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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로렌초 베르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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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잔 로렌초 베르니니
Gian Lorenzo Bernini
파일:787px-Gian_Lorenzo_Bernini,_self-portrait,_c1623.jpg
본명 잔 로렌초 베르니니
Gian Lorenzo Bernini
출생 1598년 12월 7일
나폴리 왕국 나폴리
사망 1680년 11월 28일 (향년 81세)
교황령 로마
직업 조각가, 건축가
사조 바로크
종교 가톨릭

1. 개요2. 생애3. 작품
3.1. 조각
3.1.1. 성녀 테레사의 법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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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조각가이자 건축가. 17세기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이탈리아 예술계의 거장으로 수많은 명작들을 남겼다. 대표작으로는 '페르세포네의 납치', '아폴로와 다프네', '성녀 테레사의 법열' 등이 있다.

2. 생애

베르니니는 1598년 12월 7일 나폴리에서 피렌체 출신의 이름없는 조각가 피에트로 베르니니의 13남매 중 6남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예술적 천재성을 드러낸 베르니니는 아버지의 전폭적인 예술, 조각 교육을 받았고 1606년에 아버지 피에트로가 교황청에 고용되자[1] 아버지를 따라 로마로 향했고 그 곳에서 아버지와 함께 수많은 작품들을 만들었다. 이당시 이미 천재라고 동네방네 소문이 나있었던 베르니니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바오로 5세의 조카 스키피오네 보르게세 추기경의 관심을 끌었다.

베르니니의 천재성을 확인한 스키피오네 보르게세 추기경은 삼촌 바오로 5세에게 베르니니를 추천했고, 안그래도 로마에 소문이 자자하던 베르니니의 실력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했던 바오로 5세는 직접 베르니니를 교황청으로 불러 그의 실력을 시험했다. 베르니니는 성 바오로의 스케치를 훌륭하게 그려내면서 교황에게 실력을 인정받았고[2] 곧 교황 직속 예술가로 고용된다.

이후 베르니니는 거의 로마에만 머물면서 주로 종교적인 작품들이나 최대 후원자인 보르게세 추기경의 의뢰품들을 제작하며 살았다. 그가 처음으로 혼자 제작한 석상이 바로 '아기 제우스와 어린 사티로스에게 젖을 먹이는 염소 아말테아'. 보르게세 추기경의 빌라를 꾸미기 위해 만든 석상이었다. 베르니니는 1619년과 1622년 사이에 역사에 남을만한 작품들을 쏟아냈는데 가장 대표적인 4개만 뽑아보자면 '아이네아스, 안키세스, 아스카니우스', '페르세포네의 납치', '아폴로와 다프네', '다비드' 상 등이 있다. 베르니니의 역작들이 대부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봐도 된다. 베르니니는 이 작품들로 르네상스 시대의 사실적인 묘사를 이어받아 바로크 특유의 극적이고 역동적인 분위기를 더해 서양 조각사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극찬을 받았다.[3]

1621년 바오로 5세가 사망하고 즉위한 후임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우르바노 8세 모두가 베르니니에게 대단히 호의적이었다. 덕분에 베르니니는 죽을 때까지 교황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작품들을 마음껏 제작할 수 있었는데, 우르바노 8세 시절에는 교황의 의뢰를 받아 단순히 조각 뿐만 아니라 로마 시내의 도시 계획까지 전담하는 영광을 누렸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나보나 광장의 분수와 성 베드로 성당, 산탄젤로 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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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탄젤로 다리 성 베드로 성당의 '발다키노'
특히 성 베드로 성당의 경우 150여 년에 걸친 대공사 끝에 바오로 5세 시절에 공사가 완공되었고 우르바노 8세가 1626년에 축성을 했는데, 당시 로마 최고의 예술가로 꼽히던 베르니니가 큐폴라의 기둥들을 장식하고 발다키노[4]를 세우는 등 마지막 손질 작업을 좀 했다. 특히 이 발다키노가 제일 핵심인데, 땅속 깊은 곳 묻힌 베드로의 무덤이 있는 지면 바로 위에 세워진 거대한 청동 조각으로 그당시에는 키메라를 닮았다고 비판받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상징하는 아름다운 예술작품으로 남았다.

