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08 19:18:54

니지뉴

파일:Niginho.png
이름 레오니지우 판토니
(Leonídio Fantoni)
생년월일 1912년 2월 12일
사망년월일 1975년 9월 5일 (향년 63세)
국적
[[브라질|]][[틀:국기|]][[틀:국기|]]
출신지 벨루오리존치
포지션 중앙 공격수
신체 180cm | 70kg
소속 구단 파울리스트라 이탈리아(MG) (1929-1933)
SS 라치오 (1934-1936)
파울리스트라 이탈리아(SP) (1936)
CR 바스쿠 다 가마 (1937-1938)
크루제이루 EC (1939-1947)
국가대표 4경기 / 2골 (1937-1938)
감독 크루제이루 EC (1948-1949)
산투스 FC (1950-1951)
크루제이루 EC (1953-1955)
크루제이루 EC (1959-1961)
크루제이루 EC (1962-1963)

1. 개요2. 생애
2.1. 유년 시절2.2. 선수 경력2.3. 감독 생활2.4. 사망
3. 플레이 스타일 및 평가4. 수상
4.1. 선수
4.1.1. 클럽4.1.2. 국가대표4.1.3. 개인
4.2. 감독
4.2.1. 클럽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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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라질의 前 축구 선수 출신 감독.

2. 생애[1]

2.1. 유년 시절

니지뉴는 이탈리아계 브라질인이며 파울리스트라 이탈리아의 서포터였다. 그래서인지 니지뉴는 형 주앙, 사촌형 오타비우와 함께 파울리스트라에서 같이 뛰게 되었다.

2.2. 선수 경력

2.2.1. 클럽

파울리스트라 이탈리아는 미나스 제라이스 주의 강팀이라 1929, 1930년에 지역 리그 연속 우승을 달성했었다. 하지만 1931년에 주앙과 오타비우가 이탈리아SS 라치오로 이적한 후 파울리스트라 이탈리아는 강팀으로서의 위용을 잃었다.

그리고 1934년, 니지뉴 역시 라치오로 이적했다. 당시 라치오는 주앙, 오타비우 형제 외에도 필로 등 브라질 선수들이 많이 뛰고 있어서 니지뉴가 새로운 팀에 적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1934년 1월 21일에는 AC 밀란을 상대로 해트 트릭도 기록했다.

1935년에 니지뉴는 이탈리아 국적도 취득했지만 이것으로 그의 이탈리아 생활은 크게 꼬였다. 바로 같은 해에 일어난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때문으로 니지뉴에게도 동원령이 날아온 것이다. 게다가 개전 당시의 니지뉴는 결혼한 지 한 달도 안 된 새신랑이었던터라 그는 이탈리아를 떠나기로 결심했고 라치오 구단은 이를 수용했다. 선박 운임을 지원해 준 라치오 구단의 배려로 니지뉴의 가족은 무사히 이탈리아를 빠져나갔지만 그의 사촌 오타비우가 코뼈 골절로 인한 감염으로 사망하는 등 1935년은 니지뉴에게 힘든 한 해였다.

라치오 구단의 공식적인 이적 절차는 없었지만 브라질로 돌아간 니지뉴는 파울리스트라 이탈리아[2]로 이적했고 2달간 6경기 6골을 넣었다. 니지뉴의 활약으로 파울리스트라 이탈리아는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챔피언이 될 수 있었다.

니지뉴는 CR 바스쿠 다 가마에서 득점왕을 차지한 후 1939년부터 친정팀 파울리스트라 이탈리아에서 다시 뛰게 되었고 1947년에 은퇴할 때까지 그 곳에서 머물렀다.

2.2.2. 국가대표

CR 바스쿠 다 가마에서 뛸 때 니지뉴는 셀레상의 일원이 되기도 했다.

니지뉴는 1937년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 2골을 넣었지만 브라질은 아르헨티나에 밀려 준우승을 거뒀다.

그는 레오니다스의 백업으로 프랑스 월드컵에도 참가했지만 SS 라치오에서 나올 때의 과정이 매끄럽지 않아서인지 월드컵에서 단 한 경기도 뛰지 못했다. 레오니다스가 보르도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회복이 덜 된 상태로 재경기를 뛰는 지경임에도 니지뉴는 피치에 나오지 못했고 결국 브라질은 4강전에서 이탈리아에 패하며 결승 진출이 좌절되었다.

2.3. 감독 생활

니지뉴는 선수 은퇴 이후 감독으로 친정팀 크루제이루 EC를 주로 맡았고, 감독으로서의 전성기는 1959년부터 1961년까지 캄페오나투 미네이루 3연패를 이끈 시기였다.

2.4. 사망

1975년, 니지뉴는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3. 플레이 스타일 및 평가

니지뉴는 큰 키와 체력으로 상대 수비진을 돌파하던 센터 포워드로 탱크라고 불렸다. 크루제이루 EC 초창기 시절 팀을 대표하던 선수였다.

4. 수상

4.1. 선수

4.1.1. 클럽

4.1.2. 국가대표

4.1.3. 개인

4.2. 감독

4.2.1. 클럽

5. 여담

  • 부인 안나는 헝가리 출신 여성이었고 로마에서 만나 결혼했다.
  • 니지뉴는 판토니 Ⅲ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당시 이탈리아나 스페인 축구계에선 형제나 친척 관계의 축구선수들에게 번호를 붙이는 관습이 있었다. 그래서 형 주앙은 판토니 Ⅰ, 사촌형 오타비우는 판토니 Ⅱ, 동생 오를란두는 판토니 Ⅳ, 조카 페르난두는 판토니 Ⅴ로 불렸다.
  • 1938년 월드컵 당시 니지뉴는 이탈리아의 공식적인 항의를 받지는 않았다. 다만 이탈리아 팬들에게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도피했다는 이유로 탈영병이라는 비난과 야유를 받았다.
  • 니지뉴는 1958년에 레오니다스이탈리아와의 4강전 당시 베니토 무솔리니에게 뇌물을 받고 경기 출전을 피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레오니다스는 이에 즉각 명예훼손으로 재판을 걸었고 결국 레오니다스가 승소했다.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2] 니지뉴가 처음 뛰었던 파울리스트라 이탈리아는 나중에 이름을 크루제이루 EC로 바꿨고 이 팀은 SE 파우메이라스로 바꿨다. 초창기엔 두 팀의 이름이 같았다.