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9-29 02:50:48

박영신(조선)

박영신
朴榮臣
<colbgcolor=#c00d45'><colcolor=#fff> 출생 1578년
사망 1624년 (향년 45세)
황해도 예성강 마탄
인보(仁輔)
시호 충장(忠壯)
본관 밀양 박씨
가족 관계 조부 - 박호(朴虎)
부 - 박종남(朴宗男)
모 - 이세준(李世俊)의 딸

1. 개요2. 생애3. 사후

1. 개요

조선의 무관.

2. 생애

1605년 무과에 급제해 이듬해 선전관, 웅천현감을 거쳤다. 1614년 광해군영창대군을 죽이는데 반대하여 북방의 위원에 유배되었다. 이후 진도로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오위장이 되었으며 경원 부사로 발령받았다. 하지만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가까운 고을을 희망했고 회양 부사로 발령받았으나 이것도 거리가 멀다고 거부해 풍천 부사로 임명되었다.

1624년 이괄의 난이 발발하자 황해도 방어사 이중로의 지휘아래 남하해 오는 이괄의 군대를 마탄에서 묶어놓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파죽지세로 내려오는 이괄의 정예군에 겁을 먹고 도주한 장병들이 제법있었으며 이중로와 함께 장병들을 독려하며 전투에 임했다.

하지만 여울을 이용한 이괄군의 기습으로 대오가 빠르게 무너졌고 이중로는 조총으로 7명의 군관을 사살했고 박영신 역시 활로 저항했으나 이중로는 전사했으며 박영신은 포로로 잡혔다. 이괄이 회유했으나 거부하고 반란군들을 꾸짖었다. 참수형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칼이 여러번 내려처지는 와중에도 숨이 끊어질 때까지 반란군을 꾸짖었다고 하며, 이후 박영신을 포함해 마탄에서 전사한 7인의 장수들은 이수백의 제안으로 효수되어 관군 진영으로 보내졌다.

3. 사후

사후 병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충장의 시호를 내렸다. 금천의 민충사에 배향되었다.

박영신과 이중로 등을 비롯한 관군 장수 7명을 효수할 것을 제안한 이수백은 이후 이괄군이 무악재 전투에서 대패하고 와해되자 도망치던 와중 이괄을 배신하여 이괄한명련 등의 목을 잘라 인조에게 바쳤고, 그 공로로 7년의 유배 끝에 사면되었다. 하지만 이수백의 제안으로 효수된 장수의 후손들은 이수백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겼으며, 결국 1634년 3월, 박영신과 이중로의 아들 5인이 합심하여 백주대낮에 이수백의 목을 베어들고 조정에 자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