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7 00:11:07

리산드로스

1. 개요2. 생애
2.1. 성장 배경2.2. 해군 사령관2.3. 아테네의 항복2.4. 왕제 개혁의 실패2.5. 말년과 최후

1. 개요

고대 그리스 스파르타의 장군.[1]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에 활약한 명장으로, 페르시아로부터 지원받은 자금으로 막강한 함대를 조직하고 아테네 함대를 격파하여 최종적으로 항복을 받아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펠레폰네소스 전쟁의 종지부를 찍은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런 엄청난 전과를 바탕으로 스파르타의 왕들을 밀어내고 자신이 실권을 장악하려는 야심까지 품었다. 그러나 자신이 추대한 왕인 아게실라오스에게 사실상 숙청을 당하면서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코린토스 전쟁 초기에 허망하게 전사한다.

동시기에 활동한 아테네의 명장 알키비아데스와 마찬가지로 그 평가가 크게 엇갈리는 인물이다. 그가 보여준 군사적 전략과 정치적 수완은 의심할 여지 없이 빼어났고, 그 전공도 엄청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 반면에 자신의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을 뿐 아니라, 그가 건설한 스파르타 제국아테네 제국에 비해 더 많은 모순과 한계점에 부딪혀 곧 단명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플루타르코스는《리쿠르고스전》에서 "리쿠르고스가 스파르타인에게 가르쳐준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이 리산드로스가 아테네에서 약탈해 온 로 인해 잊혀졌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2. 생애

2.1. 성장 배경

리산드로스의 유년기와 청년기에 대해 알 수 있는 기록은 많지 않다.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따르면, 리산드로스는 아리스토클레이토스의 아들로, 그의 가문은 헤라클레스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명문가였다. 그러나 이름만 번듯할 뿐 그의 집안은 스파르타 왕가에 속하지도 못했고 매우 가난한 흙수저 집안으로 알려져 있다. 심지어 그의 어머니가 스파르타 시민도 아닌 노예 계급인 헤일로타이라는 풍문도 있을 만큼 리산드로스의 성장 환경은 궁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산드로스는 남자다운 기개가 있었으며 물욕이 적었고 그 대신 명예욕이 매우 강한 인물로 성장했다. 일반적으로 과묵한 스파르타인들과는 달리 그는 언변에 능했으며 필요할 때에는 권력자 앞에서 아부를 하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챙기는 정치적 수완이 있었다. 이에 대하여 플루타르코스는 "그는 보통의 스파르타인들이 하는 것 이상으로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선천적으로 친근하게 대했다. 그리고 이익을 위해서라면 과도한 권위도 기꺼이 참았다."라 말하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경쟁심과 야망에 불타는 청년기를 보냈으며, 명예와 권력을 열렬히 추구했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난 리산드로스가 고위직으로 출세할 수 있었던 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비록 몰락한 가문이라곤 하지만 혈통으로는 귀족에 가까웠기 때문에 고위층과 접촉하기 쉬웠고 덕분에 집안이 가난하다고 하더라도 아버지의 지인들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는 추측이 바로 그 것이다. 특히 그가 스파르타의 왕 아기스의 이복동생 아게실라오스동성연인 관계였기에 그로부터 강력한 후원을 받았다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훗날 리산드로스는 아기스가 죽은 후 아게실라오스의 즉위에 적잖은 기여를 하기도 했다.

2.2. 해군 사령관

기원전 408년, 리산드로스는 스파르타 해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스파르타는 전통적인 육군 강국이었지만, 리산드로스는 아테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해군력의 증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듯 싶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스파르타는 해전에서 아테네에게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으나 리산드로스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에서 소아시아 지역을 통치하던 사트라프인 젊은 키루스[2]와 친교를 맺어 막대한 자금을 지원받았고 이를 토대로 아테네에게 큰 피해를 입은 스파르타 함대를 재건 및 증강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기원전 406년, 아테네 측의 함대를 이끌던 사령관인 알키비아데스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다. 이때 알키비아데스의 부장인 안티오코스가 사령관을 대신해서 아테네 함대를 지휘하고 있었는데, 그는 공명심에 눈이 멀어 알키비아데스의 지시를 무시하고 스파르타 함대를 선제 공격했다. 리산드로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노티움 해전에서 아테네 함대를 크게 격파하는데 성공했다. 이 일로 말미암아 알키비아데스는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 쓰고 아테네 정계에서 축출당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법률상 해군 사령관의 임기는 1년 남짓한 기간에 불과했기 때문에 후임자인 칼리크라티다스에게 자신의 자리를 넘겨줘야 했다. 리산드로스는 자신의 전과를 내세우며 임기를 조금 더 연장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치졸하게도 키루스 왕자로부터 지원받은 자금을 모두 페르시아에 반환해버리는 등 뒷끝을 부렸다. 결국 그해 겨울에 스파르타 함대는 아르기누사이 해전에서 아테네 함대에게 참패를 당해 70척의 배를 잃고 사령관 칼리크라티다스마저 전사했다. 결국 스파르타 측은 앞서 함대의 운영과 해상 전술에 비상한 수완을 보여준 리산드로스를 다시 해군 사령관으로 임명할 수밖에 없었다.

