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17 20:28:41

니콜라스 드 세그레이브

성명 니콜라스 드 세그레이브
Nicholas de Segrave
생몰년도 1238년경 ~ 1295년이후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미상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미상
아버지 길버트 드 세그레이브
어머니 아마벨 홀콤브
형제 앨리스 드 세그레이브
배우자 모드 드 루시
자녀 존, 니콜라스, 헨리, 제프리, 사이먼, 길버트, 스티븐, 아나벨, 엘리노어
직위 초대 세그레이브 남작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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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제2차 남작 전쟁에서 시몽 드 몽포르의 편에 서서 헨리 3세, 에드워드 왕자와 대적한 일로 영지를 몰수당했지만, 나중에 사면된 뒤 에드워드 1세에 충성을 다했다.

2. 생애

세그레이브 가문의 시조 길버트 피츠헤어워드는 레스터셔 지주였다가 1166년 워릭 벡작으로부터 레스터셔에 있는 세그레이브 영지를 받고 기사가 되었다. 그의 아들 스티븐은 헨리 3세 치하에서 잉글랜드의 재판관이 되었고, 많은 재산과 영지를 확보했다. 스티븐의 아들 길버트는 로버트 홀콤브의 딸이자 상속인인 아마벨과 결혼하여 니콜라스의 앨리스를 낳았다. 앨리스는 제8대 워릭 백작 윌리엄 모딧의 아내가 되었다.

니콜라스는 1238년경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1254년 가스코뉴에서 스코틀랜드로 가서 알락산더르 3세를 방문해 시칠리아 왕위에 대한 헨리 3세의 둘째 아들 랭커스터의 에드먼드의 권리를 지지하도록 설득하는 임무를 받고 푸아투를 거쳐서 잉글랜드로 가려 했지만, 퐁 시에서 주민들에게 생포된 뒤 옥고를 치르던 중 1254년 10월 8일 즈음에 사망했다. 당시 니콜라스는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헨리 3세는 차남 랭커스터의 에드워드가 그의 후견인이 되도록 했다. 어머니는 나중에 더들리 남작 로저 서머리와 재혼했으며, 세그레이브 영지의 1/3을 "과부의 몫으로" 받았다.

1257년 3월, 니콜라스는 윈저 성의 종자로 언급되었다. 1258년, 그는 300마크의 자금을 지불하는 대가로 레스터셔와 기타 잉글랜드 주들의 광대한 영지를 상속받고자 헨리 3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후 시몽 드 몽포르 등 의회 귀족파와 왕당파가 갈등을 벌였을 때, 그는 시몽 드 몽포르 편을 들었다. 1263년 본격적으로 전쟁을 개시해 왕당파 귀족들의 영지를 습격했다가, 다른 반군 인사들과 함께 파문되었다. 1263년 12월 13일. 왕실과 자신들의 분쟁을 제3자에게 중재하기로 하고,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에게 의뢰하는 것에 찬성했다. 그러나 루이 9세가 헨리 3세 편을 들자, 그는 전쟁을 이어가기로 했다.

1264년 4월 5일 노샘프턴 공방전에서 헨리 3세에 대적했지만 노샘프턴 함락이 임박하자 탈출한 뒤 시몽 드 몽포르의 로체스터 공방전에 참여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런던으로 파견되어 런던 자원병들을 모집한 뒤 시몽 드 몽포르와 합세했고, 1264년 5월 14일 루이스 전투에서 런던 시민병으로 구성된 좌익 부대를 이끌었다. 이 부대는 에드워드 왕자의 기병 돌격에 쉽게 허물어졌지만, 이후의 전투는 시몽 드 몽포르의 승리와 헨리 3세, 에드워드 왕자, 콘월의 리처드 등의 생포로 이어졌다.

1265년 1월 시몽 드 몽포르가 주도하는 의회에 참여했지만 1265년 8월 4일 이브샴 전투에서 에드워드 왕자가 이끄는 왕실군에 패배했고 부상을 입은 채 생포되었다. 그 해 10월 26일, 헨리 3세는 랭커스터의 에드먼드에게 세그레이브 가문의 모든 영지를 부여했다. 이에 반감을 품은 니콜라스는 탈옥한 뒤 자신처럼 모든 영지를 잃은 반군 귀족들과 함께 엘리 섬에 들어가 1267년까지 버티면서 주변 지역에 대한 약탈 습격을 자행했다. 길버트 드 클레어가 1267년 반란을 일으켜서 런던을 접수한 틈을 타 동료들과 함께 사우스워크에 거점을 마련했다. 이 사실을 알게된 잉글랜드의 교황 특사는 사우스워크에 성무 금지령을 내리고 니콜라스의 그의 동료들의 파문을 재개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1267년 6월 니콜라스의 어머니 아마벨이 왕실군에게 엘리 섬으로 들어가는 길을 알려줬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니콜라스는 에드워드 왕자에게 저항 없이 섬을 내주었다고 한다. 그는 벌금을 내는 조건으로 영지를 돌려받았고, 헨리 3세는 그가 벌금을 마련하기 위해 영지민들에게 특별세를 부과하는 걸 허락했다. 그 후 그는 기사로서 잉글랜드 왕실을 충실히 섬겼다. 에드워드 왕자와 함께 십자군 원정에 참여해 왕자의 신임을 얻었고, 1272년 에드워드 왕자가 에드워드 1세로 등극한 뒤 왕실 기사가 되었다. 1277년과 1282년 에드워드 1세의 웨일스 원정에 참여했으며, 1285년 왕과 함께 가스코뉴로 원정해 프랑스의 침략을 저지하려 했지만 취소되었다.

1292년 스코틀랜드 왕위를 놓고 경쟁한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소송전을 맡은 판사로 선임되었으며, 군주의 대리인으로서 워릭셔, 헌팅던셔, 노샘프턴셔, 레스터셔 및 맨 섬의 지역 위원회에서 봉사했다. 1294년, 에드워드 1세를 대신해 독일왕 아돌프 및 쾰른 대주교 지그프리트 폰 베스터부르크와 협상했다. 1295년 여름 세그레이브 남작으로 선임되어 의회에 처음으로 출석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3. 가족

  • 모드 드 루시: 켄트의 뉴잉턴, 쿠블링턴, 버킹엄셔, 달링턴 및 슬랩턴, 노샘프턴셔 등지에 영지를 둔 기사 제프리 드 루시의 딸.
    • 존 드 세그레이브(1256 ~ 1325): 제2대 세그레이브 남작.
    • 니콜라스 드 세그레이브(? ~ 1321): 노샘프턴셔의 스토우 영주, 1308년부터 1316년까지 잉글랜드 왕실 마셜.
    • 헨리 드 세그레이브: 기사.
    • 제프리 드 세그레이브: 1307년 레스터셔 보안관.
    • 사이먼 드 세그레이브: 요절.
    • 길버트 드 세그레이브(1266 ~ 1316): 런던 주교.
    • 스티븐 드 세그레이브: 에식스 대주교.
    • 아나벨 드 세그레이브: 제7대 워릭 백작 존 뒤 플레시스의 손자인 존 뒤 플레시스의 부인.
    • 엘리노어 드 세그레이브: 애시비 남작 앨런 라 주쉬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