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5px; border-radius: 8px; border-style: solid; border-width: 0px; border-color: #0A2740; background:#0A2740""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argin: -5px 0; color: #fff; min-width: 25%" {{{#!folding [ 한국 음반 ] | ||||
기별 정규 1집 2003. 01. 24 | The Memory 스페셜 앨범 2010. 09. 28 |
- [ 일본 음반 ]
- ||<-4><bgcolor=#3E4A70> 정규 앨범 ||
期別 정규 1집
2004. 06. 16Fiction 정규 2집
2004. 12. 15WILL BE THERE... 정규 3집
2006. 02. 08LOVE 정규 4집
2008. 11. 26STARS 정규 5집
2010. 06. 09미니 앨범 sometime 미니 1집
2005. 07. 20ONCE IN A SUMMER 미니 2집
2009. 07. 29싱글 カジマセヨ 싱글 1집
2004. 11. 17Truth/ほゝえみをあげよう 싱글 2집
2005. 12. 21君が最高! 싱글 3집
2006. 09. 20僕の頁をめくれば 싱글 4집
2007. 01. 01永遠 싱글 5집
2007. 08. 29Behind love〜片思い 싱글 6집
2008. 07. 23Say goodbye 싱글 7집
2008. 11. 12最愛のひと 싱글 8집
2009. 11. 18ONE LOVE~笑顔であふれるように~ 싱글 9집
2010. 05. 19비정규 앨범 Yong Ha's Melody〜パク・ヨンハ作品オルゴール集 오르골 어레인지
2007. 03. 21present ~Park Yong Ha Selection Album 데뷔 3주년 기념
2007. 06. 27Park Yong Ha in 1095's 스페셜 앨범
2010. 12. 15Park Yong Ha in 1107's 스페셜 앨범
2010. 12. 15Song For You 데뷔 10주년 기념
2014. 06. 18
- [ 기타 음반 ]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191919><width=1000> ||<width=25%> ||<width=25%> ||<width=25%> ||
I LOVE YOU SO MUCH 대만 앨범
200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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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용하의 여담을 정리한 문서.
2. 악기
- 박용하 본인이 콘서트때 사용했었던 기타이다.
- Summer Concert때 사용했던 기타이다.
==# 글씨체 #==
3. 기타
- CQ 코리아 인터뷰에서 배우가 된 계기가 된 질문에 이렇게 답변 했다.
어머니의 친구분 남편이 PD 였는데 나 모르게 부탁하셔서 《테마게임》 엑스트라로 출연을 하게 됐는데 똑바로 안하냐는 잔소리를 듣고 한창 예민한 나이라서 속으로 욕을 했다. 집에서 안한다고 난리를 피웠는데 어머니가 자신이 보지도 않은 오디션에 붙었다고 했다. 알고 봤더니 《사랑이 꽃피는 교실》이었다. 일단 따라 갔는데 50명 중에 한명이 라는 사실을 알고 화가 났다. 그런데 바로 다음주 부터 메인으로 들어간다고 했는데 정말 들어 갔으며 몇주 지나더니 김동찬 이라는 배역이 생겼다. 갑자기 극중 어머니와 자신의 집이 생기더니 주인공 자리를 꿰찼다. 그때 송채완씨가 선생님으로 나왔는데 시집을 주시면서 글을 써주셨다. '너라는 친구를 보면서 생각 했다. 연극 한번 해보지 않겠니?' 그걸 심각하게 고민 했으며 그때부터 배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처음 그날처럼> 활동 초반에는 얼굴 없는 가수로 활동하다가 박용하가 불렀다는 것이 기사로 나온 뒤, 무대에서도 활동하기 시작했다.
- 소지섭과 처음 만난 것은 1998년 가을 경주에서 열린 앙드레 김 패션쇼이며, 둘 다 모델로 패션쇼에 참가하면서 동갑인 것을 알게된 박용하가 소지섭과 친해지려고 적극적으로 접근을 했다고 한다.
- 과거 유진(본명 김유진)과 연인 사이였다. 2002년 드라마 <러빙유>에서 남녀 주인공으로 만나 연을 맺게 되었다. 이후 박용하의 정규 1집 기별의 뮤직비디오에도 출연했으며, 장례식장에 조문하러 오기도 했다.[1]
- 박용하의 일본팬들은 숫자 4와 8일 일본어로 '욘'과 '하치'라고 발음된다는 점에 착안해 매년 4월 8일을 '욘하 데이'로 지정했다.
