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前 축구선수 | ||
이름 | 레오 할러 Leo Halle | |
본명 | 레오나르트 헤르만 게리트 할러 Leonard Herman Gerrit Halle | |
출생 | 1906년 1월 26일 / 네덜란드 데번터르 | |
사망 | 1992년 6월 15일 (향년 86세) | |
국적 | 네덜란드 | |
신체 | 키 184cm | 체중 90kg | |
직업 | 축구선수 (골키퍼 / 은퇴) | |
등번호 | -[1] | |
소속 | 선수 | 고 어헤드 이글스 (1923-1939) |
국가대표 | 15경기 (네덜란드 / 1928~19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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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네덜란드의 전 축구선수.2. 생애[2]
2.1. 선수 생활
2.1.1. 클럽
지금의 고 어헤트 이글스는 에레디비시와 에이르스터 디비시를 왔다갔다하는 그저 그런 클럽이지만 할러와 얀 더크레이크(Jan de Kreek), 레오의 형 얀이 뛰던 1930년대에는 네덜란드 축구 챔피언십 우승도 노릴 만한 전력의 팀이었다.할러는 14살부터 고 어헤트 이글스 소속이었고 17살이던 1923년부터 1군팀에 소속되었다. 할러는 고 어헤트 이글스의 2차례 챔피언십 우승 당시 주역이었으며 16년간 고 어헤트 이글스에 소속되어 있었다.
2.1.2. 국가대표팀
할러는 바크하위스, 판넬런과 함께 1928년 이탈리아를 상대로 국가대표팀에 데뷔했다. 산 시로에서 열린 이 경기에서 네덜란드는 훌리오 리보나티, 아돌포 발론체리에게 골을 허용하며 2대3으로 이탈리아에 패배했다.산 시로의 사자라는 별명도 얻고 귀국길에서 큰 환영을 받을 정도로 데뷔전에서 뛰어난 플레이를 펼쳤지만 당시 대표팀에는 만만찮은 경쟁자 판데르묄런이 있었다. 판데르묄런이 대표팀 주전으로 뛰는 동안 할러는 계속 후보에 머물렀으며 이 구도는 월드컵까지 계속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월드컵에서 할러가 주전으로 장갑을 낄 것으로 예상했지만 월드컵에서도 글렌드닝 감독의 선택은 판데르묄런이었고 네덜란드는 스위스에 2대3으로 패했다.
월드컵을 끝으로 판데르묄런이 대표팀에서 밀려난 후 할러는 기회를 잡았고 그의 다음 국가대표팀 경기는 11월의 스위스 원정 경기였다. 이 리벤지 매치에서 할러는 네덜란드의 골문을 지키며 4대2로 네덜란드의 승리를 이끌어 복수에 성공했다.
A매치에서 아일랜드 자유 주와 프랑스를 상대로 2경기 연속으로 페널티 킥을 막아내기도 했던 할러는 폐렴 투병으로 대표팀에서 한달반 정도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 폐렴으로 인한 후유증은 커리어 내내 할러를 괴롭혔으며 재발을 막기 위해 할러는 유니폼 안에 수영복을 입기도 했다.
할러는 총 15경기에 출전했으며 그의 마지막 A매치는 1937년 10월의 프랑스전이었다. 이 경기에서도 네덜란드는 프랑스에 2대3으로 패했다.
2.2. 은퇴 이후
은퇴 이후 할러는 여러 아마추어 클럽에서 코치로 있었으며 협동조합에서 30여년을 일했다. 또한 운전 기사로도 자동차 수리점과 영화 제작사에서도 일했다.1986년부터 고 어헤트 이글스의 특별석 이름이 레오 할러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말년의 할러는 파킨슨병을 포함한 여러 질병으로 고생하다 1992년에 사망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De leeuw van Deventer(데번터르의 사자)[3]라고 불리던 골키퍼. 30년대 고 어헤트 이글스의 넘버원 골키퍼였으며 당당한 체구와 두꺼운 가슴둘레, 큰 손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다소 둔해 보이는 체구였지만 몸놀림이 경쾌했고 안정감도 좋았다.4. 뒷이야기
- 1933년 나치당이 독일을 장악했을 무렵부터 할러는 이들의 출현을 탐탁지 않아했다. 독일 대표팀이 할러와 같은 호텔에 머물렀을 때 그들이 독일 국가와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를 부르자 그들을 피했다고 전해진다.
5. 사생활
할러는 1933년에 결혼했고 세 딸과 아들 하나를 두었다. 하지만 그 중 딸 하나는 태어나자마자 사망했다.전쟁 시절에 여느 네덜란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할러의 가족들도 식량이 부족해서 고생했고 고기 공장에서 운전 기사로 일하면서 공장에서 나온 뼈로 수프를 끓여 먹으며 연명했다. 그리고 이 뼈 수프를 다른 이웃들에게도 나눠줬다고 한다.
할러는 친절하고 유머 감각도 넘치는 사람이었으며 2차 대전때의 수프처럼 다른 이들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했다. 돈을 많이 모으지 않은 것에 후회는 없다는 생전의 인터뷰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내는 그 생각을 탐탁지 않아했다고.
6. 수상
6.1. 클럽[4]
- 네덜란드 축구 챔피언십 우승 2회: 1929-30, 1932–33
- 네덜란드 축구 챔피언십 준우승 2회: 1928-29, 1934-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