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07 21:53:58

다누마 오키쓰구

파일:Tanuma_Okitsugu2.jpg
田沼意次
( 1719년 ~ 1788년)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제일 좋아하는 것은 금은보화이다. 그토록 소중한 금은보화를 아낌없이 바쳐 군주에게 봉사하려는 것은 군주에게 충성을 표시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따라서 그 액수의 다과에 따라 그 사람의 봉사정신의 정도를 측정할 수 있다.[1]

1. 개요2. 생애3. 출세4. 몰락5. 그가 남겼다는 가훈

1. 개요

다누마 오키쓰구는 18세기 중반인 에도 막부 시절 쇼군의 측근이었으며, 당대 일본의 최고 권신이었다.

2. 생애

그가 막부 정치를 시작한 1767년부터 1787년 그가 실각할 때까지의 20년을 다누마 시대라고 일본 국사에서 따로 명명할 정도이다. 제8대 쇼군이자 중흥의 명군이었던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죽은 1751년에는 제9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시게의 측근으로서 무려 57,000석의 노중[老衆]에 올랐다. 오키쓰구의 아들 다누마 오키토모(意知) 역시 요직에 등용되어 부자가 함께 제10대 쇼군 이에하루 대까지 권력을 휘둘렀다. 중상주의 정책으로 근세 일본의 재정적인 성장을 이끌고 방향을 제시했으나, 상품 경제가 일으킨 인플레이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민생이 피폐해졌고[3] 부정부패도 극심해 사회 시장 질서가 문란해지고 전통적인 일본의 정신 문화가 쇠퇴한 측면도 컸었다. 쇼군의 절대적인 신임과 경제적 성장을 배경으로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던 그는, 그러나 제11대 쇼군 자리가 다른 집안으로 넘어가면서 몰락했다. 뇌물 정치로 민심을 어지럽힌 간신으로 찍혀 쫓겨났고, 역사에도 그렇게 기록되었다. 장남은 에도 성내에서 암살되었고, 본인 역시 2년 후 쓸쓸하게 눈을 감았다.

3. 출세

1719년 기슈 번(현재의 와카야마현)의 번사인 다누마 오키유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류스케. 그의 아버지 오키유키는 고산케의 하나인 기슈 번이 제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를 배출하면서 하타모토(旗本, 막부 직신)가 되었다. 1734년 오키쓰구는 제9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시게의 시동이 되었고, 이듬해 교호 20년(1735년)에 아버지를 여의고 녹봉 600고쿠를 상속받았다.

1745년 제9대 쇼군 이에시게의 즉위 때 최측근으로서 에도에 봉행한 공으로, 오소바고요:토리츠키(御側御用取次)로 올라 에도 성내에 저택[4]과 사가라 번[5]의 1만 석 영지를 하사받음으로써 다이묘의 반열에 올랐다. 당시 사가라 번은 이런저런 뜨내기들이 거쳐가고 마지막에 혼다 타다나카(本多忠央, 혼다 타다카츠의 5대손)까지 카이에키(개역)를 당하고 쫓겨나 무주공산 상태였다.

제10대 쇼군 이에하루 때는 에도 성내 칸다바시문(神田橋御門)에 집을 또 내려주고, 앞서 언급했듯 사가라 번에 47,000석을 더해주었다. 이때부터 주변에서는 그를 '칸다바시사마'(神田橋様)라고 불렀다고. 축성까지 허락받은 오키쓰구는 에도에서 로츄로서 일하는 동시에 영지에 사가라 성을 지었다. 너무 바쁘다 보니 영지에 들를 시간도 없었는데 축성 12년 째에 검지(検分)를 실시한다는 핑계로 잠깐 방문했다. 당시 도토미국 곳곳에 가도를 정비하고, 사가라 항을 건설했으며, 도카이 가도를 새로 닦는 등 인프라 구축에도 열심이었다.

막부 정치에서는 자수성가한 사람답게 옛 사고방식이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과감한 정책을 펼쳤는데, 러시아와의 무역 개설, 홋카이도 개척 시도[6], 상공업자 동업조합 결성, 특산물의 전매제 실시, 광산 개발, 해외 무역 확대, 시모우사[7] 인바 늪 간척, 건어물(俵物, 타와라모노)의 중국 수출 확대 등 중상주의 정책을 펼쳐 막부의 재정 적자를 상당 부분 해소했다. 그러나 뇌물 수수와 매관매직 역시 횡행해, 당시 다누마의 저택에는 승진과 이권을 노리는 다이묘, 하타모토, 상인들이 뇌물을 바리바리 싸들고 찾아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가장 압권은 누가 '아름다운 인형'이라고 쓰인 큰 상자를 보냈는데 오키쓰구가 열어보니 사람 미인이 들어있었던 것.

또한 새롭고 진기한 이국적 취미가 유행한 것도 이때였다. 난학[蘭學]이 발달했으며, 다이묘들 사이에도 네덜란드에 대한 관심이 지나쳐 '난벽'(蘭癖)이란 지적까지 받을 정도였다고. 다누마 역시 여기에 해당된다. 특히 이때부터 서양 문물 수입과 교역으로써 일본 서부 지방 다이묘들이 성장해 70년 뒤 메이지 유신의 토대가 되었다고 평가된다.

4. 몰락

그러나 1782년부터 텐메이 대기근이 시작되었고, 10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하루마저 죽자, 1786년 오키쓰구는 노중에서 직위 해제되었고, 20,000석의 영지와 오사카 저택 등의 몰수, 에도 저택의 양도 등을 명령받고 폐문 처분이 내려지게 되었다. 제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는 경쟁 가문인 고산쿄(御三卿) 출신 히토츠바시(一橋) 가문이었던 것이다. 오키쓰구는 이에하루의 세자 이에모토가 요절하자 발등에 불떨어지듯 이에나리를 이에하루의 양자로 입적시켰지만, 이에나리 파는 즉위하자마자 오키쓰구를 쳐냈다.