- 박용하의 이름을 숫자로 바꾸어서 8948(바꾸용하)라고 하기도 한다.
- 국제구호개발 NGO 굿네이버스의 홍보대사였으며 지난 2009년 아프리카 차드에 방문해 아이들의 교육을 지원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딴 요나스쿨 건립을 약속했다. 그로부터 1년 후 박용하는 아프리카 수도 은자메나에서 약 60km 떨어진 파샤 아테레 지역에 팬들과 함께 마련한 기금으로 이 지역의 최초 학교를 세웠으며 2010년 5월 기공식에도 참석하는 등 의지를 다졌으나 안타깝게도 다음달에 생을 마감하게 되면서 9월 완공식에는 참석하지 못하게 됐다.
- 1996년 병역 검사에서는 현역 판정을 받았었다. 그러나 원래 안 좋았던 시력이 계속 나빠져 병무청 지정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은 후 재검을 신청했으며 재검 결과 군면제를 받았다.# #[2]
- 개인적으로 매니지먼트사를 운영하며 측근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제주도에서 일본 팬들을 초대해 열었던 팬미팅과 관련해 사기를 당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박용하는 2억원에 가까운 돈을 사비를 털어 팬들에게 배상을 해주는 등 직접 매니지먼트를 담당하며 고충을 겪기도 했다.기사
- 일본에서 자신의 유명세를 활용한 ‘머천다이징 상품’을 만들었는데 제품에 문제가 생겨 수억 원 대의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 Y 씨와 전 소속사에서부터 호흡을 맞춰오다 함께 요나엔터테인먼트를 설립했다. 그런데 Y 씨가 회사 공금을 횡령하면서 회사를 떠나게 됐다고 한다. 한 측근은 “박용하 씨는 한 번 누군가를 믿으면 모든 것을 다 줄 정도로 의리가 깊다”면서 “올해 초 Y 씨와의 불화에 이어 또 한 번 지인의 배신을 경험한 뒤 무척 힘들어 했다고 한다.#
- 생전에 대인배 기질이 있었다고 한다. 100여명들의 팬들에게 직접 쪽지까지 보내줄 정도. 게다가 전술한 군면제 사실을 면전에서 비난하던 안티팬[3]과 직접 대화를 통해 술까지 사주며 상황을 해결하기도 했다.기사 이러한 대인배 기질과 친절한 성격 덕에 주위에서 굉장히 좋은 평판과 많은 미담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지인들의 말에 따르면 박용하는 생전에 주변 사람들을 잘 챙기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도 잘 들어줬지만 정작 그의 속내는 듣지 못했다며 안타까워했다.
- 방송에서 김준희가 박용하와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했다. “용하는 속 깊은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가장 좋아했던 친구다”라고 말했다. 이어 “나는 용하에게 내 힘든 얘기만 했지, 정작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 얘기 했으며, 그 친구가 세상을 떠난 날 많은 사람들이 조문을 왔었는데 “지인들이 이구동성으로 그 친구는 내 얘기를 들어줬던 친구”라고 하면서 “그 누구도 그 친구가 어려웠단 걸 알고 있는 사람들이 없었다”며 안타까워 했다.
- 주변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걸 싫어해서 내색을 안 했기 때문에 우울증이 있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가 사후에야 뒤늦게 알려졌다. [4] 이 때문에 사후에는 "바보같이 너무 착한 사람"이라며 안타까워하는 여론이 많다.
- 사망 몇 시간 전에 지인을 만나서 자기 속내를 털어놓으며 "사람들 마음도 이제 알겠다"며 "동갑내기 연예인 친구들이 고민을 털어놓으면 이제 나는 얘기를 들어주게만 된다"고 했다고 한다.
- 절친이었던 소지섭은 발인까지 그의 곁을 지켰고, 장례비용도 전부 대주는 등, 마지막까지 우정을 보여주었다. 이후 박용하의 부친이 사망했을 때도 그는 빈소를 방문해 또 한 번 우정을 과시했다. 그 외 박효신[5]과도 절친했다고. 2005년 라디오를 할 때 게스트로 나온 박효신과 친분을 쌓게 되었고 박효신의 매 공연을 관람하고, 여의치 않을 경우엔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 박효신의 <사랑한 후에>[6] 뮤직비디오에 무보수로 출연해 함께 연기하기도 했다. 박효신은 후에 박용하 추모곡을 불렀다.
