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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활동 | 베네수엘라 독립 전쟁 · 누에바그라나다 독립 전투 · 보야카 전투 | ||
| 사상 | 볼리바르주의 | ||
| 장소 | 시몬 볼리바르 국제공항 | ||
| 기타 | 시몬 볼리바르 교향악단 · 그란 콜롬비아 · 노예해방선언 |
| 누에바그라나다 독립 전투 Campaña Libertadora de Nueva Granada Bolívar's campaign to liberate New Granada | |
| 베네수엘라 독립 전쟁의 일부 | |
| 날짜 | |
| 1819년 5월 27일~8월 10일 | |
| 장소 | |
| <nopad> | |
| 누에바그라나다 부왕령 | |
| 교전 국가 및 세력 | |
네오그라나다 외인부대 | |
| 지휘관 | |
| 시몬 볼리바르 호세 안토니오 파에즈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산탄데르 | 후안 호세 데 사마노 |
| 병력 | |
| 2,200명 | 4,500명 |
| 결과 | |
| 시몬 볼리바르와 독립군의 승리 | |
| 영향 | |
| 누에바그라나다 독립 | |
1. 개요
스페인령 아메리카 독립 전쟁 중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일대에서 누에바그라나다 부왕령을 스페인 제국으로부터 독립시키는 과정에서 발발한 전투.2. 전개
2.1. 초기
1819년 초, 호세 마리아 바레로가 지휘하는 신대륙 왕당파군은 약 30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시몬 볼리바르의 명령으로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산탄데르가 지휘하는 공화군은 약 22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 중 대부분은 카사나레 평원에서 모집된 크리오요, 메스티소, 흑인, 원주민 등이었고, 볼리바르는 베네수엘라에서 출발해 카사나레에서 산탄데르와 합류한 뒤 툰하 방면으로 진격해 총독 후안 데 사마노의 군대를 공격하려 했다. 산탄데르는 무기 부족에도 불구하고 2000명을 모았으며, 바레로의 카사나레 정복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이에 부왕은 바레로에게 1200명을 주어 산탄데르를 공격하게 했지만, 큰 피해를 입고 툰하로 후퇴했다. 한편 볼리바르는 호세 안토니오 파에스가 쿠쿠타 방면으로 위장 공격을 시도해 왕당파군을 교란시키려 했으나,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1819년 5월 26일 볼리바르의 군대는 만테칼에서 출발해 과스두알리토로 향했으며, 약 1186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4개 보병대대(리플스, 바르셀로나, 브라보스 데 파에스, 영국군단)와 포병 40명, 기병 814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6월 4일 볼리바르군은 아라우카강을 건너 그란 콜롬비아의 카사나레 지방에 진입해 6월 12일 타메에 도착했고, 산탄데르의 병력과 합쳐 약 4300명(혹은 2500명)에 달했다. 하지만 이동 중 폭우, 홍수, 식량 부족 등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당시 툰하에는 바레로가 이끄는 약 2800명의 왕당파군이 방어 중이었다. 타메에서 볼리바르는 툰하로 가는 세 가지 경로 중 가장 험하지만 감시가 느슨한 피스바 고개를 택했다. 6월 22일 포레에 도착한 후, 6월 27일 산탄데르가 이끄는 선봉대가 파야 요새의 왕당파군 300명을 격퇴하며 파야 전투가 벌어졌다. 이후 7월 2일 행군을 재개해 7월 5일 피스바 고개를 넘어 안데스 산맥을 통과했고, 산탄데르의 선봉은 소차에 도착했으며 볼리바르는 다음 날 합류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병사들이 사망하거나 탈영했고, 특히 기병의 손실로 보급 능력이 약화되었다. 소차에 도착한 볼리바르는 병력을 재정비하고 무기와 보급품을 보충하며 휴식을 취했다.2.2. 가메자-토파가 전투
1819년 7월 7일, 볼리바르의 군대는 피스바 고개를 넘어 소차에 도달했으며, 병력은 매우 피폐한 상태였다. 많은 병사들이 죽거나 부상당했고, 500명 이상이 병에 걸려 타스코의 군병원에 수용되었다. 이후 볼리바르는 전위부대에게 코랄레스와 가메사 지역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 소식은 왕당파 군의 조셉 마리아 바레로에게 전해졌다. 바레로는 7월 9일 소가모소에 도달해 코랄레스와 가메사에 대한 정찰을 명령했다. 7월 10일, 바레로가 보낸 두 개의 정찰대는 독립군에 의해 격퇴되었고, 왕당파는 약 1000명의 보병과 180명의 기병으로 반격했다. 하지만 다시 독립군의 지원을 받은 공화군은 왕당파를 몰아내고 타스코로 후퇴했다. 7월 11일, 왕당파는 두 개의 보병 대대와 250명의 기병을 포함한 1000명의 병력으로 가메사로 진격했으나, 볼리바르의 부대는 강을 건너 왕당파의 진군을 막기 위해 싸웠다. 전투는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고, 특히 공화군의 산탄데르 장군은 부상을 입었지만 큰 부상은 아니었다. 왕당파는 결국 공화군을 타스코로 밀어내었고, 공화군은 후퇴하며 왕당파는 추격하지 않았다. 전투 결과는 양측 모두 승리를 주장했지만, 실제로 볼리바르의 군대는 튼하를 향해 계속 진격할 수 있었고, 후속 전투인 바르가스 늪 전투로 이어졌다.2.3. 판타노데바르가스 전투
