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bgcolor=#000><colcolor=#fff> 라파엘 델 리에고 Rafael del Riego | |
| 본명 | 라파엘 델리에고 이 플로레스 (Rafael del Riego y Flórez) |
| 출생 | 1784년 4월 7일 |
| 스페인 투냐(Tuña) | |
| 사망 | 1823년 11월 7일 |
| 스페인 마드리드 | |
| 국적 | |
| 직업 | 정치인, 장군 |
1. 개요
스페인의 군인이자 정치인. 페르난도 7세에 대항해 쿠데타를 일으키고 입헌군주제 헌법 도입을 관철시켰으나 이후 스페인이 프랑스를 끌어들이면서 처형되었다. 스페인 제1공화국 및 스페인 제2공화국의 국가인 리에고 찬가가 이 인물을 기리기 위해 작곡되었다.2. 일생
2.1. 초기
라파엘 델 리에고는 1784년 4월 7일 아스투리아스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오비에도 대학교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했고 법학 학위의 일부와 교회법 1학년을 공부했다. 1807년 그는 가난한 아스투리아 하층 귀족의 다른 많은 아들들처럼 군 경력을 쌓기 위해 마드리드로 이주했다.[1]1808년 5월 2일 도스 데 마요 봉기가 일어났을 때, 리에고는 스페인 주둔 나폴레옹 군대를 지휘하던 조아킴 뮈라 원수의 명령을 어긴 혐의로 아란후에스에 감금되었다.그는 양치기로 변장하여 아스투리아스로 가서 그곳에서 프랑스의 침략 에 맞서기 위해 탈출했다. 하지만 그가 사모라에 도착했을 때 프랑스 스파이로 몰려 투옥되었다. 그러나 고향에 살았던 프란치스코회 수도사의 인정 덕분에 그는 감옥에서 나와 아스투리아스로의 여정을 계속할 수 있었다. 오비에도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티네오 보병 연대 대장으로 임명되어 블레이크 장군이 지휘하는 부대에 합류할 군대를 조직하고 있던 아세베도 장군의 참모진에 합류했다. 11월 초, 아세베도의 군대는 에스피노사 데 로스 몬테로스 전투에서 패배했고, 11월 13일, 리에고 대위는 스페인군 잔당을 추격하던 프랑스군에게 레이노사 에서 포로로 잡혔다. 그는 프랑스로 추방되어 남은 전쟁 기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리에고가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한 일은 프랑스어와 영어를 배우고 몇 가지 사업 수업을 듣는 것이었다.
포로에서 풀려난 리에고는 스페인으로 돌아와 라시 장군 앞에서 카디스 헌법에 충성을 맹세하기에 충분한 시간을 두고 도착했다. 그러나 페르난도 7세는 카디스 헌법을 폐지하기를 원했고, 실제로 그가 귀국한 후 얼마지나지 않아 카디스 헌법은 폐지되었다. 절대왕정 6년 동안 리에고는 마드리드, 빌바오, 로그로뇨, 라 카롤리나 등 여러 지역에서 복무했으며, 1819년 11월 중령 계급으로 라스 카베사스 데 산 후안에 주둔하던 아스투리아스 연대 제2대대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아메리카 식민지로 파견되어 지방의 반란을 진압할 예정이었다.
2.2. 리에고의 선언
1814년 프랑스에서 귀국한 페르난도 7세는 쿠데타로 1812년 카디스 헌법을 폐지하고 절대왕정을 복원했으며, 입헌군주제를 지지한 자유주의자들은 투옥·추방·망명당했다. 이후 1814~1820년의 절대왕정 6년 동안 정부는 1808년부터 이어진 구체제의 위기를 해결하지 못했고, 독립전쟁으로 인한 경제 붕괴와 아메리카 식민지의 독립으로 교역이 급감해 국가 재정이 파산했다. 개혁을 시도한 재무장관 마르틴 데 가라이의 정책도 귀족·성직자·농민의 반대로 실패했다. 이에 자유주의자들은 비밀리에 군사 쿠데타(‘프로나운시미엔토’)를 통해 입헌군주제를 복원하려 했고, 헌법을 지지하는 군 장교들의 지지를 얻어 왕에게 1812년 헌법 인정을 강요하려 했다. 절대왕정 복귀 후 군대는 다시 신분적 구조로 돌아가 귀족이 장교직을 독점했고, 게릴라전으로 성장한 평민 출신 지휘관들은 배제되었다. 임금 체불, 승진 정체, 실업 등으로 불만이 쌓인 장교들은 자유주의 사상에 공감하게 되었고, 재정 파탄으로 군 규모 축소가 이어지면서 특히 게릴라 출신 장교들이 해고되었다. 