끈떨어진 오키쓰구는 쓸쓸한 말년을 보내다가 2년 후인 1788년 향년 70세로 사망했다. 장남 다누마 오키토모는 1784년 같은 하타모토인 사노(左野)에게 에도 성내에서 암살됐지만, 남은 세 아들만은 훨씬 이전에 다른 가문의 양자로 보내졌던 터라 목숨을 부지했다. 이중 오키츠구의 손자 다누마 오키아키에게만 사가라 번(1만 석) 상속이 허락되어 다누마씨가 100년간 더 다스리게 되었다.

다누마 사후 이른바 칸세이의 개혁을 주도했던 마츠다이라 사다노부 집권기에는 다누마가 재평가받기도 했다. 사다노부의 개혁은 막부 재정 정비와 백성들의 생활 안정 등을 추구한 반면 사치 금지 정책을 펼쳤는데, 문제는 이 사치 금지가 지나쳐서 간단한 유흥이나 오락조차도 엄격하게 규제했다는 것이었다. 하도 강경한 정책을 펼친 탓에,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는 "물이 너무 맑아 고기가 못 살 지경이라네. 차라리 흐렸던 논물[9]이 그리울 지경일세."라는 노래가 유행하기도 했다.

5. 그가 남겼다는 가훈

一・主君に対しては忠誠を誓い、このことは決して忘れ損じてはならない。当家においては特に、九代家重様、十代家治様に多大な御恩を受けているのだから、夢々忘れてはならない。
(주군에 대해 충성을 맹세하고, 이를 절대 잊어선 안 된다. 우리 집안을 두고 특히, 9대 이에시게님, 10대 이에하루님이 하해 같은 은혜를 내려주심을 꿈에도 잊지말라)
二・親に対する孝行、親族に対する配慮をおろそかにしてはならない。
(부모에 대한 효도, 친척들에 대한 배려에 소홀해선 안된다)
三・同族間ではもちろんのこと、同席の衆、親しい人に対し態度を変えることなく接するように。どんなに身分が低くても、情をかけるところは差別のないようにすること。
(혈육은 물론 우연히 동석한 사람, 지인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 말고 대하라. 아무리 신분이 낮은 자도 정을 다해 차별함이 없도록 하라)
四・家中の者に対しては、依怙贔屓(えこひいき)がないように気をつけて接すること。使いやすい人、使いにくい人にも、大いに気配りをして、しっかり召し使うこと。
(부하들을 차별(贔屓)없이 대하도록 신경 써라. 부리기 좋고 나쁜 걸 따지지 말고 대범하게 신경써주고 제대로 대우하라)
五・武芸は怠ることなく心がけ、家中の者にも重々申し付けること。若者には特に精を出させ、大いに励ませるべきこと。ただし、武芸に精を出した上は、その余力で遊芸に励むことは勝手次第で、それを止めだてする必要は毛頭ない。
(무예에도 태만하지 않도록 유의하고, 부하들에게도 신신당부하라. 젊은이는 특히 온 힘을 다해 무예에 힘써야 한다. 다만 무예에 힘을 쏟고 남은 여력으로 취미 활동[遊芸]을 즐기는 것은 각자의 자유다. 막을 필요는 전혀 없다.)
六・権門の衆中には隔意失礼のないように心がけること。公儀に関わることはどんなに些細なことでも慎重に行い、諸事入念が肝要である。
(권세가의 사람들에게는 격의를 다해 실례가 없도록 마음을 써라. 막부 일에 대해선 어떤 것도 자세하고 신중하게 처리하고 모든 일에 신경을 다함이 중요하다)
七・諸家の勝手向が不調なのはどこも同じようで、好調なるは稀である。不勝手が募ると幕府御用にも支障が置き、軍役も充分に勤まることが出来ず、領地を拝領している意味がない。家の経済を守ることはとても大切なことであるので、常に心がけることが肝要である。
(다이묘들의 재정이 엉망인 것은 어느 집이나 마찬가지이므로, 흑자가 나도록 노력은 해야 한다. 궁핍해지면 막부의 도움을 받게 돼 막부에 폐를 끼치게 되고 군역도 다할 수 없게 돼 영지를 내려주신 의미가 없어진다. 집안 경제를 지키는 것은 중요한 것이므로, 항상 마음을 다함이 긴요하다)


[1] 오키쓰구가 항시 입에 달고 살았던 말로 위를 토대로 그의 정치관을 짐작할 만하다[老衆] 로츄. 쇼군의 직속 가신단의 수석 가신으로 국가 정사를 통솔하는 사실상 재상 직책의 지위였다.[3] 텐메이 대기근도 그의 실책으로 피해가 더 심해졌다고 여겨졌다.[4] 현재 도쿄도 주오구 야에스 고후쿠바시 역 부근[5] 현재 시즈오카현 마키노하라시. 규슈의 사가라가 아님.[6] 다만 개발 계획 단계에서 그가 실각해 무산됐지만 메이지 시대에 다시 진행되었다.[7] 현재 치바현이바라키현 일부[蘭學] 네덜란드를 통해서 들어온 유럽의 학문, 기술, 문화를 통칭하는 것[9] 다누마 집권기를 의미한다.[遊芸] 다도, 화도, 장기 등의 취미 활동 전반을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