이렇게 베르니니는 교황의 비호를 받으며 잘나가는 듯 했지만.... 우르바노 8세 사망 후 새로 즉위한 인노첸시오 10세가 등장하면서 상황이 약간 안좋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인노첸시오 10세는 베르니니를 후원하던 바르바리니 가문과 적대적이었고 베르니니도 고깝게 여겼다. 게다가 베르니니가 주도하던 성 베드로 성당의 종탑 건설 도중 성당 파사드에 큰 균열이 가면서 베르니니는 생애 최악의 커리어 위기를 맞았다. 베르니니는 우르바노 8세 시절부터 종탑 2개를 개축하고 있었는데, 우르바노 8세가 죽고 인노첸시오 10세가 즉위한 이후에 공사 도중 파사드에 균열이 가버렸던 것. 당연히 프란체스코 보로미니 등 베르니니의 경쟁자들은 베르니니를 맹비난했고 베르니니는 명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채 엄청난 양의 벌금을 물어야만 했다.[5]

다만 아무리 인노첸시오 10세가 베르니니를 영 고깝게 여겼어도 베르니니가 교황청에서 쫒겨나는 일은 없었다. 워낙에 베르니니의 실력이 출중했을 뿐더러 로마와 바티칸에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작품이 없었을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베르니니는 인노첸시오 10세 아래에서도 수많은 작품들을 제작했고 여전히 교황 전속 예술가로 왕성히 활동했다. 특히 1651년에는 그 유명한 나보나 광장의 '4대강의 분수'를 제작하면서 종탑 사건으로 입었던 커리어 타격을 완전히 씻는데 성공했다. 4대강의 분수를 제작한 후에도 여러 예배당들을 설계하면서 예술가로서 전성기를 달렸고, '성 테레사의 법열'을 조각한 것도 이 시기다. 다만 성 테레사의 법열 조각을 만들었을 때 지나치게 성녀를 성적으로 묘사한 게 아니냐는 의혹 때문에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유는 작품이 성령을 접하고 황홀에 찬 성녀의 모습을 묘사했다지만 아무리 봐도 성적 흥분의 절정에 다다른 여인을 묘사한 것 같아서(...).

인노첸시오 10세의 후임 교황 알렉산데르 7세는 전임자보다는 베르니니에게 호의적이었다. 로마를 웅장한 세계의 수도로 만들고 싶어했던 알렉산데르 7세는 베르니니에게 엄청난 양의 도심 재개발 작업을 맡겼다. 독특한 열쇠 모양으로 유명한 성 베드로 성당의 광장을 이때 디자인했고 바티칸과 로마 곳곳에 크고 작은 건축물들을 짓기도 했다. 이때 전까지만 해도 성 베드로 성당 앞은 불규칙한 모양의 혼잡하고 난잡한 모습의 광장이었지만 아예 열주 회랑을 세워서 탁트인 모습의 아름다운 광장을 만들어냈던 것. 교황 알렉산데르 7세 역시 대만족했고 베르니니의 명성은 덕분에 한층 더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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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聖) 테레사의 법열 나보나 광장의 '4대강의 분수' 성 베드로 광장
베르니니의 명성이 하도 높았던 덕에 교황 뿐만 아니라 유럽 왕가도 베르니니에게 예술품들을 의뢰하는 경우가 많았다. 보통은 교황에게 서한을 보내 위임하는 형식으로 베르니니에게 작품을 맡겼지만 아예 제 궁정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당시 절대 왕정을 구가하던 프랑스 왕국루이 14세는 직접 베르니니를 파리로 불러 루브르 궁전의 설계를 맡겼다. 처음에는 그가 파리 시내를 거닐 때마다 군중들이 몰려들 정도로 인기가 많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취향 차이 때문에 베르니니와 루이 14세 사이의 갈등이 일어나면서 관계가 틀어지고야 말았다. 루이 14세와 그의 신하들이 베르니니의 설계안을 지나치게 바로크적이고 이탈리아스럽다고 여겼기 때문. 결국 베르니니는 루이 14세와 관계가 악화된 채로 별다른 업적도 남기지 못한 채 로마로 돌아왔다. 그나마 그가 남긴 루이 14세의 대리석 흉상이 파리에서 남긴 유일한 작품으로 꼽힌다.[6]