2.3. 아테네의 항복

기원전 405년, 해군 사령관으로 복귀한 리산드로스는 다다넬스 해협에 위치한 아테네의 해군기지 아이고스포타모이를 기습 공격했다.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에서 리산드로스는 아테네 함대를 하루아침에 괴멸시켜 사실상 재기불능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이 전투에서 아테네 선박 160척이 나포되었으며 지휘관인 필로클래스를 위시한 3,000 ~ 4,000명에 달하는 아테네 해군이 포로가 된 후 처형되었다. 이 한판 승부로 아테네 해군을 분쇄한 리산드로스는 소아시아에 분포한 여러 그리스 도시에서 아테네 인들을 몰아내고 스파르타의 예속 하에 놓은 후 자신을 지지하는 인사들로 구성된 과두파 집단인 10인 위원회와 지사들로 하여금 이를 통치하게 했다.

당시 아테네 인들이 겪은 충격은 엄청났다. 패전의 소식이 전해진 당일 밤에는 그 어느 아테네 시민들도 잠을 이루지 못했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들의 사기가 곤두박질쳤음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리산드로스는 이와 같은 여세를 몰아 적극적으로 아테네의 해상 교통로와 공급망을 공략했다. 그는 곧장 사로니코스 만으로 진격하여 아이기나 섬을 점령하고 페이라이에우스 항구를 봉쇄해 아테네의 식량 공급을 차단했다. 스파르타 군이 아테네 성벽 앞까지 도달한 상태에서 식량마저 소진되자 아테네 측은 결국 무조건 항복을 할 수밖에 없었다.[3]

기원전 404년, 아테네의 항복과 함께 민주정이 무너지자 리산드로스는 아테네의 과두파와 귀국한 유형자들을 지원하여 이른바 30인 참주정을 세워 아테네를 통제하고자 하였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아테네 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리산드로스였지만, 30인 참주정을 지지했던 아테네 과두파는 쌍수를 들고 그를 환영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만찬에 그를 초대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30인 참주정은 반대파들을 상대로 무자비하게 처형을 남발하는 등 갖은 폭정을 일삼았던 탓에 민심을 잃었고 추방당했던 민주파 아테네인들이 군대를 결성하여 이에 맞서 싸웠다. 결국 이 참주정은 채 1년도 가지 못하고 이듬해인 기원전 403년에 지도자인 크리티아스의 전사와 함께 붕괴되었다. 스파르타는 이를 빌미삼아 아테네와 피레우스 전투에서 맞붙어 승리를 거두었으나 양측의 피해가 모두 컸다. 결국 스파르타의 왕 파우사니아스는 아테네 민주정의 부활을 허용했다. 리산드로스는 이에 반대했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4]

2.4. 왕제 개혁의 실패

이 시기에 이르러 리산드로스의 권력은 절정에 달했다. 막강한 함대를 조직해 아테네를 격파한 그는 스파르타의 제국주의 정책을 밀어붙이며 스파르타의 국가적 근본을 뒤흔들어 놓았기에 당연한 결과였다. 사모스 섬은 사실상 리산드로스의 사유지나 다름이 없었고, 리산드로스는 그 곳에 위치한 궁궐처럼 거대한 저택에 거주하는 등 마치 왕과 같은 위세를 누렸다. 심지어 사모스 인들은 해마다 헤라 여신에게 바치던 제전의 이름을 리산드로스 제전으로 바꾸어 그에게 신과 같은 영예를 주었다.

