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1-05 00:59:25

베네수엘라 독립 전쟁


{{{#!wiki style="margin:-10px"<tablebordercolor=#F9C802><tablebgcolor=#F9C802> 파일:볼리바르 투명.png시몬 볼리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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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C802,#2d2f34><colcolor=#fff> 일생 생애
활동 베네수엘라 독립 전쟁 · 누에바그라나다 독립 전투 · 보야카 전투
사상 볼리바르주의
장소 시몬 볼리바르 국제공항
기타 시몬 볼리바르 교향악단 · 그란 콜롬비아 · 노예해방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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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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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식민지시대 베네수엘라 독립 전쟁 근대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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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 독립 전쟁
Guerra de Independencia de Venezuela
Venezuelan War of Independence
스페인령 아메리카 독립 전쟁의 일부
시기
1810년 4월 19일 ~ 1823년 7월 24일
장소
<nopad> 누에바그라나다 부왕령
교전국
애국파:
1810년
파일:카라카스 군사 정부 국기.png 카라카스 군사 정부
1811년~1816년
파일:베네수엘라 제1공화국 국기(1811-1812).png 베네수엘라 제1공화국
파일:누에바그라나다 연합주 국기.png 누에바그라나다 연합주
파일:베네수엘라 제2공화국.png 베네수엘라 제2공화국
1816년~1819년
파일:베네수엘라 제3공화국 국기(1817-1819).png 베네수엘라 제3공화국
파일:아이티 제1공화국 국기.png 남아이티 공화국
1819년~1823년
파일:그란 콜롬비아 국기.svg 그란 콜롬비아
왕당파:
파일:스페인 국기(1785–1873, 1875–1931).svg 스페인 제국
지휘관
시몬 볼리바르
크리스토발 멘도사
프란시스코 에스페호
호세 안토니오 파에즈
안토니오 수크레
호세 펠릭스 리바스(사형)
라파엘 우르다네타
카를로스 수블레트
산티아고 마리뇨
후안 아리스멘디
호세 안소아테기
하신토 라라
호세 타데오 모나가스
그레고 맥그레거
대니얼 오리어리
페르난도 7세
페르난도 미야레스
도밍고 데 몬테베르데
에우제비오 안토냔자스
호세 카바요스
후안 바르가스(항복)
호세 토마스 보베스†
프란시스코 로세테
파블로 모리요
미겔 데 라 토레
프란시스코 모랄레스
이시드로 바라다 발데스
라몬 코레아
앙헬 라보르데
세바스티안 데 라 칼사다
결과
베네수엘라 및 누에바그라나다 독립

1. 개요2. 배경3. 경과
3.1. 베네수엘라 제1공화국 (1811~1812)3.2. 베네수엘라 제2공화국 (1813~1814)3.3. 스페인 제국의 탈환 (1815~1816)3.4. 교착 상태 (1816~1819)3.5. 누에바그라나다 독립 전투 (1819~1821)3.6. 카라보보 전투3.7. 마라카이보 호수 해전
4. 결과

1. 개요

스페인령 아메리카 독립 전쟁의 일부로 베네수엘라누에바그라나다 부왕령에서 벌어진 독립 전쟁.

2. 배경

18세기 내내 베네수엘라 주민들은 스페인 통치에 불만을 가졌다. 특히 크리오요들은 백인인데도 불구하고 라틴 아메리카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스페인 본토가 전쟁에 휘말리자 크리오요들은 카라카스에 모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새롭게 즉위한 호세 1세가 지명한 총독 비센테 엠파란을 거부하기 위해서 였다. 결국 비센테 엠페란은 스페인으로 돌아갔고, 같은 날, 1810년 4월 19일 법이 서명되어 그들은 호세 1세가 아닌 페르난도 7세를 섬긴다고 발표하였다. 그 후 통치 위원회를 설립해 외국 무역을 자유화하고, 노예 무역을 금지하고, 애국 협회[1]를 설립하였다. 이후 각지에 외교 사절단을 보내 반란을 지원할 수 있는 지 물어보았다. 카라카스 최고 군사위원회의 공식 목표는 프랑스의 침략 가능성으로부터 영토를 방어하는 것이었지만, 실질 목표는 베네수엘라를 완전히 독립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1811년 3월 2일, 카라카스 최고 훈타를 대체하는 베네수엘라 총회가 설립되었다. 같은 해 7월 5일, 총회는 대의원 과반수(단 한 명의 반대)로 베네수엘라의 독립을 선언하여 베네수엘라 제1공화국을 출범시켰다.

