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前 축구선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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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베니 뮐러 Bennie Muller |
본명 | 베르나르뒤스 뮐러 Bernardus Muller |
출생 | 1938년 8월 14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
사망 | 2024년 1월 17일 (향년 85세)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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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키 168cm | 체중 68kg |
포지션 | 미드필더 |
소속팀 | AFC 아약스 (1958~1970) 홀란드 스포르트 (1970~1971) 블라우 위트 (1971~1972) |
국가대표 | 43경기 2골 (네덜란드 / 1960~1968) |
가족 | 아들 다니 뮐러[1] |
1. 개요
네덜란드의 前 축구선수.2. 선수 경력
뮐러는 1958년 MVV 마스트리흐트와의 원정 경기에서 데뷔했다. 그는 뛰어난 시야와 정교한 테크닉을 갖춘 빼어난 미드필더로 성장했다. 이러한 자질과 뛰어난 킥 능력 덕분에 그는 1960년대 AFC 아약스에 매우 중요한 선수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그의 첫 번째 영광의 순간은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을 승점 3점 차이로 제치고 에레디비시 우승을 차지하고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에 발탁된 1960년이었다. 뮐러는 이후 총 8년간 네덜란드 대표팀의 주전 선수로 활약했고 43경기에 출전했는데 이는 60년대 아약스 소속 선수 중 최다 출전 기록이다.
1962년 뮐러는 팀의 주포인 헹크 흐루트(Henk Groot)를 지원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1골 3도움을 기록했고 클럽 역사상 최초의 유럽 트로피인 UEFA 인터토토컵을 들어올리는데 크게 공헌했다.
1960년대 중반 리누스 미헬스와 요한 크루이프의 합류 후 아약스는 네덜란드 최고의 클럽으로 발돋움했고 뮐러는 에레디비시 우승 4회, KNVB 베이커 우승 2회를 추가로 달성했다.
리누스 미헬스 감독의 지휘 아래에서 아약스는 네덜란드 최강을 넘어 점점 세계 최강에 가까운 클럽으로 성장했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선수들이 물갈이됐지만 뮐러는 1960년대 후반까지 요한 크루이프, 스야크 스바르트 등과 함께 팀의 핵심 자원으로 활약하며 1966-67시즌 유러피언컵 8강과 1968-69시즌 유러피언컵 준우승에 기여했다.
하지만 클럽이 성장하는 동안 뮐러는 늙어가고 있었다. 그는 헹크 흐루트, 스야크 스바르트, 피트 케이저르, 요한 크루이프 등과 함께 아약스가 유럽과 세계 최강의 클럽으로 성장하는데 초석을 다졌지만 1969년 AC 밀란과의 유로피언컵 결승전 패배 후 젊은 재능들에게 자리를 내줬다.
뮐러는 밀란과의 결승전 이후 리누스 미헬스 감독에게 주전 자리를 약속받았지만 미헬스 감독은 다음 시즌 뮐러에게 아무런 설명도 없이 마음을 바꿨고 1969-1970시즌 뮐러는 단 17경기만 출전하는데 그쳤다.[2]
이에 뮐러는 큰 실망을 안고 1970년 홀란드 스포르트로 이적했다. 그는 팀을 떠난 후 몇 년 동안 아약스가 세계 정상에 오르는 모습을 지켜봤다. 이는 오랜 세월 동안 클럽에 모든 것을 바친 선수에게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현실이었다.
3. 우승
- AFC 아약스
- 에레디비시: 1959-60, 1965-66, 1966-67, 1968-69, 1969-70
- KNVB 베이커: 1960-61, 1966-67
- UEFA 인터토토컵: 1961-62
[1] FC 바르셀로나 B와 AFC 아약스에서 뛰었던 축구선수이다[2] 이 때문에 이후 10년 넘도록 리누스 미헬스 감독과 연락을 끊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