지금의 안동시를 중심으로 한 영남 남인 유생들이 전개한 분쟁[1]으로 퇴계 이황 이후 영남 남인의 서열을 두고 안동의 대표적 집안인 의성 김씨 문중과 풍산 류씨 문중은 물론 이들을 지지하는 유생들끼리 대립하게 되는 사건이다.
참고로 '병'은 류성룡을 배향한 병산서원(屛山書院)을 가리키고, '호'는 김성일을 배향한 호계서원(虎溪書院)을 가리킨다.
2. 발단과 배경
이 논쟁의 시작은 1573년(선조 6) 이황이 죽은 후 그를 기리기 위해 지역 사림들이 '월곡면 도곡동'이란 곳[2]에 '여강서원(廬江書院)'을 세운 것부터 시작한다. 물론 이 때는 류성룡과 김성일 두 사람 모두 생존했기에 해당 서원에 이황을 배향하는 건 문제가 없었지만, 두 사람이 죽고 난 이후 해당 서원에 배향을 할 때, "누구의 위패를 이황의 왼편에 모셔야 하는가?"를 두고, 이후 계속 논란을 불러 일으킨 것이다.보통 사람들은 "누구를 놓든 무슨 차이가 있는가?" 하겠지만, 유림에서는 '위계질서'에 관한 중요 사안이었다. 병호시비는 이 무렵 문묘에 배향되었고, 영남 유림들의 상징적인 존재였던 이황의 다음 서열, 즉 '퇴계의 수제자'가 누구인지를 정하는 것이었다.
류성룡과 김성일은 모두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했던 제자 출신으로 나이는 김성일이 위이고, 관직은 류성룡이 위였다.[3] 그런데 당시 유림들의 여론상 김성일이 존경받고 있었기에 관직만으로는 뜻을 관철시키기 어려웠고, 이는 갈등이 현재까지 장기화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게다가 이인좌의 난 이후 영남 남인 세력들 대부분이 관직에 진출할 길이 막히고 신분제가 붕괴되면서 자신의 양반 지위를 확고하게 유지하고 지역을 장악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한 측면도 있었다.
3. 전개
3.1. 조선시대
이 때문에 조정에서는 당시 영남 유림의 원로였던 상주 출신인 정경세(鄭經世, 1563~1633)[4]에게 자문을 구해 류성룡를 이황의 왼쪽, 김성일을 오른쪽에 배향하기로 결정했다.조정의 결정은 유교 예법에서 소목법(昭穆法)이라 불리는 예규를 따랐다. 소목법에서는 가장 높은 신위를 가운데 둔다. 사당에서 가장 높은 신위가 있는 방향을 서쪽, 신위를 마주보는 사람이 있는 방위를 동쪽이라고 가정한다. 소목법에서는 가장 높은 신위의 앞으로 서로 마주보도록 두 줄로 배열하는데, 이중 북쪽, 그러니까 신위의 입장에서는 왼쪽 줄을 소(昭), 남쪽에서 마주보는 줄을 목(穆)이라고 부른다. 북쪽에 있는 소가 남쪽에 있는 목보다 상급이다. 그래서 소목의 위계순서는 소1⇒목1⇒소2⇒목2 순으로 진행된다. 소목법을 따르면서도 위패를 일렬로 배열하기도 하는데, 이런 경우에도 가장 높은 신위를 가운데에 두고 위패 입장에서 왼쪽 줄을 소(昭), 오른쪽 줄을 목(穆)이라고 보아서 소1⇒목1⇒소2⇒목2 순으로 진행한다.[5]
조정의 결정대로라면 류성룡이 소1, 김성일이 목1이 되는데, 류성룡이 김성일보다 윗자리에 앉는 것이다.
당연히 이런 결정을 두고 김성일의 문중과 지지하는 유림들이 반발하여 일이 더욱 커졌다. 이후로도 비슷한 일이 3번씩이나 있었다.