3. 경과

3.1. 베네수엘라 제1공화국 (1811~1812)

1810년 11월 의회가 회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군정을 지지하고 결국 독립을 이룬 사람들과 스페인과의 연합을 유지하려는 왕당파 사이 에 내전이 시작되었다. 마라카이보주와 과야나주라는 두 개의 주와 코로라는 한 지구는 카라카스 군정을 인정하지 않았고 스페인 정부에 충성을 유지했다. 1812년까지 상황은 신생 공화국에게 점점 더 악화되었다. 자금이 부족했고, 스페인은 베네수엘라 해안을 봉쇄하였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1812년 3월 26일 카라카스에 진도 7.7의 대규모 지진이 발생하였다. 이로인해 약 1만 5천 명에서 2만 명이 사망했고, 막대한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이러한 절박한 상황에서 미란다는 독재권을 부여받았지만, 왕당파의 기세를 막을 수가 없었다. 결국 라 빅토리아 전투에서 패배한 베네수엘라 독립군은 저항을 계속하는 것이 득보다 실이 더 클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결국 미란다는 몬테베르데와 협상에 들어갔고, 1812년 7월 25일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몬테베레트는 휴전 협정을 어기고 사면을 받았던 많은 독립 운동가들을 체포하여 감옥에서 죽게 만들었다.

3.2. 베네수엘라 제2공화국 (1813~1814)

