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1-27 16:00:38

메흐메드 1세 기라이

1. 개요2. 생애
2.1. 치세
2.1.1. 노가이인 수용2.1.2. 모스크바 약탈2.1.3. 아스트라한 점령과 죽음
2.2. 사후

1. 개요

크림 칸국 게라이 왕조의 5대 군주. 젊은 시절부터 야심을 드러낸 그는 카잔, 노가이, 아스트라한 칸국을 통합하여 1502년 사라진 킵차크 칸국을 재건하려 했으나 아스트라한 원정 중 노가이인의 배신으로 피살당하며 무산되었다.

2. 생애

1456년부터 20여년간 이어진 내전을 종식시킨 멩리 1세의 아들로, 부왕의 칼가 (후계자 겸 공동 군주)로써 1505년 벨라루스 습격과 1507년 러시아 습격 등 여러 원정에 참여하였다. 다만 후자의 경우는 노가이 칸국이 후방을 공격하고, 메흐메드가 말에서 낙마한 후 와병하며 철수해야 했다. 1509년 노가이 칸국이 재차 침공하자 반격에 나서 볼가 강을 건너던 노가이 군대를 격파하였고, 많은 노획물을 얻었다. 이듬해에도 노가이 칸국과 싸워 승리하였다.

연승을 바탕으로 1512년 메흐메드는 러시아를 습격했으나 라쟌의 병력에 격퇴되었다. 1514년 크림 칸국은 세베리아(체르니히우 - 호멜 - 브랸스크 일대)를 상실하였고, 이듬해 메흐메트는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함께 세베리아의 노브고로드 세베르스키와 체르니히우를 포위한 후 일대를 약탈하였다.[1] 1515년 4월, 부왕이 사망하자 페레코프[2] 지협에 있던 메흐메드는 40일간 부고를 숨긴 기간동안 바흐치사라이에 당도하여 칸에 등극하였다.

2.1. 치세

메흐메드는 동생 아크메드를 칼가로 봉하며 외지(Özi)[3]를 영지로 주었다. 하지만 후자는 리투아니아 습격 후 회군하며 모스크바 대공국과 동맹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장남 겜메트를 코스탄티니예로 보내 군사 원조를 청하였다.[4] 1519년 봄 메흐메드는 아들 알프와 바카다이르 휘하의 토벌군을 파견하였고, 아크메드는 페레코프 인근 초원에서 살해되었다. 이후 바카다이르가 칼가로 선임되었다가, 1523년 그가 아스트라한 칸국의 칸에 오르자 알프가 대신하였다.

2.1.1. 노가이인 수용

한편 1519년 카자흐 칸국의 공격으로 볼가강 서안으로 밀려난 노가이 유목민들은 메흐메드에게 복속하며 망명을 신청하였다. 2년 후 카자흐 칸이 사망하자 재차 볼가 동안으로 돌아간 노가이 인들은 복속 약속을 지켰고, 이로써 메흐메트는 볼가강 동안 엠바까지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다. 러시아와 리투아니아에 습격을 지속하던 메흐메트는 카잔으로 눈을 돌렸다.

2.1.2. 모스크바 약탈

1519년 모스크바의 바실리 3세가 자신에게 피신해온 샤 알리를 카잔 칸으로 추대하자 카잔의 현지 미르자 (왕공)들이 메흐메드에게 크림 왕실 중 하나를 보내주면 대신 칸으로 삼겠다고 제안하였다. 이에 1521년 봄, 메흐메드는 동생 사힙을 카잔으로 파견하였고 그는 현지인들의 도움으로 손쉽게 샤 알리를 축출하고 집권하였다. 이후 메흐메드와 사힙은 함께 모스크바 대공국을 공격하였고, 후자는 니즈니 노브고로드블라디미르를 점령하고 불태웠다.

같은해 7월, 10만에 달하는 크림-노가이-리투아니아 연합군이 오카 강을 건너 북상하여 콜롬나에서 합류한 후 모스크바로 진군하였다. 놀란 바실리 3세는 모스크바를 떠나 볼로콜람스크로 피신하였고, 모스크바는 8월 1일부터 12일까지 약탈을 당하였다. 다만 바실리 3세가 군대를 모아 돌아오자 연합군은 모스크바에서 물러나 콜롬나, 보브롭스크, 카쉬라, 라쟌 지역을 약탈하였다. 그리고 메흐메드는 라쟌 포위가 실패하자 엄청난 수의 포로들과 함께 회군하였다.

2.1.3. 아스트라한 점령과 죽음

1522년 말엽 메흐메드는 아스트라한 원정을 결정하였고, 노가이 왕공 아기쉬 및 마마이가 합류하였다. 이듬해 봄, 메흐메트가 대군을 이끌고 아스트라한에 나타나자 칸 후세인은 도주하였다. 도시를 무혈 점령한 메흐메트는 장남이자 칼가인 바카다이르를 아스트라한 칸에 봉하였고, 자만에 가득차 군대 대부분을 해산하였다. 한편 크림 칸국의 커져가는 위세에 불안했던 아기쉬와 마마이는 메흐메트와 바카다이르를 성밖으로 유인하여 친위대를 포함한 그들을 학살하였다.

2.2. 사후

잔존 크림 군대는 도시에서 축출되어 흩어졌고, 메흐메드의 아들 가지와 바바가 50인의 미르자를 포함한 잔여 병력과 회군하였다. 그들을 추격한 노가이 군대는 크림 칸국을 습격했으나 도시들을 점령하는 데는 실패하고 철수하였다. 이후 메흐메드의 아들들인 가지, 이슬람, 사데트, 사힙이 내전을 벌이다 1532년 막내 사힙이 승리하여 칸에 올랐다.

[1] 도시를 포위해서 병력을 성 안으로 몰아넣은 후 일대를 약탈하는 것은 크림 칸국의 전통적인 전술이었다[2] 혹은 프리오브라젠카[3] 현재 우크라이나 오차키우.[4] 아크메드의 반란은 모스크바 대공국의 바실리 3세, 폴란드 왕국지그문트 1세 등이 관여한 국제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