그러나 그의 거대한 권세와 야심은 스파르타 본국에 있던 왕과 귀족들의 질시를 받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리산드로스가 누리고 있던 원정군 장군의 지위도 결국은 임기가 정해진 임시직에 불과했기에 그의 권력에는 큰 제한이 있었다. 결국 임기를 채우고 공직에서 물러난 리산드로스는 자신의 한계점을 극복하고자 왕제 개혁을 은밀히 추진했다. 그는 스파르타의 세습왕제를 폐지하고 선거왕제의 규칙을 세운 후 자신이 왕으로 선출되어 권력을 장악하려고 했던 것이다. 리산드로스는 단순한 무력충돌 보다는 종교적 권위에 의존하여 깔끔하게 왕제를 개혁하려 했고, 때문에 델포이의 신관들을 매수해서 스파르타의 왕제를 개혁하라는 신탁을 내리도록 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한 신관이 리산드로스를 배반하는 바람에 신탁을 받지 못했고 왕제 개혁도 실패로 돌아갔다.

기원전 399년, 스파르타의 아기스 2세가 사망했다. 리산드로스는 비록 왕제 개혁에는 실패했으나 그 대신에 자신의 뜻대로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왕을 내세워 배후의 실권자로 군림하려 했다. 그렇게 하여 왕위에 오른 인물이 바로 아기스의 이복형제인 아게실라오스 2세였다. 아게실라오스는 체구가 작고 한쪽 다리마저 불구였기에 본래 스파르타의 전통에 따르면 결코 왕이 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리산드로스와는 동성 연인 관계로서 일찍부터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리산드로스로서는 가장 믿음직한 왕위 계승자였다. 결국 리산드로스는 실력을 발휘해 자신의 뜻을 관찰시키는데 성공했다.[5] 그러나 리산드로스가 간과한 점이 있다면, 아게실라오스 또한 리산드로스에 뒤지지 않는 야심가였다는 점이다. 그는 비록 몸은 불편했음에도 아고게를 수석으로 이수할 정도로 의지력이 강했으며 정치적으로도 치밀했고 군사 지휘관으로서도 우수했다. 그는 권력을 두고 리산드로스와 경쟁하는 등 좀처럼 그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한편 아게실라오스 즉위 직후에 스파르타에서는 키나돈의 반란 모의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리산드로스의 승전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리산드로스가 아테네의 항복을 받아내면서 그에 따라 전리품으로 챙겨온 막대한 재화와 부가 스파르타에 유입되었다. 그러나 철저한 병영국가로서 모든 시민들이 경제활동보다 병역 활동에만 집중했던 스파르타에 갑자기 밀어닥친 부유함은 곧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재산을 모두 잃고 파산하여 시민권을 박탈당한 사람들이 생겨났다. 키나돈은 바로 이런 스파르타의 하이포메이온(시민권 박탈자)에 속하는 자였다. 리쿠르고스의 개혁 이래로 늘 가난했던 스파르타인들은 이런 경제적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알지 못했고, 키나돈은 이런 상황에 분노하여 반란을 꾀하고 시민권을 되찾으려 한 것이다. 비록 이 반란 음모는 곧 정보가 세어나가 진압되었으나 펠레폰네소스의 승전이 스파르타에 끼친 예기지 못한 악영향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가 되었다.

2.5. 말년과 최후

기원전 396년, 아게실라오스는 2000명의 군사들 및 리산드로스를 포함한 30명의 참모진을 거느리고 페르시아의 소아시아 연안에 대한 원정을 실시했다. 리산드로스는 왕의 고문으로서 자신이 군사 지휘권을 장악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참전했으나 그로서는 전혀 예기치 않은 결과가 기다리고 있었다.

원정에 나선 아게실라오스는 이오니아 일대를 순방하면서 사람들이 자신보다 리산드로스를 더욱 환영하는 것을 보고는 큰 위협과 분노를 느꼈다. 자존심 강한 아게실라오스는 이후로 리산드로스의 조언을 거의 듣지 않았으며, 그를 참모진에서 배제하고 한직으로 밀어내는 등 사실상 숙청을 개시했다. 이미 많은 정적들의 질시를 받고 있던 리산드로스는 이 사건으로 실권을 거의 잃고 말았다. 한편 아게실라오스는 그 자신이 뛰어난 장군이었기에 프리기아를 점령하는 등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고 이듬해인 기원전 395년에는 사르디스 부근에서 페르시아의 사트라프인 티사페르네스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아테네와 테베가 동맹을 맺고 스파르타의 패권에 도전해왔기 때문에 (코린토스 전쟁) 결국 아게실라오스와 리산드로스는 소아시아를 포기하고 그리스 본토로 돌아가야 했다.