시몬 볼리바르와 다른 공화주의자들은 스페인령 남미와 카리브해의 다른 지역에서 저항을 계속했거나, 나라 내부에서 게릴라 운동을 조직했다. 시몬 볼리바르와 호세 펠릭스 리바스 등은 누에바그라나다군에 편입되어 마그달레나 강 유역을 해방하고 오카냐를 점령함으로써 베네수엘라로 통하는 길을 열었다. 몬테베르데가 침공을 준비하자 누에바그라나다의 당국은 볼리바르에게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고, 1813년 2월 16일 리바스와 히라르도트가 이끄는 두 부대가 쿠쿠타로 향했다. 2월 28일 벌어진 쿠쿠타 전투에서 볼리바르는 승리하여 도시를 해방시켰고, 이후 카르타헤나 선언을 통해 공식 지원을 요청했다. 같은 해 5월 14일 그는 ‘경이로운 원정’이라 불리는 베네수엘라 진격을 시작해 산크리스토발, 메리다, 트루히요를 거쳐 8월 6일 카라카스에 입성했다. 6월 18일 아구아 데 오비스포 전투에서 아타나시오 히라르도트는 왕당파 마누엘 카냐스를 격파했고, 6월 15일 볼리바르는 트루히요에서 ‘사형 혹은 자유’를 내건 전쟁선언(사형령)을 발표했다. 7월 2일 리바스, 라파엘 우르다네타, 비센테 캄포 엘리아스가 이끄는 애국군은 니키타오 전투에서 왕당파를 대파했고, 7월 22일 리바스와 하신토 라라가 이끄는 애국군은 로스 오르코네스 전투에서 프란시스코 오베르토가 이끄는 스페인군을 격파하여 또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8월 2일, 볼리바르는 발렌시아에 입성했고, 리바스 대령은 산 카를로스 의 사령관으로 남았습니다. 며칠 후, 볼리바르는 4일 라 빅토리아에 도착하여 스페인 정부의 항복을 받아들였다. 마침내 1813년 8월 6일, 시몬 볼리바르 준장이 이끄는 소규모 군대가 카라카스에 당당히 입성했다. 그리고 볼리바르는 베네수엘라 제2공화국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베네수엘라의 완전한 해방은 아직 요원했다. 왕당파가 해안을 거점으로 농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당파의 가장 중요한 거점은 카라카스로부터 75km 떨어져 있는 푸에르토카베요였다. 8월 26일 볼리바르와 라파엘 우르다네타 지휘 아래 포위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볼리바르가 카라카스로 향하기보다 먼저 푸에르토카베요를 공격했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결국 그는 요새 수비대장 안토니오 수아솔라를 생포해 솔라노 요새에서 처형했다. 8월 31일 애국군 함대의 공격은 실패했고, 9월 13일 카를로스 미겔 살로몬 대령이 1,300명의 병력과 전함을 이끌고 라과이라에 도착했으나 카라카스가 이미 애국군 수중에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는 호세 펠릭스 리바스의 속임수로 거의 붙잡힐 뻔했지만 탈출해 다음 날 푸에르토카베요에 상륙했다. 볼리바르는 살로몬을 요새 밖으로 유인해 결전을 벌이기 위해 9월 17일 포위를 해제했고, 이는 성공하여 살로몬은 비히리마 전투에서 패배했다. 하지만 1814년에 벌어진 두 번째 푸에르토 카베요 포위전에서는 왕당파가 다시 승리했다. 왕당파가 승리하자 호세 토마스 보베스가 이끄는 평민 봉기가 일어나 공화국을 위협했다. 볼리바르와 리바스는 중앙을, 마리뇨는 동부를 방어했으나 1814년 보베스에게 패배해 공화파는 카라카스를 버리고 동부로 후퇴했다. 카루파노 항구에서 피아르가 저항을 이어갔지만 그는 볼리바르의 지휘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볼리바르는 1815년 다시 누에바그라나다로 망명했다. 이후 우리카 전투에서 보베스가 전사하자 프란시스코 토마스 모랄레스가 지휘권을 이어받아 리바스를 생포·처형하고 머리를 기름에 절여 카라카스로 보냈다. 결국 베네수엘라는 다시 왕당파 통치로 돌아가 제2공화국이 종말을 맞이했고, 이후 모리요가 베네수엘라에 도착해 모랄레스와 함께 작전을 개시했다.

3.3. 스페인 제국의 탈환 (1815~1816)

1814년 스페인 왕 페르난도 7세가 복위하자 스페인은 남미의 반란 식민지를 진압하기 위해 사상 최대 규모의 원정군 ‘코스타 피르메 원정군(약 1만 명, 함선 60척)’을 파견했다. 지휘관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활약한 파블로 모리요 장군이었으며 해군 지휘는 파스쿠알 엔릴레 제독이 맡았다. 1815년 2월 17일 카디스를 출항한 원정군은 4월 카루파노와 마르가리타섬에 상륙해 저항 없이 점령한 뒤 쿠마나와 카라카스에 진입했고, 일부 병력은 파나마로, 주력은 푸에르토카베요에서 누에바그라나다의 왕당파 거점인 산타마르타로 향했다. 7월 23일 산타마르타에 도착한 모리요는 식량과 지원병을 확보하고 최대 목표인 공화파 요새 카르타헤나 공략을 준비했다. 8월 중순 모리요는 1,000명의 선발대를 몬폭스로 진격시켰고, 동시에 세바스티안 데 라 칼사다 대령의 제5사단(2,100명)이 베네수엘라 동부에서 침공을 개시했다. 8월 중순부터 시작된 카르타헤나 포위전에서 4,000명의 수비군은 400문의 대포로 방어했으나 5개월간의 격전과 굶주림으로 참혹한 피해를 입었다. 모리요군도 열대병과 장비 손실로 고통받았고, 12월 초 항복을 요구했으나 수비 측은 항복 대신 해상 탈출을 택했다. 12월 5~6일 밤 프랑스 사략선장 루이 미셸 오리의 지휘 아래 약 2,000명이 16척의 선박으로 탈출했지만 600명만 아이티에 도착했고 나머지는 침몰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1815년 12월 6일 카르타헤나는 함락됐다. 한편 10월 18일 칼사다의 부대는 과스두알리토에서 출발해 아라우카 강을 건너 카사나레 지방으로 침공했고, 10월 31일 치레 전투에서 호아킨 리카우르테가 이끄는 공화파군에 패했지만 완전히 궤멸되지는 않았다. 이후 칼사다는 북쪽으로 전환해 안데스의 치타 고개를 넘어 툰하 지방으로 진입했다. 1816년 초 스페인군과 왕당파의 협공으로 누에바그라나다 재정복이 완성되었으며, 2월 카치리 전투 승리 후 칼사다는 5월 6일 보고타를 점령했다. 공화정부는 포파얀으로 도주했지만 6월 29일 쿠치야 델 탐보 전투에서 패배해 마지막 거점마저 함락되었고, 공화파 포로들은 페루 부왕령 왕당군에 편입되었다.