- 당시 건강 문제로 총리직을 사임한 아베 신조가 장례식 때 조화를 보낸 적이 있다. 정확히는 자기 부인이자 한류 팬인 아베 아키에 여사가 조화를 보낼 때 공동명의로 보낸 것인데, 이후 2012년 아베가 총리로 재취임하고 냉각된 한일관계를 고려해보면 묘하다.[7]
- 투유 프로젝트 - 슈가맨 8화에서 희열팀 슈가맨으로 등장하였다. 슈가송은 처음 그날처럼. 박용하는 고인이었기에 이 곡을 작곡한 김형석이 연주를 대신했다.
- 후지TV 드라마 크리스마스의 기적의 주제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불렀다.
- 2005년 SBS '한밤의 TV연예' 인터뷰에서 박용하는 “제가 갑자기 일본을 오게 된 게 아니고 4년이란 시간 동안 (한국에서) 활동을 안 하니까 ‘박용하가 끝났구나’ 말하기도 한다”면서 “잔잔하게 항상 여러분 곁에 있는 그런 연예인으로 봐주시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어도 한국활동에 대한 미련이 늘 남아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9]기사영상
- 또다른 인터뷰에서는 “제가 힘들었다고 이야기하면 얼마나 많은 분들이 믿으실지 모르겠는데. 여기까지 오는 게 되게 힘들었던 거 같다. 그 마음을 지켜오기가 힘들었던 거 같다”고 토로했다.기사
- 2008년 5월 SBS '한밤의 TV연예' 인터뷰에서 “그래프를 그리자면 점점 원하지 않는 하행곡선을 타고 있다가 그러다가 다시 다른 작품으로 올라오기도 한다”며 본인이 감정의 기복이 있는 편임을 밝혔다. “강한 철도 뜨겁게 달구었다가 차갑게 했다가 반복을 하면 뚝 부러진다. 사람은 감정이 있다. 사랑을 많이 받다가 무관심을 느끼고 그게 반복이 되니까 외로웠다. 이유 없이 항상 우울했다”고 털어놨으며 그는 연예인으로 살면서 부모님께 항상 미안한 마음이 있다는 것도 밝혔다. 박용하는 “부모님을 보면서도 항상 뭔가 보여드려야 하는데 주변 사람들을 보면 뭔가 보여드려야 하는데…이름은 알려지고 연예인이란 타이틀이 있고 지기도 싫고…”라며 주변 기대에 대한 부담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기사
- SBS ‘김승현 정은아의 좋은아침’에서 “일본의 인기 한류스타라는 이미지를 갖고 다시 컴백을 하는데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할 거라는 불안함과 실제로도 너무 오랜 만이라 스스로의 기대 했던 만큼 못했던 부분들이 마치 살을 찢는 듯한 고통을 느낄 정도로 힘들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 그동안 박용하의 일본 앨범 프로듀서 일을 도맡아왔던 황세준의 말에 의하면 "용하가 일본 콘서트에 대해 굉장히 의욕적이었다"면서 "이번 음반을 작업 할 당시에는 크리스마스 앨범을 낼 계획까지 세우며 더욱 적극적으로 나섰었다고" 한다.
- 싱글 앨범 순위에 100위권 밖에 머물던 박용하의 일본 싱글 CD 2장이 각각 46위와 87로 올라갔고, DVD 순위에선 ‘PARK YONG HA 2010 LIVE IN SEOUL “CANDY MAN”’이 100위권 밖에서 90위로 상승했다. 이밖에 다른 회사(‘레코초쿠’)의 휴대폰 음악·영상 다운로드 순위에서도 100위권 밖에 벗어나 있던 박용하의 노래나 영상이 부문별 최고 11위까지 급상승했다.기사
- 2006년 10월 14일 데뷔 13주년을 맞이해 한국 가수로는 최초로 하와이에서 단독 콘서트를 개최했다. 이에 하와이 주는 2006년부터 매년 10월 14일을 '용하 데이'로 공식 지정한 바 있다.