1814~1820년 사이 여섯 번의 군사반란이 있었는데, 앞선 다섯 번은 실패했으나 마지막인 1820년 리에고의 반란은 성공했다.1820년 리에고의 반란 소식이 전해지자 처음엔 카디스가 동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왕과 정부는 금방 진압될 것이라 믿었지만, 2월 말 라코루냐 주둔군이 헌법을 선포하고 이어서 페롤, 비고, 무르시아 등 여러 도시가 가담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지방 곳곳에서 혁명위원회(훈타)가 세워지고, 종교재판소 감옥이 습격되어 수감자들이 해방되었다. 이에 페르난도 7세는 3월 3일 왕령으로 개혁 의지를 표명했으나 이미 늦었고, 다음날 오카냐에서 콘데 데 라 비스발이 헌법을 지지하며 반란에 합류했다. 사라고사, 바르셀로나, 팜플로나 등에서도 봉기가 이어졌다. 3월 7일 마드리드 시민들의 격렬한 시위가 왕궁 앞까지 몰리자 페르난도 7세는 결국 국민의 뜻이라며 1812년 헌법을 수용하고 이를 선서하겠다고 발표했다. 시민들은 환호하며 거리로 나와 축하했고, 3월 8일 헌법 선서와 정치범 석방, 망명자 귀환 명령이 공표되자 마드리드의 플라사 마요르가 ‘헌법광장’으로 개명되고, 종교재판소 감옥이 파괴되었다. 9일에는 왕이 1814년에 해산된 입헌 시청 복원을 수용하고 헌법을 공식적으로 선서했으며, 종교재판소를 폐지하고 임시자문위원회를 설치했다. 이후 왕은 자신이 아닌 ‘나쁜 조언자들’ 탓으로 책임을 돌리며 몇몇 측근을 해임했다. 3월 10일 그는 헌법 수호를 맹세하는 ‘국민에게 보내는 선언문’을 발표했지만, 이후 곧 헌법을 뒤집을 음모를 꾸몄다. 같은 날 카디스에서는 군대가 군중에게 발포해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마드리드에서는 ‘헌법광장’에 헌법 기념비가 세워지고 대규모 축제가 열렸다. 전국의 도시와 마을들도 ‘헌법광장’을 세우며 자유의 복귀를 기념했고, 이를 주도한 리에고는 새로운 스페인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2.3. 몰락
1821년 말 라파엘 델 리에고는 아스투리아스 대표로 선출되어 1822년 3월 의회 개회 시 의장으로 취임했고, 페르난도 7세의 개회사에 맞서 왕권은 법의 준수에 의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온건파와 급진파 자유주의자의 화합을 위해 노력했으며, 4월 7일 의회가 ‘리에고 찬가’를 국가로 채택했다. 그러나 7월 절대주의자들의 쿠데타가 실패한 뒤 급진파가 정권을 잡으며 자유주의 진영의 분열이 심화되었다. 리에고는 정치적 야망을 부인하며 “나는 조국의 크롬웰이 되지 않을 것”이라 했고, 무장 봉기를 재촉하는 요청에도 헌법적 절차를 지켰다. 이후 그는 내외부의 위협에 맞서 싸웠다. 왕이 몰래 신성동맹에 구원을 요청한 결과 1823년 프랑스군이 진입했지만 국민의 저항은 거의 없었다. 리에고는 끝까지 헌법과 왕의 명예를 함께 외치며 싸웠으나 9월 15일 하엔 주에서 체포되어 라카롤리나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는 포박된 채 마드리드로 이송되며 모욕을 당했고, 재판에서 ‘왕과 왕실을 카디스로 이동시키자는 의회 투표’라는 죄목으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1823년 11월 7일 마드리드 세바다 광장에서 하얀 옷과 초록 모자를 쓰고 당나귀에 실려 처형되었으며, 시신은 분할되지 않았다.3. 평가
라파엘 델 리에고는 자유를 위한 투쟁의 신화적 영웅으로 국민의 기억에 남았으며, 1820년 봉기 당시 그의 부대가 연주한 ‘리에고 찬가’는 19세기 내내 혁명가로 불리며 1931~39년 제2공화국 시기 스페인 국가로 채택되었다. 그는 절대주의의 탄압에 맞선 대표적 자유 수호자이자 정치적 순교자로 평가받았고, 초상화는 현재도 스페인 의회에 전시되어 있다. 그의 명성은 국외로도 퍼져, 1824년 미국의 망명자 펠릭스 메히아가 그에 관한 책을 출판했고, 러시아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그에게 시를 헌정했으며, 런던에서는 ‘리에고의 죽음’을 주제로 한 비극이 상연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리에고 만세’를 외친 자가 사형당하는 등 그의 이름은 유럽 혁명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빅토르 위고도 레 미제라블에서 그를 언급했다.[1] 다른 선택지는 행정과 교회였다. 후자는 그의 형이자 참사회장이었던 미겔 델 리에고가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