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에서 볼셰비키에 대한 리투아니아의 승리 이후 서러시아 의용군의 전선에 더 많은 병력을 배치할 수 있었다. 카지스 레이디가는 새로운 전선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11월 20일에 제 2보병연대에게 라드빌리슈키스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라고 명령했다. 서러시아 의용군들이 후퇴할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에 전투는 젊고 경험이 부족한 병사들로 구성된 제1대대에 맡겨졌다.
11월 21일 오후 3시, 제2보병연대를 앞세워 샤울리아이 방향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세라피나스 오젤라스 중위의 부대는 지역 리투아니아 농부의 인솔을 받아 라드빌리슈키스로 향했다. 그리고 세라피나스 오젤라스 중위는 라드빌리슈키스를 돌파하였지만 아직은 공격하기 부적합하다. 판단하여 그옆에 있던 묘지를 점령했다. 하지만 서러시아 의용군의 매복으로 오젤라스 중위는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3] 오후 9시경 또 다른 공격을 했지만 서러시아 의용군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레이디가는 공세를 미루고 제1보병연대의 제3대대 제1대대의 예비군을 소집하기로 결정했다.
공세는 11월 22일 오전 7시에 시작되었다. 포병 지원으로 군대가 시가지로 침입하여 교란작전을 펼쳐 서러시아 의용군의 병력을 분산시켰음. 그시각 제2보병연대 제2대대는 라드빌리슈키스 벌판을 점령했다. 그후 보병 중대가 도시를 포위하면서 오전 12시 새로운 공세가 시작되었으며 전투는 마이로니스 거리의 기관총으로 무장된 풍차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풍차에서 저항을 하였지만 압도적인 수량에 밀려 도시로 후퇴하였다. 프랑스 장군 앙리 니셀은 서러시아 의용군들에게 "싸움을 중단하면 독일로 안전하게 송환해주겠다."라 설득하였고 서러시아 의용군들은 이를 받아들여 현재의 쾨니히스베르크로 귀국하게 됨[4]
[1] 그 키스가 아니다.[2] 당시 전투를 그린 그림[3] 나중에 지휘관 중위는 사후 비티스 십자가를 받았다.[4] 파벨 베르몬트-아발로프는 메멜로 도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