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디에고 페르난데스 데 메드라노 Diego Fernández de Medrano | |
| 성명 | 디에고 페르난데스 데 메드라노 Diego Fernández de Medrano |
| 출생 | 1545년경 |
| 스페인 제국 소리아도 히노호사 델 캄포 | |
| 사망 | 1588년 (향년 42~43세) |
| 대서양 | |
| 아버지 | 후안 페르난데스 데 메드라노 |
| 형제 | 토마스, 프란시스코, 라사로 |
| 직위 | 산티아고 기사단 기사, 스페인 함대 사령관. |
1. 개요
스페인 제국의 제독. 16세기 후반 스페인 해군의 저명한 사령관으로, 레판토 해전을 포함한 무슬림과의 주요 군사 작전과 이탈리아, 포르투갈 해안에서 벌어진 해전에 활약했다. 이후 스페인 대함대의 1차 잉글랜드 원정에 참여했고, 스페인으로 돌아가는 항해에서 임시 총사령관을 맡았다.2. 생애
1545년경 스페인 제국 소리아도 히노호사 델 캄포에서 대영주 후안 페르난데스 데 메드라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속한 메드라노 가문은 시에라 데 카메로스와 소리아도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 가문으로 손꼽혔다. 그들은 영주권을 관리하고 옥수수 재배와 양 사육을 주요 사업으로 삼았다. 양 15,000마리를 포함한 그들의 가축은 그 땅에서 방목되었고, 그들에게 기용된 양치기들은 라만차의 엑스트레 마두라 목초지나 알쿠디아의 왕실 계곡을 전전했다.디에고 페르난데스의 첫 번째 형제인 토마스 페르난데스 데 메드라노는 요한 기사단 기사, 고등 행정관, 발데오세라의 부관, 사보이아 공작과 공자의 국무장관 및 전쟁장관을 역임했으며, 제노바 출신의 제독 조반니 안드레아 도리아의 갤리선에서 복무했다. 그리고 두 번째 형제 프란시스코 페르난데스 데 메드라노는 레가잘의 영주였으며, 파르마 공작 알레산드로 파르네세의 지휘 하에 위그노 전쟁에 참전했다. 세 번째 형제 라사로 페르난데스 데 메드라노는 소위로 복무했으며, 발데오세라의 영주인 디에고 로페스 데 메드라노 이 우르타도 데 멘도사의 지부에 등록되었다. 프란시스코 페르난데스 데 메드라노의 아들이자 디에고 페르난데스의 조카인 디에고 페르난데스 데 메드라노 이 에스피노사는 명예 사제, 왕실 예배당 판사, 궁정 왕립 병원 관리자, 스페인 왕비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 여대공의 유언장 집행자를 맡았다.
디에고 페르난데스의 친척들도 하나같이 거물이었다. 가르시아 데 메드라노 이 카스테혼은 산 그레고리오 영주이자 소리아도의 검찰관, 카스티야 왕립 코르테스 의원이자 법무부 장관이었으며, 알론소 몰리나 데 메드라노는 종교 재판관, 카스티야 왕립 코르테스 의원, 인도 왕립 의회의 의원이자 초대 내각 장관을 역임했다. 마르틴 데 메드라노는 로프 무역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며, 마르틴의 여동생 카탈리나 데 메드라노는 1597년부터 1503년까지 이사벨 1세 여왕의 왕실 의상에 고급 천을 제공했다. 푸엔마요르와 알마르사 데 카메로스의 영주 에르난도 데 메드라노도 그의 친척이었다. 옛 나바라 왕국에도 많은 친척이 있었다. 유명한 작가, 시인, 탐험가인 줄리안 이니게스 데 메드라노, 마우무송의 영주이자 나바라의 메드라노 양털 기사인 후안 벨라즈 데 메드라노 이 에사우즈, 아구스키샤, 오렌다인, 레아르사의 영주인 하이메 벨라즈 데 메드라노 이 에샤우즈가 대표적인 인사였다.
디에고 페르난데스는 일찍이 해군에 입대해 25년간 해군 장교로서 활약했다. 1571년, 레판토 해전에 참여한 그는 '포르투나 데 나폴리'로 명명된 나폴리 갤리선 4척과 선원 400명, 대포 110문, 갤리선 노예 900명을 이끌고 마르틴 데 카이데 휘하의 '멘도사 데 나폴리', 그리고 디에고 로페스 데 야노스 휘하의 '루나 데 에스파냐' 함대와 함께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의 기함을 둘러싼 16척의 스페인 및 나폴리 갤리선의 중앙 부대를 형성했다. 그는 이 해전에서 최선을 다해 싸워서 아군의 승리에 공헌했다. 1573년에는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의 튀니스 원정에 참여해 그곳을 정복하는 데 일조했다.
1576년, 초대 산타크루스 후작 알바로 데 바잔 이 구즈만의 지휘하에 몰타로 이동한 후 4,000 병사를 이끌고 케르케나 제도에 대한 원정을 벌였다. 그는 상륙 작전 중에 다쳤지만, 군대는 무어인들을 몰아내고 케르케나 제도를 확보하고 귀중한 전리품을 획득했다. 1583년 스페인 제국의 아소르스 제도 정복에서 산타크루스 후작의 지휘를 받으며 갤리선 12척을 이끌었다. 그는 상륙 작전 때 적절한 상륙 지점을 선택하고, 플라야(Plaía)를 향해 허세 공격을 실행하고, 교두보를 신속하게 방어하고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스페인 육군이 진군할 때 보급을 책임져서 그들이 아소르스 제도에서 가장 큰 섬인 테르세이라 섬을 접수하여 아소르스 제도 전체의 복종을 끌어내는 데 일조했다.