로마로 돌아온 베르니니는 뇌졸중으로 사망하기 2주 전까지만 해도 활발하게 활동하며 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다만 그의 오랜 친구였던 클레멘스 9세의 재위기는 지나치게 짧았고, 그의 뒤를 이은 클레멘스 10세인노첸시오 11세는 바티칸의 쪼들리는 예산을 돌보느라 베르니니에게 많은 예산을 할당해줄 여유도 의지도 없었다. 그나마 인노첸시오 11세의 의뢰를 받아 마지막 2년 동안 팔라초 델라 칸셀레리아 궁전의 개보수 작업을 할 수 있었는데, 궁전의 중요성과 노후화 정도를 고려하면 고령의 베르니니가 이런 중요한 의뢰를 맡을 수 있을 정도로 상당한 권위가 있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베르니니는 팔라초 델라 칸셀레리아 궁전 개보수 작업을 완료한 직후인 1680년 11월 28일 뇌졸중으로 그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안타깝게도 유해는 공개적인 장례식 없이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에 있는 그의 가족묘에 조용히 안장되었다. 정교한 기념비를 그의 묘소 위에 세워주자는 계획도 있었지만 실제로 만들어지지는 못했다. 그의 묘지는 생전의 명성에 비하면 상당히 초라했는데, 심지어 1898년까지도 그의 묘소 위에 딱히 특별한 기념물이나 비석을 세워주지도 않았을 정도였다. 그나마 1898년 베르니니의 기일에 작게나마 대리석 명판을 깎아서 묘지 위에 얹어줬다고 한다.

3. 작품

3.1. 조각

3.1.1. 성녀 테레사의 법열

파일:성데레사의법렬1.png파일:img-santa-Teresa-di-Bernini.jpg
성녀 테레사의 법열 논란이 된 성녀의 표정
나는 그의 손에 금으로 된 긴 창이 들린 것을 보았습니다. 그 창의 끝에는 작은 불꽃이 타오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가 그 창을 내 심장에 여러 차례 찔러넣었고, 마치 내 안까지 관통하는 듯 했습니다... 그가 그 창을 빼내었을 때 그 것 역시 내 안에서 빠져나왔으니... 내 안에는 위대한 신의 사랑이 불같이 가득하였습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나를 신음하게 만들었지만... 그를 능가하는 쾌락이 나를 덮쳤기에 감히 이 고통이 끝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내 영혼은 하느님 외에는 그 아무 것에도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내 고통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었지만 육체도 그 몫을 가졌습니다. 이 것이 내 영혼과 하느님 사이에서 일어나는 너무나도 달콤한 사랑의 애무였습니다. 내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 것을 경험할 수 있기를 선하신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성녀 테레사의 기록.
명실상부한 베르니니의 최고 대표작. 스페인의 수녀이자 성녀로 추앙된 아빌라의 테레사하느님의 환시를 보고 신비롭고 정신적인 희열을 느끼는 모습을 그대로 묘사했다. 로마 바로크 작품의 걸작으로 여겨지며 현재는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에 전시되어 있다. 베르니니는 성적 오르가즘을 체험한 여성의 무아경을 통해 종교적 신비경을 표현했는데, 종교적으로 겪는 희열의 순간이 세속의 절정과 다르지 않다는 형상을 통해 베르니니는 정신과 육체, 영혼이 하나 되는 완전에 이르는 경지를 보여준다.




[1] 주 업무는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의 벽화 제작이었다.[2] 일설에 의하면 그의 실력에 놀란 교황은 '이가 우리 시대의 미켈란젤로가 될 것이다'라고 찬탄했다고.[3] 베르니니가 조각한 작품들을 보면 하나같이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은 생생한 분위기가 특징이다. 베르니니의 다비드 상과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을 비교해보면 그게 더 확실히 드러난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은 정적으로 돌팔매를 들고 서있는 자세라면 베르니니의 다비드 상은 막 골리앗과 싸우고 있는 자세를 묘사했다.[4] '천개'라고도 한다.[5] 사실 후대에 알고보니 이 균열은 베르니니의 탓이 아니었다. 수십 년 전에 성당의 파사드를 설계했던 카를로 마데르노의 설계 자체에 결함이 있었던 것. 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과학적 사실이 확인될 리가 없었고 결국 책임은 모조리 베르니니에게 돌아갔다.[6] 그 외에도 베르니니는 로마로 돌아와 루이 14세의 대리석 승마상을 깎은 뒤 나중에 파리로 보냈다. 하지만 루이 14세는 베르니니가 만든 승마상을 극도로 싫어했고 결국 얼굴을 바꾸어 고대 로마의 영웅 마르쿠스 쿠르티우스의 승마상으로 만들어버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