게다가 정조 말에는 이들 두 사람에 정구(鄭逑, 1543~1620)와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을 문묘에 배향해달라는 상소를 올리다가 '누굴 앞 자리에 올리느냐'를 두고 또 다투다가 따로 상소를 냈는데 조정에서는 전부 기각했고, 이에 반발한 정구와 장현광의 문인들이 두 사람의 위패를 대구로 옮기자 안동의 유림들이 반발하는 글을 짓기까지 했다.[6]
급기야 고종 대에 남인의 지지를 받으려던 흥선대원군이 중재에 나서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실패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서 찾을 수 없지만, 당시 흥선대원군이 안동부사에게 시켜 호계서원에서 중재를 시도했을 때 참가한 인원만 '호파' 600명, '병파' 400명이었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화해가 쉽게 되겠는가?
아무튼 이 일로 인해서 영남 남인 유생들은 각각 류성룡을 지지하는 '병파'와 김성일을 지지하는 '호파'로 나누어졌다. 양 쪽 문중과 혼인관계를 맺던 영남 내 다른 가문들은 물론 심지어 두 사람의 스승인 이황의 진성 이씨 문중마저도 둘로 나눠[7]질 정도였다.
그리고 이런 대립은 결국 '호계서원'[8]에 있던 이황의 위패가 도산서원, 류성룡의 위패는 병산서원, 김성일의 위패는 임천서원으로 옮기면서 호계서원은 그야말로 빈 껍데기가 되었고, 결국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인해 훼철되어 강당만 남았다.[9]
3.2. 대한민국
이후 강당만 남은 채 해방이후에도 보존해 온 호계서원은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해당 위치가 수몰되자 1973년 임하면 임하리로 이전했지만, 이후 임하댐이 건설되고 여수로까지 설치되면서 훼손 우려가 커지자 2013년부터 2020년까지 기존 위치에서 한국국학진흥원이 있는 예안면 서부리로 복원 이설하였다.(관련 기사 1, 관련 기사 2) 류성룡의 풍산 류씨 문중과 김성일의 의성 김씨 문중이 합의해 퇴계를 중심으로 류성룡을 왼쪽, 김성일을 오른쪽으로 하는 대신 김성일 옆에 그의 학맥을 이은 '소퇴계' 이상정(李象靖, 1711-1781)[10]을 함께 놓기로 하면서 일단락되는 듯 했지만...이를 두고 예안향교 유림들이 "이미 도산서원과 예안향교에 이황의 위패가 있는데, 국가 예산을 들여 새로 복원한 호계서원에까지 이황의 위패를 모신다는 건 오히려 이황의 위상을 떨어트리는 처사."라면서 서원 앞에서 시위를 벌여 경찰까지 출동하였고, 이에 반대하는 유림들도 있어서 법정 공방까지 벌어질 가능성과 우려가 높아진 상황이다.(관련 기사 1, 관련 기사 2, 관련 기사 3)
4. 결과
결국 이러한 소모전이 진행되던 와중에 이황의 후손들이 2021년 9월 30일, 호계서원에서 이황의 위패를 모셔 나가는 '소송'(燒送)[11]에 나섰다. "이황의 위패를 빌미로 벌어지는 유림들 사이의 논쟁과 분열을 더 이상 두고 볼 수는 없었다."는 게 이유였으며, 얼마나 충격적이었던지 전국 뉴스는 물론 대형 포털의 메인 기사에도 실리게 되었다.(관련 기사 1, 관련 기사 2)물론 이황의 위패만 나갔을 뿐 다른 3인의 위패는 아직 서원 안에 남아있어서 지금도 다른 단체들의 고소나 고발이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황의 위패를 호계서원의 동의 없이 내보냈다는 점까지 소송에 휩싸였다.(관련 기사 1, 관련 기사 2)