- 2006년 10월 15일(현지시간) 미국 하와이에서 강도 6.6의 강진이 발생할 당시 호놀룰루 시내 호텔 40층에 머물고 있었는데 당시 깊은 잠에 들었던 박용하는 큰 흔들림에 놀라 일어나 계단을 달려 나와 탈출했다. 당시 하와이에서 일본 팬 1000여명과 함께하는 이벤트 행사에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 2009년 출연했던 드라마 '남자이야기'에 참여했던 관계자는 "드라마 종영 후 용하 씨가 사비를 털어 전 제작진과 출연진에게 MT를 선물했었다. 돈도 돈이지만 2박 3일간 부산에서의 일정 모두를 본인이 직접 기획하고 주도해 진행했다. 정말 정성이 느껴졌다"고 전했다. 또 "당시 드라마는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용하 씨 덕분에 팀 내 분위기는 정말 좋았다. '한류스타'였지만 매니저 대신 운전대를 잡거나 식당을 섭외하러 몸소 뛰어 다니는 소탈한 면모도 넘쳤다. 그 후에도 드라마 관계자들과 꾸준한 인연을 이어왔다. 감동이었다"고 말했다.
- 2009년 2월 '작전'에 출연했던 한 배우의 매니저는 1일 오후 빈소에서 OSEN과 만나 "영화 끝나고 배우와 스태프가 모여 쫑파티를 했는데 그때 박용하가 모든 팀원들에게 자신이 직접 촬영한 사진과 메모를 선물로 줬었다"며 "감독님은 물론 배우나 스태프, 심지어 배우 매니저 한명 한명에게까지 직접 찍은 사진에 메모를 달아 선물하더라. 당시 모두들 깜짝 놀라워하면서도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1년이 넘게 지났지만 아직도 침실에 선물 받았던 사진을 걸어뒀다. 주연배우가 스태프 한명까지 애정을 갖고 선물을 챙기는 일은 정말 쉽지 않은 일 아닌가. 정말 착한 사람이었다"고 회상했다. "한마디로 산타클로스 같은 사람이었죠. 주위를 기쁘게 하는 사람이었어요. 용하 씨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행복했어요."라고 전했다.
- 2010년 5월 10일 《박용하 TALK SESSION IN KOREA PLAZA》에서 5월 19일에 나오는 싱글 "ONE LOVE"와 6월 9일에 나오는 앨범 "STARS"에 관해서 이렇게 언급했다. "사랑을 상징하는 것은 별이다. 많은 별이 모이면 큰 빛이 된다. 힘드는 환경에 계시는 분들에도 사랑이나 빛을 드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작품에 담은 마음을 이야기를 했다. 또, "개인적으로 앞으로는 가난한 환경에 계시는 분들이나 도움을 구하고 있는 분들을 지원하는 봉사 활동도 생각하고 있다."바로 "ONE LOVE"란 이 음악의 컨셉이 제가 하고 싶은 것 전하고 싶은 것을 반영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 2010년 7월 1일 드라마 '러브송' 제작 관계자에 따르면 드라마 속 배역을 위해 최근까지 틈나는 대로 연변 사투리를 배웠으며 일본, 태국에서 공연을 하면서도 계속 연변 사투리 연습에 매진했다고 한다. 또 극중 첼로를 연주하는 장면을 직접 소화하려고 교습도 받았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드라마 성공을 위해서 밖에서도 발로 뛰었으며, 지인, 광고주를 직접 만나 드라마를 홍보하며 광고가 순조롭게 판매되도록 애썼다고 한다. 박용하는 "정말로 잘 해보고 싶은 작품이다. 글로벌 프로젝트로 진행되는 이 드라마를 반드시 제2의 '겨울연가' 같은 한류 드라마로 만들겠다"며 열의를 불태웠다고 한다.기사 그러나 본인의 오랫동안 쌓인 우울증으로 인한 우발적인 자살로 인해 '러브송' 제작은 끝내 무산되었고, 그 재능을 꽃피우지 못하게 되었다.
- 2011년 6월 22일 도쿄 유라쿠초의 도쿄국제포럼홀에서 한류스타 박용하를 기리는 필름콘서트 '박용하 FILMS 2004~2010 ☆We LOVE Yong Ha☆'가 열렸으며 포니캐년측으로부터 기념패를 받았다.