그 해에 리산드로스는 아게실라오스 왕보다 한발 앞서 그리스 본토로 돌아가 파우사니아스 왕[6]과 보이오티아의 할리아르토스에서 합류한 후 테베를 향해 진격하고자 했다. 그러나 파우사니아스 왕의 진격이 늦어지자 리산드로스는 그를 기다리지 않고 혼자 할리아르토스의 성벽에 주둔하던 테베군을 공격했다. 그러나 리산드로스는 한창 성벽을 공겨하던 중 성 바깥에 주둔하던 테베군으로부터 예상치 못한 습격을 받아 참패하고 그 자신도 전사하고 말았다. 아테네 제국을 무너뜨리고 스파르타의 패권을 확립했던 그의 업적에 비하면 허무하고 어이없는 최후였다.

리산드로스가 예상치 못하게 패사하자 당황한 파우사니아스 왕은 협상을 맺고 회군했다가 패전의 책임을 뒤집었고 탄핵당해 망명길에 올랐다. 파우사니아스 왕이 사라지자 그의 아들인 아게시폴리스가 왕위에 올랐으나 나이가 어려 직무를 수행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결국 아게실라오스는 어린 아게시폴리스 몫의 권력까지 모두 거머쥐면서 사실상 스파르타의 유일왕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뒤늦게 귀국한 아게실라오스는 곧장 리산드로스의 가택을 수색할 것을 명했는데, 예상과는 달리 리산드로스의 살림살이는 매우 검소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발견된 문서를 통해 그가 스파르타의 왕들을 몰아내고 선거왕제를 수립하려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스파르타 내에서 그의 명예는 바닥까지 떨어졌다. 그 사건의 여파로 그리스의 여러 명문가들과 약속되어 있던 리산드로스의 딸들의 약혼이 모두 깨지고 말았다.

[1] 생몰년도: ? ~ B.C. 395[2] 페르시아 왕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동생으로, 키루스 대왕과 구분하기 위해 흔히 젊은 키루스라 불린다. 훗날 크세노폰 등의 그리스 용병들을 고용해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전사했다.[3] 아테네 인들은 리산드로스가 포로들을 학살하는 것을 보곤 스파르타에게 항복할 경우 아테네의 전지역이 쑥대밭이 되고 시민들은 모두 죽거나 노예가 되리라 겁을 먹은 상태였다. 실제로 아테네 인들은 약소 도시국가들을 침공하여 멸망시킨 후 그런 짓을 자주 저질렀다. 그런데 막상 스파르타가 아테네의 항복을 받아낸 후 처한 조치들은 아테네의 성벽을 파괴하고 군선 12척을 제외한 해군을 해체하는 등 상대적으로 관대한 편이었다. 무엇보다 아테네는 국외의 영토와 식민지를 잃긴 했어도 형식적인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는 스파트라 인들이 더 이상 아테네를 큰 위협을 여기지 않았고 또한 페르시아 침공 격퇴에 큰 기여를 했음을 인정했기 때문일 것이다.[4] 30인 참주정이 붕괴하고 아테네 민주정이 부활한 후 이름 높은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처형되었다. 이는 참주정의 지도자였던 크리아티스가 바로 그의 제자였다는 정치적인 이유가 크게 작용했다.[5] 본래 아기스 2세에게는 아들 레오티키다스가 있었으나, 레오티키다스는 아기스의 친자식이 아니라 왕비가 알키비아데스와 간통해서 얻은 자식이라는 루머가 있었다. 실제로 아기스 2세 또한 레오티키다스를 친자로 인정하지 않다가, 죽기 직전에야 겨우 그를 친아들이 맞다 인정했다. 이를 근거로 아게실라오스는 레오티키다스의 혈통 및 왕위 승계 자격에 의문을 제기하며 자신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레오티키다스를 지지한 파벌에서는 '신탁에 의하면 스파르타 왕위에 절름발이를 앉힐 수 없다'며 맞섰다. 이 때 리산드로스가 나서서 '신탁에서 말한 절름발이란 스파르타의 두 왕위를 사람의 두 다리에 빗댄 것으로, 아테네인의 사생아가 왕위에 오르면 스파르타는 한쪽 다리가 온전치 못한 절름발이 꼴이 날 거라는 뜻이다'라는 주장을 펼쳐 아게실라오스를 지지하여 기어이 그를 왕위에 앉혔다.[6] 당시 스파르타는 2명의 왕이 각기 종교와 전쟁을 담당했다. 파우사니아스 왕은 종교를 맡고 있었고, 아게실라오스는 전쟁을 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