5. 평가와 반응
병호시비는 단순한 문중 간의 대립이 아니라 '김성일'과 '류성룡'의 학풍을 이어받은 이들의 자존심 대립이기도 하였고, 더 나아가 상술했듯이 이인좌의 난 이후 중앙 진출을 하지 못한[12] 영남 남인의 '마지막 자존심'이라 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하지만 정작 류성룡과 김성일 두 사람은 생전에 어디까지나 서로를 동문으로서 존중해 주었을 뿐, 스스로를 상대보다 높이려고 한 적은 없었다. 냉정하게 따지면, 무리하게 자신들의 조상을 높이려는 후손들의 과욕이었던 것이다.[13]
이 때문에 이 시비를 바라보는 대중들의 반응은 당연하게도 매우 싸늘하다. 21세기인 현대에 옛 위인의 위패를 모시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유림들끼리 분쟁이 일어난 모습은 다분히 구시대적으로 보인다는 게 첫 번째고, 두 번째는 이 논쟁이 벌어진 복원된 호계서원이 지자체 예산 수십억 원(이전 15억, 복원 50억)으로 복원한 '유형문화재'이기 때문이다.(관련 기사 1, 관련 기사 2, 관련 기사 3)
6. 참고 자료
[1] 시골에서 일어난 일이라 '향전(鄕戰)'이라고도 한다.[2] 해당 행정구역을 찾기가 쉽지 않는데, 1980년대까지 경상북도에서는 리를 '동'이라 불렸다. 그리고 월곡면은 여기에 적어놓긴 했지만, 안동댐 건설로 지역 대부분이 수몰되어 1974년 폐지되어 그 영역이 현 안동시 와룡면과 예안면, 임동면, 임하면으로 들어갔다. 이 중 도곡동은 와룡면으로 들어가 현재 행정구역은 '안동시 와룡면 도곡리'에 해당한다.[3] 1538년생인 김성일은 최종 관직이 종2품 경상도 관찰사였고, 1542년생인 류성룡은 최종 관직이 정1품 영의정이었다.[4] 송준길의 장인이다. 이는 상대적으로 송준길이 남인에게 우호적인 스탠스를 취하는 이유가 되었다.[5] 소목법 아닌 다른 예법은 좌상법(左上法), 또는 서상법(西上法)이라 불리는 것이다. 위패 있는 자리를 북쪽, 참배하는 사람 자리를 남쪽으로 가정한 뒤, 바라보는 사람 입장에서 왼쪽, 즉 서쪽으로 갈수록 위계가 높은 위패를 배치하는 것이다. 조선왕조의 종묘 또한 서상법에 따라 위패를 일렬로 배열하였다.[6] 심지어 그때도 또 '누굴 앞 자리에 올리느냐'를 두고 또 다투었다.정말 징글징글하다[7] 진성 이씨 종파와 원촌파는 '병파', 하계파는 '호파'를 지지했다.[8] 위에 상술된 '여강서원'이 1676년(숙종 2)에 '호계서원'이란 이름으로 사액을 받은 것이다.(관련 실록 기사)[9] 임천서원도 이 때 같이 훼철되었다가 이후 복구되었다.[10] 이상정은 고려 말 성리학자였던 목은 이색의 15세손으로 그의 집안은 류성룡의 사위인 이문영(이상정의 고조부) 때 안동에 정착해 김성일, 갈암 이현일, 밀암 이재 등 주요 가문과 죄다 인척 관계를 맺었다.[11] 사당에 모셔진 위패를 밖으로 모신 다음, 정갈한 자리에서 불태운 뒤 땅에 묻는 절차.[12] 물론 흥선대원군 때, 류성룡의 후손인 류후조를 기용해 좌의정까지 지낸 바가 있다.[13] 조선 후기에 남발된 서원이나 사우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권력 진출이 서울의 소수 가문에게만 열려진 상황이라 지방의 양반들은 자신들의 존재감을 알리기 위해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서원과 사우 건립을 주도적으로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