- 2019년 10월 이경섭은 인터뷰에서 "故 박용하가 '하자 패밀리' 멤버이기도 했다. '올인'에서 OST를 불러 크게 히트가 됐다. 일본에서 음반 활동 제안이 들어왔는데, 원래 친한 친구라 일본 데뷔곡을 작업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부도칸 공연에 같이 올라가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내동생 박용하'였는데 비행기를 타고 일본에 가면 마이클 잭슨이었다. 그런 반응이었다. '겨울연가' 영향이었는데, 그 당시 어마어마했다"고 돌이켰다. 故 박용하가 어떤 동생이었냐는 질문에 "형 같은 동생이었다. 주변을 잘 챙기고, 섬세했다. 그 정도 스타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을, 막내들 물까지 챙겼다. 상남자가 섬세한 모습을 보여주니 배가가 됐다. 그 어떤 가수보다도 노래 연습을 많이 했다"한다.
- 연예인 스타크래프트 대회에 나가 1등을 할 정도로 실력이 좋았으며 과격한 스포츠는 두루 섭렵할 정도다. 아이스하키나 농구를 즐겼으며, 게임이나 오토바이, 스노보드도 소지섭에게 알려줬다고 한다. 오토바이 동호회의 회원이면서 레이서 자격증도 보유하고 있는데 경주에 나가면 중상위권의 성적을 낼 정도로 수준급의 실력이다. [12]
- 연예인 레이싱팀 R-STARS 소속 당시 2004 BAT GT챔피언십 시리즈 투어링A 종목에 출전해 9위를 기록했다.기사
- 1999년 창단한 연예인 농구팀 피닉스 소속이었다.#
- 친구가 많았으며 여학생에게도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성산중학교 시절 박용하가 체육수업을 하기 위해 그라운드에 나가면, 여학생들이 창문으로 박용하를 보려고 해서 수업이 안됐다고 한다.
- 생전에 NHK에서 겨울연가의 히트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감사패를 수여받았다.
- 2011년 7월 22일자 《댄싱 위드 더 스타》에서 출연자 중 김규리가 그녀의 무대에서 박용하의 곡 <처음 그 날처럼>에 맞춰 룸바를 췄다. 김규리의 어머니가 투병 중일 때 그녀에게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선물을 사 달라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처음 그 날처럼>이 수록되어 있던 올인 OST CD였던 것. 그리고 박용하는 그녀의 어머니가 자신의 노래를 좋아해 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머니의 장례식 때 발인까지 곁을 지켜주었고, 오래되지 않아 자살했다고 한다. 김규리는 "그가 어려울 때 그 곁에 있어 주지 못해서 미안했다"며 심경을 토로했다.
- 오가와 코타와 토마송이 Stars의 앤서송 SKY를 작사, 작곡했다.
- 2004년 규슈 가고시마(鹿兒島)에서 토크쇼를 열었다. 수만 명의 신청자 중 추첨에 당첨된 300명만이 사인회에 참석할 수 있었는데 20여 년간 인공호흡기를 끼고 병상에 누워 있던 이시바시도 운 좋게 당첨된 이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하루 전에 ‘닥터 스톱’이 걸려 참석 못 했다. 행사장에서 관계자로부터 그런 사연을 듣고, 행사 후 가고시마 공항으로 가던 중 스태프들의 반대를 뿌리치고 차량을 병원으로 돌렸다. 그러곤 병상에 누워 있는 이시바시의 손을 10분 동안 꼭 쥐고 떠났다.
* 2005년 월드 왁스 뮤지엄전 때 전시된 박용하의 밀납 인형이다.
* 2010년 5월 8일 디시 갤러리에 인증글을 남겼다.
- 2004년 12월 13일부터 16일까지 열린 ‘한류주간 in 가고시마’ 행사에서 일본 JR큐슈 신칸센 열차에 박용하의 사진이 랩핑 되었다.#
- 2004년 12월 16일 박용하의 사진이 크게 차체에 프린트된 큐슈 신칸센 '츠바메'가 운행을 시작했는데 실물크기의 박용하 사진은 츠바메호 선두와 후미 차량에 총 4장이 붙었으며 20일까지 하루 최대 18회 운행을 했었다.#
- 2009년 해피투게더 출연 당시 학창시절 별명을 묻는 질문에 싸가지라고 대답했다.
