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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878년[1] 2월 3일[2] |
경상도 경주부 (현 경상북도 경주시) | |
사망 | 미상 |
사망지 미상 |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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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박중화는 1878년 2월 3일 경상도 경주부(현 경상북도 경주시)에서 태어났다. 이후 상경해 1917년에는 경기도 경성부 수하정(현 서울특별시 중구 수하동) 18번지[3]에 거주했고, 1927년에는 경기도 경성부 청진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진동) 187번지[4]에 거주했다.1897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00년에는 시즈오카현립중학교, 1903년에는 시즈오카농학교에 입학하여 각각 수학하였다. 이 동안에 카도타(門田) 타케치라는 일본인 여성과 동거하며 슬하에 박옥자(朴玉子)·박겸자(朴兼子) 등 두 딸을 두었다.
귀국 후에는 경성부 청진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진동)에 거주하였다.
1907년 4월 양기탁·안창호·전덕기(全德基) 등을 중심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신민회가 창립되자, 그는 이에 가입하여 주로 한성부에서 활동하였다. 1909년에 신민회의 합법적 청년단체로서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가 설립될 때 그는 발기위원으로서 참여하였으며, 이후 청년학우회 한성연회(漢城聯會)의 회장을 거쳐 청년학우회 제2대 회장이 되어 애국계몽운동에 헌신하였다. 또한 이즈음 보성중학교의 교장에 취임하여 교육구국운동에도 진력하였다.
한편, 같은 해 8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신민회 계열의 비합법적 비밀 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함께 조직하여 당원으로서 지하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1909년부터 1916년까지는 휘문의숙 교장에 취임하여 학생들에게 당시 조선총독부로부터 발매 및 반포가 금지되었던 대한역사(大韓歷史) 교과서를 가르치는 등 조선인으로서 한일합병의 역사를 잊으면 안된다고 하면서 항상 독립사상 및 반일사상을 고취했다.
그러다가 1917년 감익룡(甘翊龍)과 함께 자산가의 청년 자제들을 유인, 김규묵(金奎默)이 조제한 자양강장제를 본래보다 높은 가격으로 팔아 그 이윤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을 계획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같은 해 3월 3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사기 혐의로 경성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었으며, 7월 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사기 취재 혐의로 징역 10개월형(미결 구류일수 중 15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았다. 그는 이에 공소하여 그해 10월 1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사기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 중 본인에 관한 부분이 취소되었고, 사기 혐의에 대해 결국 무죄를 선고받고 출옥하였다.
그후 1920년 김명식(金明植)·박이규(朴珥圭) 등과 함께 조선노동공제회를 조직하였으며, 이때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어 노동운동을 지도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이후 행적 및 사망년월일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어 소명하기 어렵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1] 1927년 작성된 왜정시대인물사료에 1912년 당시 35세였다고 기재되어 있으며, 1917년 3월 31일 판결문에 40세로 기재되어 있다.[2] 1917년 10월 12일 판결문[3] 그가 살았던 수하동 18번지는 현재 수하동 67번지에 편입되었으며, 이곳에는 미래에셋금융그룹 본사가 위치한 미래에셋센터원 빌딩이 위치해있다.[4] 현재는 사라진 지번이다. 다만 1912년 작성된 지적원도를 참조하면, 청진동 184-1번지와 188번지에 각각 편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청진동 184-1번지에 있는 삼송빌딩에는 한때 한겨레민주당 중앙당 사무실이 있었고, 청진동 188번지에 있는 시그나타워에는 라이나생명의 본사가 위치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