1819년 7월 5일, 산탄데르 장군이 이끄는 전위부대는 피스바 고개를 완전히 통과한 후 소차에 도달했다. 이곳에서 병사들은 휴식을 취하고 근처 마을의 도움을 받았다. 그 다음 날, 호세 안토니오 안소아테기 장군의 부대도 소차에 도달해 지원을 받았다. 하지만 군대의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고, 산탄데르는 이를 "죽어가는 몸"처럼 묘사했다. 군은 많은 병사와 말, 가축, 군수품을 잃었으며, 영국 군단은 피스바 고개를 넘지 못하고 7월 22일까지 도착하지 않았다. 500명이 넘는 병사들이 병으로 쓰러져 타스코에 군병원이 설치되었고, 볼리바르의 군대는 지역 주민과 게릴라들의 지원을 받아 회복했다. 그 후 볼리바르는 인근 마을을 점령하고 소가모소를 공격하려 했으나, 왕당파의 호세 마리아 바레로가 이끄는 3부대와 코랄레스, 가메사, 톱가의 몰리노 전투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이는 결정적인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결국 볼리바르는 소가모소를 정면으로 공격하는 대신, 세린자 계곡을 통한 좌측 우회로 전략을 채택했다.1819년 7월 25일, 볼리바르는 오른쪽으로 돌파하려는 시도를 실패한 후, 다시 왼쪽으로 돌파하기 위한 전략을 세운다. 그는 치카모차 강을 건너야 했고,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다. 7월 25일 아침, 군은 배를 만들고 강을 건너기 시작했지만, 일부 배가 파손되어 작업이 지연되었다. 이 소식은 실시간으로 바레로 장군에게 전해졌고, 그는 즉시 왕당파 군을 보내 치카모차 강을 건너고, 산악 지형을 통해 진격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왕당파 군은 볼리바르의 전방 부대와 충돌하고,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다. 왕당파는 주도권을 잡고, 볼리바르의 군대가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볼리바르의 군대는 기병 부대를 보내 전세를 역전시키려 했고, 이 '판타노 데 바르가스 전투'에서 기병의 격렬한 돌격이 왕당파를 밀어내며 승리를 거두었다.[1] 전투는 5시경에 종료되었고, 양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볼리바르의 군대는 104명의 사상자를 냈고, 왕당파는 500명 이상의 피해를 입었다. 전투 후 양군은 재정비를 해야 했고, 볼리바르는 새로운 부대를 모집하기 위해 군을 재조직했다. 8월 3일, 볼리바르는 다시 전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2.4. 보야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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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보야카 전투#|]] 부분을 참고하십시오.3. 결과
보야카 전투와 같은 날, 바레이로 대령은 페드로 파스카시오 마르티네스라는 젊은 농부에게 포로로 잡혀 볼리바르에게 넘겨졌다. 바레이로는 1819년 10월 11일,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산탄데르의 명령에 따라 "죽음에 이르는 전쟁" 이라는 구호 아래 포로로 잡혀 있던 다른 스페인 장교 37명과 함께 처형되었다. 왕당파의 패배 이후, 후안 데 사마노 총독은 보고타에서 이 소식을 듣고 카르타헤나로 탈출하였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승리한 시몬 볼리바르는 자신의 고향인 베네수엘라로 진군하였다.4. 전투 목록
- 파야 전투
- 파소데로스안데스 전투
- 코랄레스 전투
- 가메자 전투
- 판타노데바르가스 전투
- 보야카 전투
[1] 절박한 상황과 왕당파 기병대가 공화파를 포위할 가능성을 목격한 볼리바르는 볼리바르 언덕에 위치한 자신의 위치에서 낙담한 듯 보였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기병대가 우리를 덮쳤고, 전투는 패배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볼리바르가 예비 병력으로 보유하고 있던 야노 아리바 창기병 중대 지휘관 후안 호세 론돈 중령은 "나와 내 부하들이 싸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패배할 수 있겠는가? 공격을 시작하자"라고 대답했다. 정신이 팔린 볼리바르는 "대령님, 할 수 있는 일을 하십시오. 조국을 구하십시오!"라고 대답했다. 그는 론돈에게 니뇨 가문의 농장에서 갓 도착한 새 말을 탄 기병대를 이끌고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명령을 받은 론돈은 라노 아리바에서 온 창기병들에게 " 동지들이여! 용감한 자는 나를 따르라. 이 순간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싸우라고 촉구 하고 적을 향해 질주했다. 그리고 론돈이 "대령님, 할 수 있는 일을 하십시오. 조국을 구하십시오! "라는 말은 콜롬비아 국군 기병대의 공식 표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