- 2009년 2월 8일에 방영한 MBC '놀러와'에 출연한 박용하는 "처음 데뷔가 '테마게임'의 엑스트라였다"는 사실를 공개하며 "1회부터 3회까지 출연했었다"고 털어놨다. 박용하는 "1998년 MBC에서 '보고 또 보고'라는 작품에 참여했는데 출연료가 이상하게 처음 얘기한 것 보다 적더라"며 "매니저랑 이상하게 생각은 했지만 신인이라 물어보지도 못하고 계속 이상하고만 생각했다. 이후도 이런 상황들이 계속됐었다"고 전했다. 알고보니 박용하는 '테마게임'으로 처음 데뷔해 MBC 출연료 책정에 신인개그맨으로 분류가 돼 있었던 것. 박용하는 "한동안 MBC에서 난 개그맨 이었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 2010년 안전지대 내한 공연 당시 인터뷰에서 타마키 코지가 박용하를 처음 만난 건 2005년 코베(神戶)에서 자신의 솔로 공연을 할 때였다고 말했다. 당시 용하 씨의 소년 같은 얼굴과 밝게 웃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고 하며 이후에 함께 밥도 먹고 그러면서 친구가 됐다고 했다. #
- 매년 유족들과 한일 양국팬들이 모여 추도식을 열고 있다.
==# 외모 #==
- 눈매가 선하며 수줍은 미소가 아름다우며 보조개가 있다.
- 손목에 별모양 문신이 새겨져 있다.
- 외꺼풀의 동양적 눈매를 가지고 있다.
===# 마스크 #===
===# 헤어 스타일 #===
4. 취미
- 사진 찍기와 골프가 취미이다.
5. 취향
- 초콜릿을 좋아한다.
- 커피를 즐겨 마신듯 하다.
- 일본의 록 밴드 안전지대의 팬이라고 한다.
- 맥도날드를 좋아한다.
- 카레를 좋아한다.
- 바다를 좋아한다.
- 검은색을 좋아한다.
- 구기 종목을 좋아한다.
[1] 당시 유진은 박용하와의 교제사실을 극구 부인하였으나, 류시원 집들이 사진이 유출되어 열애사실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2] 정확히 '위수정체안'을 앓고 있었는데 안구의 운동조절 장애와 조절기능의 장애로 국방부 징병검사 기준으로는 5급에 해당되어 병역면제 판정에 해당한다.[3] 박용하는 자신에 대한 악플은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 성격이라고 밝혔는데, 이 안티팬은 악플로 부모님까지 건드리자 결국 직접 만나 대화한 것이라고 했다. 악플러는 군입대를 앞둔 젊은 청년이었으며 박용하가 군면제를 받은 것에 불만을 가져 그랬다고.[4] 박효신 曰 주변 사람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5] 박효신도 박용하와 같은 밀양 박씨[6] 박용하 사후 박효신은 이 노래를 부르며 몇 번이나 울었다.#[7] 아베는 2006년 1차 총리 임기 때만 해도 친한파에 가까운 행보를 보였다.[8] Forever은 대만판 OST에만 수록되어 있다.[9] 2009년 1월 방송된 MBC ‘네버엔딩스토리’에서 일본에서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울증으로 힘들어 했던 자신의 속내를 털어놨다. 당시 박용하는 “일본 생활이 길어지고 한류 스타로 인기가 높아지는 만큼 우울증과 자괴감이 커졌다. 한국으로 돌아오고만 싶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10] 제작자 임대표에게 "스케줄이 정말 쉽진 않았지만 일본에서 시놉도 읽어보고 오늘 뵙고 오랜 시간 이야기를 한 후 느낀 바가 있었습니다. 뮤지컬을 처음 마음먹은 작품이 광화문연가여서 함께 하게 됨을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이미 대본 읽었습니다. 너무너무 좋습니다. 내일 일어나 전화드릴게요. 좋은밤 되시길요. 박용하"라는 내용의 메일을 보냈었다고 한다.[11] 메일 보낸 시간이 사망 전 날 밤 10시쯤 이다.[12] 소지섭이 인터뷰에서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