3.4. 교착 상태 (1816~1819)

1817년 볼리바르와 해군 지휘관 루이스 브리온은 바르셀로나 탈환을 시도했으나 스페인군에게 격퇴당했다. 그동안 마누엘 피아르와 산티아고 마리뇨는 방비가 허술한 앙고스투라[2]를 점령했고, 볼리바르는 그곳으로 이동해 독립운동의 최고지도자로 추대되었다. 그는 과야나 지방을 상징하는 별 하나를 추가해 국기 별의 수를 여덟 개로 바꾸었다. 이후 볼리바르는 독자적 유색인 군대를 조직하려 했다는 혐의로 피아르를 체포·군법재판에 회부해 브리온이 판사 중 한 명으로 참여한 가운데 처형시켰다. 나폴레옹 전쟁을 경험한 영국 출신 참전용사들이 도착해 훗날 ‘영국군단’으로 불릴 부대를 형성했다. 모리요는 카라카스로 돌아가고, 프란시스코 모랄레스가 동부 베네수엘라 제압을 맡아 성공시켰다. 누에바그라나다 출신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산탄데르는 모리요의 침공 이후 야노스로 후퇴했다가 볼리바르와 합류했다. 한편 미겔 데 라 토레 장군은 호세 안토니오 파에스가 이끄는 아푸레 지방의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남쪽에서는 호세 데산 마르틴베르나르도 오이긴스의 도움으로 칠레 독립을 완수했다. 1818년에는 앙고스투라의 공화파와 카라카스에 주둔한 모리요 간의 교착 상태가 이어졌고, 볼리바르는 중앙 베네수엘라 진공을 시도했으나 라 푸에르타 전투에서 패했다. 당시 제임스 루크가 이끄는 유럽 용병 약 1,000명이 볼리바르군에 있었지만, 모리요는 스페인 정규군과 왕당파 유색인 병력으로 수적으로 우세했다. 1819년 볼리바르는 베네수엘라와 누에바그라나다를 통합한 ‘대콜롬비아 공화국’을 선포했다. 유럽에서 독립운동에 동조한 자유주의자들이 많았고, 영국 정부는 직접 지원은 하지 않았지만 방해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왕당파 측 유색인 병사들이 독립군으로 이탈하기 시작했고, 동부 전선에서 독립군이 우세를 점했다. 파에스는 아푸레에서 모리요와 모랄레스를 격파해 볼리바르와 산탄데르의 누에바그라나다 침공로를 열었다. 이어 판타노 데 바르가스 전투에서 영국군단의 활약 속에 스페인군이 패배하고, 지휘관 루크가 전사했으며, 보야카 전투에서 스페인 세력이 누에바그라나다 북부에서 완전히 붕괴했다. 이후 파에스가 바리나스를 점령하고 볼리바르는 누에바그라나다에서 베네수엘라로 진격했다.