1588년 초,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는 디에고 페르난데스가 오랫동안 해군에 복무했고, 테르세이라 섬에서의 승리를 기려 산티아고 기사단의 기사에 선임했으며, 잉글랜드로 진군할 스페인 함대 소속 포르투갈 갤리선 4척의 지휘관으로 선임했다. 이 함선들은 총 362명의 선원과 888명의 갤리선 노예가 탑승했고, 20문의 대포로 무장했으며, 1,200개의 포탄, 60단위의 화약, 20단위의 납, 20개의 밧줄을 실었다. 이에 디에고 페르난데스는 1588년 2월 7일 리스본에서 펠리페2세에게 아래의 서신을 보냈다.
폐하, 돈 알론소 데 바잔으로부터 폐하께서 제가 이 원정에서 갤리선 지휘를 맡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저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해 폐하의 발에 겸허히 입을 맞추나이다. (중략) 폐하께서 저의 품격과 명예에 걸맞은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하옵니다. 그리고 기독교 세계가 필요로 하고 이 가신이 바라는 대로, 하느님께서 폐하의 수명을 연장하시고 더 큰 영토와 영주권을 주시기를 간구하옵나이다.
리스본, 1588년 2월 7일. 디에고 페르난데스 데 메드라노.
리스본, 1588년 2월 7일. 디에고 페르난데스 데 메드라노.
본래 잉글랜드를 침공할 스페인 대함대 총사령관은 산타크루스 후작 알바로 데 바잔 이 구즈만이었지만, 1588년 2월 9일 산타 크루스 후작이 급사한 뒤 2월 14일에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 알론소 데 구즈만 이 소토마요르가 새 사령관으로 선임되었다. 해전 경험이 일천했던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은 해전에서 25년의 경험을 가진 디에고 페르난데스 데 메드라노의 조언에 크게 의존했다. 그의 함대는 디에고 플로레스 데 발데스가 지휘하는 카스티야 함대의 우현에 배치되었다. 5월 말, 디에고 페르난데스는 함대와 함께 리스본에서 출항하여 5월 29일 카스카이스에 도착했다. 이후 영국 해협으로 떠나기 전,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은 그에게 해협에서 4리그(1.6km) 떨어진 무시아만에서 자신을 기다리라고 지시했다. 무시아만에서 몇 주간 있던 그는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으로부터 본 함대가 폭풍 때문에 라코루냐로 피신하고 있으니, 라코루나로 당장 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따라 라코루냐로 향하던 중 잉글랜드 선박 2척과 만나 그들을 나포했다.
6월 17일 디에고 페르난데스의 함대가 라코루냐에 도착했고, 주력 함대는 다음 날 라코루냐에 이동했다.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은 라코루냐에서 폭풍으로 흩어진 함대를 수습했고, 디에고 페른나데스와 그의 갤리선들은 화물 적재와 하역을 도왔다. 또한 스페인 장군 회의는 디에고 페르난데스의 개릴선 카피티나에서 종종 열렸는데, 특히 7월 18일에 전투 대형을 선봉대, 주력 전투단, 후위대의 세 개 전대로 변경하기로 만장일치로 합의했다.
1588년 7월 21일, 스페인 대함대가 재출항해 영국 해협으로 향했다. 7월 22일, 디에고 페르난데스의 갤리선 함대가 뒤따라 출진했다. 7월 23일, 강한 순풍이 불어서 큰 배가 순탄하게 이동할 수 있게 했지만, 노후화된 갤리선에는 어려움을 안겨줬다. 같은 날, 디에고 페르난데스의 함대에 소속된 다이애나호는 심하게 누수되기 시작해 비베로로 우회해서 수리 후 리스본으로 보내졌고, 더 이상 작전에 참여하지 않았다. 디에고 페르난데스의 나머지 갤리선 3척은 큰 문제 없이 계속 항해했다. 기록에 따르면, 그의 함대는 앞돛대(트린퀘테스)만 사용하여 항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돛을 단 다른 배들보다 더 빨리 움직였다고 한다.
그러나 7월 26일 폭풍이 불면서 상황은 어려워졌다. 다음 날 폭풍은 더 심해졌고, 거친 파도가 함대를 강타했다. 디에고 페르난데스의 갤리선들은 7월 26일 내내 시야를 확보했지만, 기상이 악화하고 비가 내려서 시야가 좁아지면서 해 질 무렵에는 연락이 두절되었다. 그들은 피난처를 찾아 프랑스 해안으로 우회했다. 그 후 대함대 부사령관 후안 마르티네스 데 레칼데에게 배들이 폭풍을 헤쳐 나가는 와중에 누수되어 상태가 위험해졌으니, 함대를 떠나는 걸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의 요청은 받아들여졌고, 디에고 페르난데스는 잉글랜드 함대와 전투를 벌이기 전에 함대를 떠난 뒤 스페인으로 귀환했다.
그가 원정대에서 이탈한 후, 스페인 대함대는 잉글랜드 함대와의 교전에서 패배한 뒤 스코틀랜드 북부 해안과 아일랜드 해안을 거쳐 귀환하면서 강력한 폭풍을 2차례나 얻어맞고 막심한 피해를 보았다. 리스본에 가까스로 귀환한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은 중병에 걸려서 더 이상 함대를 이끌 수 없었고, 함대 부사령관 미겔 데 오켄도는 사고사했으며, 또 다른 부사령관 후안 마르티네스 데 레칼데는 병사했다. 이에 스페인으로 일찍 돌아왔던 디에고 페르난데스가 임시 지휘권을 맡았다. 그는 흩어진 잔존 함대를 수습해 스페인으로 귀환하는 역할을 수행했지만, 도중에 병을 얻고 대서양 해상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