3.5. 누에바그라나다 독립 전투 (1819~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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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카라보보 전투

1820년 안달루시아에서 일어난 라파엘 델 리에고의 반란으로 스페인의 대원정 준비가 무산되면서 라플라타와 베네수엘라 침공 위협이 사라지고 왕당파 저항이 급속히 약화되었다. 1821년 4월 28일 휴전 만료 후 협상이 결렬되자 양측은 전면 재전투에 들어갔다. 왕당파군은 탈영과 병력 분산으로 약화된 반면, 볼리바르가 지휘하는 그란콜롬비아 공화군은 대규모 병력을 집중해 결전 준비를 했다. 마리아노 몬티야 장군은 1820년 7월부터 1821년 10월까지 카르타헤나를 포위하고 리오아차와 마라카이보를 점령했으며, 볼리바르는 바리나스에 5,000명을 집결시키고 파에스가 4,000명의 증원을 이끌었다. 호세 프란시스코 베르무데스는 동부에서 2,000명을 이끌고 카라카스로 향했고, 누에바그라나다군은 마그달레나 계곡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왕당파 지휘관 미겔 데 라 토레는 약 9,000명의 병력을 카리브 해안 여러 거점에 분산 배치했으나 마라카이보 혁명으로 보급선이 끊겼고 병력은 1818년의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 반면 볼리바르군은 2만 명에 달했다. 볼리바르는 산카를로스에 병력을 집결시켜 파에스군 일부와 라파엘 우르다네타 사단 등 1만 명 이상을 확보했고, 라 토레는 5,000~6,300명을 보유했다. 베르무데즈는 카라카스와 아라과 계곡 방면으로 공격해 라 토레가 1,000명의 병력을 바르키시메토로 이동하게 만들어 후방을 분산시켰다. 볼리바르는 산카를로스에서 티나코로 전진해 호세 라우렌시오 실바의 선봉대가 티나킬료에서 왕당파 진지를 점령했고, 6월 20일 티나코 강을 건넌 뒤 23일 타과네스 평원에서 병력을 검열했다. 이에 맞서 라 토레는 왕당파군을 서쪽 산카를로스 방면과 남쪽 엘파오 방면에 배치하고, 토마스 가르시아 중령이 지휘하는 제1사단과 포병 2문을 배치했다. 엘파오 방면에는 프란시스코 토마스 모랄레스 준장이 선봉을 맡아 인판테·프린시페·부르고스 대대를 운용하고, 예비로 기병 4개 연대를 두었다.

1821년 6월 24일, 시몬 볼리바르부에나비스타 언덕에서 왕당파 진지를 정찰한 후 정면과 남쪽 공격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우익 측면이 비어 있음을 이용해 파에스와 세데뇨의 사단으로 적의 좌익을 우회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라 토레는 이를 눈치채고 부르고스 대대를 북쪽으로 이동시켜 아푸레 정예대의 진격을 막았으며, 격렬한 반격으로 두 차례 후퇴를 강요했다. 그러나 뒤따르던 영국 용병 ‘브리티시 카사도레스’ 대대가 맞서 싸우며 지휘관 토마스 패리어와 장교 17명을 잃었지만 부르고스 대대를 물리쳐 파에스군이 재정비해 반격할 수 있었다. 이후 왕당파군은 왕자, 바르바스트로, 인판테 대대를 투입해 방어선을 유지했으나, 볼리바르군의 기병이 북쪽에서 돌입하자 혼란에 빠졌다. 라 토레가 페르난도 7세의 우사르 기병대를 투입했지만 이들은 사격 후 후퇴했고, 최후에는 란세로스 델 레이마저 명령을 거부하고 도주했다. 결국 왕당파군은 보병과 기병의 협공을 받아 패주했고, 발랑세이 대대가 방진을 형성하며 후퇴했으나 볼리바르군의 추격은 발렌시아를 거쳐 푸에르토카베요까지 이어졌다. 전투에 참가한 4,279명의 왕당파 중 장교 2명, 하급 장교 120명, 병사 2,786명이 전사했다. 카라보보 전투는 베네수엘라 독립의 결정적 전투로, 이후에도 1823년까지 서부에서 왕당파 저항이 이어졌으나 스페인 세력은 사실상 붕괴했다.

3.7. 마라카이보 호수 해전

카라보보 전투에서 패배한 왕당파는 산타마르타에서 반란을 유도했지만 발렌시아 점령에는 실패했다. 1823년 초 트루히요와 메리다 원정에서도 패배하여 병력 절반만 귀환했다. 한편, 호세 안토니오 파에스는 푸에르토카베요를 봉쇄했으나 5월 1일 스페인 해군 앙헬 라보르데가 도착해 두 척의 공화군 함선을 나포하며 봉쇄를 해제했다. 이후 호세 프루덴시오 파디야 제독이 마라카이보와 코로 해안을 봉쇄하고, 마누엘 만리케가 1,200명을 이끌고 히브랄타르에 상륙해 마리카이보로 진격, 마리아노 몬티야도 리오아차에서 2,500명을 이끌고 협공을 시작했다. 산탄데르는 파나마에서 2,000명을 파견하고 산타마르타와 마라카이보 인근에서 1,000명을 징집하도록 명령했다. 5월 1일 호세 레예스 곤살레스가 코로에서 왕당파군을 격파했고, 파디야는 5월 중순 모랄레스가 코로 원정 중일 때 마라카이보를 점령했다. 이후 6월 10일 쿠마레보에서 공화군이 승리하면서 코로 지역의 왕당파 저항이 붕괴되었고, 이어 푼타 데 팔마스까지 해방되었다. 당시 모랄레스는 2,000~3,000명의 병력을 보유했으나, 몬티야군의 절반은 신병이었고, 마라카이보는 봉쇄로 식량난에 시달렸다. 5월 하순 모랄레스는 2,000명을 이끌고 몬티야군 3,000명과 맞서기 위해 출정했으나 전투는 발생하지 않았고, 몬티야는 게릴라 공격과 식량 부족으로 6월 15일 리오아차로 철수했다. 고립된 모랄레스는 함락을 피하려고 1,800~2,000명을 코로로 철수시켜 카라카스 해안으로 이동할 계획을 세웠고, 부하 라 칼사다가 그를 대신할 가능성을 두려워해 그를 푸에르토카베요로 보냈다.

1823년 5월 8일 오후 2시 30분, 호세 프루덴시오 파디야 제독이 이끄는 공화군 함대는 마라카이보 해협을 무사히 통과했다. 이는 모랄레스가 산카를로스와 산페르난도 요새의 대포를 철거해 수비대가 소총만으로 방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6일간 함대는 큰 저항 없이 입항했고, 유일한 사고는 범선 그란 볼리바르호가 자파라섬 근처에 좌초된 것이었다. 5월 14일에는 공화군이 소쿠이강 하구까지 진출해 마라카이보 호수 내부를 완전히 장악했다. 5월 19일 프란시스코 에스테반 고메스 장군이 리오아차를 출발해 소쿠이로 진격하자, 모랄레스는 정예병을 이끌고 맞서면서 마라카이보에 소규모 정예 수비대를 남겼다. 수비는 군 총독 마누엘 푼기토, 육군지휘관 하이메 모레노, 해군지휘관 페드로 라메이손이 맡았고, 해군력은 2척의 범선과 4척의 소형선, 2척의 화살선, 3척의 소형선박, 8척의 피라구아로 구성됐다. 5월 20일 스페인 해군 프란시스코 데 살레스 에체베리아가 푼타 데 팔마에서 공화군을 공격했으나 패배해 전사했다. 이어 25일과 28일에도 해전이 벌어졌고, 모두 공화군이 승리해 왕당파 함선 과이레냐가 침몰했다. 패배한 라보르데의 함대는 쿠라사오로 철수해 수리 후 7월 4일 다시 출항했다. 이후 공화군은 모포로항으로 이동했고, 6월 16일 파디야가 해전, 마누엘 만리케가 지상전을 지휘하며 협력하기로 결정했다. 그 무렵 마라카이보는 식량 차단으로 고통받았고, 도시 주변은 공화군이 포위하고 있었다. 동쪽 코로에는 후안 데 로스 레예스 곤살레스, 남쪽 히브랄타르에는 만리케, 북서쪽 시나마이카에는 고메스, 북쪽 입구에는 파디야의 함대가 있었다. 만리케는 파디야의 지원으로 방어가 약한 마라카이보에 일시적으로 진입해 무기와 물자를 확보하고, 요새의 호수 쪽 포대를 파괴한 뒤 모랄레스가 돌아오기 전에 철수했다.

1823년 7월 17일, 라보르데가 파디야에게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으나 거절당하면서 전투 준비가 시작됐다. 라보르데는 자파라 만에 정박해 있었고, 파디야의 공화군은 알타그라시아 항에서 전투 준비를 했다. 7월 21일 파디야는 마라카이보 진입을 막기 위해 유리한 바람을 이용해 진형을 갖췄으나,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다. 라보르데는 상부의 명령에 따라 탐사를 진행하던 중 일부 선박이 좌초되었고, 파디야는 마라카이보 항을 공격하려 했지만 왕당파 해군의 방어로 실패했다. 7월 23일 오후, 양측은 마라카이보 호수 북서쪽에서 포격전을 벌였으나 짧고 격렬한 전투 끝에 양군 모두 피해를 입고 왕당파는 마라카이보로 후퇴했다. 공화군은 알타그라시아 항으로 돌아갔고, 라보르데는 모랄레스와 회합했지만 의견 충돌로 해군과 육군의 협공 계획은 무산되었다. 다음 날인 7월 24일 새벽, 파디야는 공격 대형을 정비하고 오전 11시 북동풍과 밀물의 도움을 받아 전투를 개시했다. 오후 2시 28분, 공화군 함대는 정면 공격을 시작했고, 라보르데는 에스페쿨라도라호를 기함으로 삼아 방어를 지시했다. 그러나 그의 함선들은 대부분 수송선으로 전투에 부적합했다. 오후 3시 15분 파디야는 기함에 백병전 신호를 올렸고, 3시 45분부터 본격적인 교전이 시작됐다. 연기 때문에 왕당파 함대는 시야를 잃고 무작위로 사격했으며, 공화군은 접근해 백병전을 벌였다. 인데펜디엔테호가 산마르코스를, 콘피안사호가 한 고엘레타를, 마르테호가 여러 적선과 교전했으며, 일부 왕당파 선장은 함선을 자폭시켜 나포를 피했다. 마라카이보 주민들은 해안에서 전투를 지켜보았다. 결국 라보르데는 패배를 깨닫고 후퇴를 시도했으나 대부분의 함선이 침몰했고, 에스페쿨라도라호와 중파된 술리아호, 두 척의 소형선만이 간신히 푸에르토 카베요로 도망쳤다. 오후 6시 45분, 파디야는 추격을 중단하며 전투가 끝났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공화국군은 그나마 남아있던 스페인군 요새들을 점령하였다. 베네수엘라에서 스페인을 완전히 몰아낼 수 있었다.

4. 결과

전쟁의 결과로 베네수엘라는 마침내 독립을 쟁취하여 주권 국가가 되었다. 더욱이 베네수엘라 독립 전쟁은 남미 아대륙에서 벌어진 다른 독립 전쟁들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3년간의 전쟁 후, 베네수엘라는 황폐해졌다. 적어도 20만 명이 전투, 질병, 기근 또는 전쟁 중 보복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스페인은 1845년 3월 30일 베네수엘라와 스페인 간의 평화 및 인정 조약 에 서명하면서 베네수엘라의 독립을 인정했다.
[1] 농업과 산업을 진흥하기 위해 설립하였다.[2] 나중에 시우다드 볼리바르로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